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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극복을 위한 선조들의 지혜

개요

선사시대부터 적어도 태고를 거쳐 상고시대에 이르기까지 풍수해나 한해에 대처하는 방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위정자가 재난에 대비하여 하늘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재난가 임박하면 대피시키거나 재난 후에 이주케 하여 이재민을 안정시켰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부족하나마 양곡을 풀어 진휼하거나 종자와 농구(農具)를 주어 권농하는 사업을 하였으나 이 같은 시행은 상고시대에 이르러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재난대처 방안은 재변에 대한 공포와 재난으로 인한 시련을 잊게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로책이었고 민심 수습책 또는 덕치(德治)를 표방하는 자위책이었으므로 본질적인 재난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활동들은 최근까지도 줄기차게 계속되었으며 기상관측이나 치산치수를 위한 수리시설 및 제언수축(堤堰修築) 등의 근대 과학적인 대책과 함께 재난를 극복하는 지혜는 시대변천을 따라 발전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천문과 역술의 탐구

선사시대부터 적어도 태고를 거쳐 상고시대에 이르기까지 풍수해나 한해에 대처하는 방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위정자가 재난에 대비하여 하늘과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면서 재난가 임박하면 대피시키거나 재난 후에 이주케 하여 이재민을 안정시켰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부족하나마 양곡을 풀어 진휼하거나 종자와 농구(農具)를 주어 권농하는 사업을 하였으나 이 같은 시행은 상고시대에 이르러서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재난대처 방안은 재변에 대한 공포와 재난으로 인한 시련을 잊게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로책이었고 민심 수습책 또는 덕치(德治)를 표방하는 자위책이었으므로 본질적인 재난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활동들은 최근까지도 줄기차게 계속되었으며 기상관측이나 치산치수를 위한 수리시설 및 제언수축(堤堰修築) 등의 근대 과학적인 대책과 함께 재난를 극복하는 지혜는 시대변천을 따라 발전되어 왔음에 틀림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며, 기상이변은 곧잘 불가항력의 재난을 초래하므로 천문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정밀한 역술을 적용하여 이들 이변을 예측하는 일은 생존과 농경 또는 국운을 지키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삼국사기에 1,000여 개의 기록이 있고 고려사에 6,500여 개의 천재지변이 기록되어 있으며 1392년부터 1510년까지의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기록수만도 8,000여 개에 달한다고 하니 천문탐구에 바친 선조들의 노력이 어떠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상고시대의 경우 신라에서는 혁거세왕 9년(기원전 49년)에 '가시오피아좌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고, 특히 천문관측을 맡은 관리가 있어서 이를 천문박사 또는 사천박사라 불렀으며, 이미 7세기에는 첨성대를 건립하여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기상기록으로는 고구려에서는 유리왕 13년(기원전 7년) 화성의 관측이 기록되고 있으며 또한 백제에서는 온조왕 6년(기원전 13년)에 이미 일식을 관측하였고, 특히 백제에서는 천문학에 지식을 구비한 사람이 많아서 성왕 23년(서기 545년)에는 역박사 고덕왕계를 일본에 보냈고, 서기 602년에는 백제 승(僧) 관혁이 역서를 비롯한 천문지리서를 일본에 가져가 가르쳤으며, 신라의 첨성대도 백제의 아비지가 선덕왕 16년(서기 647년)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천문관측과 기상기록은 고려조를 통하여 계속되었다. 천문관측을 수대에 걸쳐 꾸준히 해야 하는 것은 이들 관측자료를 통하여 자연현상의 변화와 이치를 깨닫고 장차 변화를 추고(推考)하는 방법, 즉 역법을 설명하는 데 있다.

역법에 의하여 장차 계절변화를 예측할 수 있으며 따라서 종자의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적기에 잡고, 일월식을 통계처리 하여 밝혀냈다.
우리 나라는 신라 때부터 당에서 선명력을 도입하여 사용하였고 고려 충선왕 때부터는 최성지가 원나라에서 수시력을 가져 와 쓰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술로는 일월식과 오행성의 운행법 뿐만 아니라 농사의 첫걸음이 될 일출과 일몰조차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천문관측을 더 과학화하고 정밀히 하여 역일(曆日) 제작을 위한 연구를 독려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종 14년 7월에 정인지, 정교, 정흠지에 명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케 함으로써 비로소 서울의 북위가 38도이며 1년의 길이를 정확히 관측할 수 있었다. 또한 우리의 표준시간을 정하고 일월성신의 위치를 표기하는 간표로서 혼천의를 설치한 간의태가 세종 15년에 비치됨으로써 천문관측이 실용화되었고 이듬해에 자격루가 창제됨으로써 수시,역시의 표준사용이 반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침수심을 계측하여 지역별 강우량을 측정 기록케 한 것이 후일의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케 했던 동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세계 최장기 측우기록인 경성출수표를 낳게 하였다.

다만 이렇게 귀중한 조사, 관측자료를 실생활 및 농경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수리행정제도

고려시대에 공부(工部)의 기능 중에 산택에 대한 것이 있으며, 수력사회로서의 조선은 농업이 국가의 전 산업이었으므로 관개를 중심으로 하는 수리 행정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수리 행정제도를 살펴보면 태종 때에는 공조산하의 산택사의 기능에 제언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수리 행정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년)의 세종실록에서 전국의 제언대장을 2부 만들어 1부는 호조에, 1부는 궁중에 비치하였다는 것을 보면 이때 이미 수리행정은 공조를 떠났고 세종 26년(1444년)에는 판적사로 하여금 제언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에 독립관청인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수리행정을 전담하게 하였으며 제언사가 조선시대의 수리행정에 적지 않은 공적을 남긴 것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관도 임진왜란 이후 문란해진 국가기강을 회복하면서 수리사업을 궤도에 다시 올리는 것이 힘겨웠는지 숙종 9년(1683년)에는 그 기능을 비변사로 이관하였다가 영조 7년(1731년) 비변사의 산하기관으로 편입되었다. 그 후 제언사는 고종 2년(1865년)에 의정부에 소속되었다가 광무 3년(1902년)에 폐지되어 내장사 수륜과로 개편되었고, 광무 6년(1902년)에는 수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폐지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시대의 지방토목제도는 이렇다 할 법규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관청의 직영사업이라 할지라도 지방관습에 따라 이동민(里洞民)의 자치적인 시설로 처리하였다. 제언의 경우는 수축과 개수에 중점을 두고 수령은 춘추 2회 정기적으로 수축을 행하되 각 면의 권농관이 이것을 보좌했다. 수리시설에 대하여는 수령이 직접 감독을 맡으며 제2차 관청으로 관찰사 그리고 주무조(主務曹) 또는 제언사가 그 임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당시에 수리행정의 진작은 무엇보다도 수령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이것들이 지켜지지 않음으로서 정부는 경차관(敬差官), 어사(御使), 낭관(郎官) 등을 수시로 파견하여 수리사업의 촉진을 독찰 했다.

수차의 이용

수차(水車)는 한발에 대비한 양수기로서 관개 수리 사업에 쓰이는 데 수차 이용에 관해서는 고려 공민왕 1년에 첫 기록을 볼 수 있다.

수차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용골차와 통차이고, 16세기 이후에는 용미차(Archimedes screw)와 옥형차 같은 서구식 수차가 도입되기도 했다. 고려말 이래로 수차라면 일반적으로 용골차, 즉 번차로 우리말로 '물자애(위)'라고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한대(170년경)에 발명되어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

세종 11년(1429년)에 일본으로부터 통차가 보급되었는데 종래의 족답식보다 훨씬 효율적이어서 자격수차라고 불리었고, 이때부터 종래의 수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여 당수차라 하고, 통차를 일본에서 들여왔다 하여 왜수차라 했다.

성종 때부터 연산군 2년(1496년)에는 최부가 중국에서 보고 온 수전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고, 연산군 8년(1502년)에는 전익경이 정교하고 능률적인 수차를 만들었다고 하며, 명종 15년(1546년)에도 중국의 수차를 보급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기록들이 실록에 나타나 있다.

숙종 때에도 물리학자 이민철이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숙종 9년(1683년)에 보급하였으나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정조대에 이르러 서양계 수차인 용미차를 중국에서 들여왔다.

이와 같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차는 농민들에게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농민들의 가난 때문에 새로운 수차를 만들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나라의 지세와 자연조건으로 볼 때 대체로 천수로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상례이고, 가뭄이 심할 때에는 수차를 돌릴 만한 물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쓸모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수차의 보급이 어려웠던 다른 문제들 중에는 자재의 문제, 즉 수차 제작에 쓰일 목재가 우리 나라에는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토질이나 우량의 면에서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은 수전농업에 있어서 보(洑)나 제언(堤堰)을 발전시켰고, 벼 재배는 그러한 시설로 족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수차의 제작은 절실한 문제로 요청될 수 없었고 더욱이 벼 재배는 부종법이 주여서 파종기의 물 문제는 이로써 어느 정도 조정할 수가 있었다.

그런 대로 가장 잘 보급된 것이 답차라는, 발로 밟아 돌리는 물레바퀴였다. 그것은 간편하여 제작비가 적게 들고 한 사람이 밟아 돌리는 데도 두레나 용두레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답차는 지금도 삼남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수차이며, 염전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수리시설 수축

수전농법을 주축으로 하여 농경문화를 이룩해온 우리 나라에서 한해(旱害)와 수해(水害)는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해와 수해를 미연에 다스리면서 벼농사를 이끌어오기 위하여 제언을 비롯한 수리시설을 해온 것은 무엇보다도 적극적이며 실제적인 대응책이었다고 하겠다.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에서는 수자원 토목사업이나 물 관리 기술이 발달하여 중농정책에 의한 국가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던 점과 우리 나라에도 태고 및 상고시대에 부분적인 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에 비추어 일찍부터 상당한 정도의 제방축조와 수리시설의 수축이 진전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후한서에 보면 한사군의 왕경이 후한 명제(서기58~75년)의 명을 받아 영양에서 천승 해구(海口)에 달하는 1,000여 리의 거제(渠堤)를 성공적으로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 규모만으로 보아도 당시의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 수리시설은 상당히 많이 축조되었을 것이나 기록이 불비한 탓으로 삼국사기에는 대부분 신축이 아닌 수축의 기록이 발견된다. 일본의 고사기 응신천황 7년 9월에 보면 백제인의 수리토목기술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기록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13왕대에 국한된 주로 제지수축의 사실이 발견될 뿐 고구려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경우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1의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11년(서기 144년)에 제방을 수리토록 명했으며, 흘해이사금 20년(서기 330년)에는 '벽골지를 개척하였는데 그 안장이 일천팔백보'였다고 하며, 법흥왕 18년(서기 523년)에는 유사(有司)에게 제방을 수리케 하였고, 원성왕 6년(서기 790년)에는 '벽골지 증축에 전주 등 칠주인을 동원하였다.'고 하였다.

백제의 경우 개루왕 40년(서기 790년)에는 '6월초에 큰비가 10여 일이나 내려서 한강수가 넘치고 민가가 헐어 내렸으므로 왕은 유사에 명하여 국지를 보수케 하였다.'고 한 것을 비롯하여 구수왕 9년(서기 222년)에는 제방보수를, 그리고 무령왕 10년(서기 510년)에는 제방신축과 유식자(遊食者)의 귀농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요교호(익산), 장연호(종성), 소정호(통천), 천계호(통천), 광포(함흥), 강동포(통천), 남대지(연백), 영포(경흥), 화포(간성)과 목포(창녕) 등도 고려 이후에 사용 사실이 기록되고 있으나 벽골지와 마찬가지로 이미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제방시설명의 지명과 인명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 비롯되었을 것이며, 현재의 밀양의 옛지명이 미리미동, 즉 미리는 긴 용이란 뜻이고, 미는 물을 뜻하며 동은 둑의 고음이었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삼한시대나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제방으로는 김제의 벽골지, 상주의 공검지, 의성의 대제지,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지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국초의 중농정책과 농구생산의 증대 및 간전사업으로 곡간지(谷間地)에 분포하던 벼농사는 해안의 수택지(水澤地)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로 인한 한해, 수해 방지 및 용수원 확보를 위해 제방의 신축과 수리가 매우 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종 21년에는 구제를 증수했고, 24년에는 김제군의 벽골지언을 신축 확장시켰으며, 고려사에는 '명종 18년 3월에 제언을 고쳐서 저수하여 윤택하게 경작시켜라'고 한바 있다. 또한 고려사절요, 증보문헌비고에도 제방의 보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도 국초부터 중농정책을 부르짖었기 때문에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수축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태조 4년(1395년)에 전도장(前都將) 정분이 진언한 내용 중, '제언은 한발과 수재를 대비하는 것이니 도하관찰사들에게 주부군현(州府郡縣)의 한량, 무사, 염간자(廉幹者)를 택하여 권농관으로 삼고 추동이 맞닿은 때에 제언을 수축함으로써 설수(雪水)를 담게 하되 치밀하게 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분부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여 이에 응하였다고 한다. 물론 본격적인 수리사업은 태종 15년(1415년)에 있었던 벽골지 수축으로서 이때에 동원된 1만명이 지방관찰사와 파견된 경차관 하에서 이룬 역사는 안장 77,000보, 수문이 5개, 수리면적이 9,840결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수리사업의 예를 들면 세종조에 고부군의 눌제, 성종조에 재령군의 전탄개거사업, 중종조에 광주군의 견항축방공사, 효종, 현종, 숙종조에 수차의 강화도공사, 영조조에 낙동강 제방공사, 정조조에 포항제, 철종조에 청주군의 혜정제 등을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세종 2년 8월에 눌제와 벽골제가 홍수로 파괴되었듯이 당시의 수리기술은 우리 나라의 홍수 특성을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왜호(倭胡)에 의한 양대 전란을 겪게 되면서 지방 세력가들의 농민 수탈과 착취는 날로 성행해 갔으며, 제언보 등의 수리시설들은 수축되지 않은 채 토호세력들이 점유하게 되었다. 또한 저수지 바닥의 비옥한 곳에 농사를 짓는 모경(冒耕)까지 성행하였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제언사를 설치하거나 제언사목을 정하여 방알축을 세우는 등의 시책을 폈지만 전국의 제언의 수는 날로 감소할 뿐이었다. 드디어 숙종조에 한발이 극심하게 되자 폐언에 경간(耕墾)하는 모경까지 허가하기에 이르렀다. 영조 6년부터 정조 6년 사이의 52년간에 317개소 제언이 폐쇄되었고 융희(1908년)에는 또다시 598개소가 감소되어 당시의 사회적 문란상을 짐작케 한다. 다행히 현종 3년(1662년)에 제언사목과 함께 정조 2년(1778년)에는 제언절목이 반포되는 업적을 남겼다.

덕치와 진휼

농사의 풍흉을 좌우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천기였으며, 이는 곧 국운을 좌우하는 국가의 대사였고 인본의 대사였음에 틀림없다. 아직 식물 재배의 이치에 불비하고 천기변화에 대처하는 사고가 미비하였던 태고 및 상고 당시에는 군왕부터 민관이 모두 천지신명 앞에서 근신하고 제례나 주원(呪願)을 드리며, 상하빈부간에 동정으로서 진휼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권업하는 방식이 고작일 수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덕치와 진휼 및 권업행사가 이루어졌던 동기는 주로 한발에 기인한 경우였으나 재난이변을 총합하면 다음과 같다.

  • 01.근신행위는 천재의 원인을 왕의 부덕에 이는 것으로 보고 근신하는 피정전(避正殿, 또는 철상조, 좌첨하), 먹고 노는 행위를 자제하는 감상선(減常膳, 또는 파영선, 금주, 금흡초), 잔인행동을 삼가는 금도살(禁屠殺, 또는 지용포염), 농민의 고통을 함께 하는 단산선(또는 금극모휘선), 음악기를 종으로 대신 하는 철락현(또는 금격파종, 정진풍경), 저자거리를 닫고 생필품만 거래케 하는 이시(移市, 또는 도시, 천시, 항시), 심신과 환경을 청결히 하기 위해 대청소를 하는 격성중지(또는 척구거), 활쏘기를 자제하는 금사후 또는 불신자에 대한 처벌 등으로 망라되어 있었다.
  • 02.이재(罹災) 백성에게 각종 혜택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 위로하고 대동단결하여 재난을 극복하려는 진휼사업으로서 이미 상고시대부터 백성을 보호한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 봉상왕 9년 (서기 300년)의 한발에 대궐을 수조(修造)하려는 왕의 뜻을 막은 창조리라는 대신(大臣) 이야기나 또는 신라와 백제에서 흉년에 방수도(放囚徒)한 사례가 그러하다.
    또 사직단을 세워 토지와 곡물을 신에게 제사한 일도 권농과 백성보호를 위한 일종의 진휼사업으로서, 고구려는 고국신왕 9년(서기 392년), 신라는 선덕왕 4년(서기 783년)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식량과 곡식을 배급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는 본격적인 진휼사업이 시작되었는데, 신라 남해차차웅 15년(서기 18년) 실시한 것이 최초 기록이다.

    특히 고려시대에 재면지제(災免之制)와 의창을 비롯한 진휼 사업이 대대적으로 발전했다. 즉 재난의 강도가 4할에 이르면 곡물세를 면하고, 6할에 이르면 곡포세를 면하며, 7할에 이르면 곡포에 부역까지 면하는 제도가 성종 7년(988년)부터 공양왕 3년(1391년)까지 지속되었다. 또 진휼품으로는 곡포와 피륙, 소금, 장유에 이르렀으며, 비상시에 대한 비축대여 창고로는 태조조부터 흑군으로 불리며 시행되다가 성종 5년(986년)에 의창으로 개칭된 제도와 비축방출 창고제도인 상평창제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사직제도와 진휼창제도 및 면세제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상평창제도는 곡가조절의 목적으로 운영되다가 급기야는 환곡제가 고리대의 내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03.천지신명과 명산대천에 제례를 지내어 양심을 수습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았으며, 제의의 성격과 법식은 시대변천에 따라 크게 달라져 왔다. 심호두(沈虎頭)나 심구저(沈狗猪)는 강우에 관여하는 것으로 상징되고 있는 용의 서식처, 즉 강, 해, 소연에 호두나 구저를 투침하여 지내는 제의를 뜻한다.
  • 04.비록 비과학적이었으나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는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주원행사를 들 수 있다. 주요행사의 성격을 보면, 신라 진평왕 50년에 기록을 위시하여 용을 이용하는 상용제, 초용기우제가 있어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고 무녀에 의한 무녀도우제와 폭무기우제가 있어서 세종 7년에는 무녀를 모아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또는 불승들에 의한 용왕경, 운우경, 금강경 및 인왕경 강론제, 즉 설제, 설도장, 강불경, 증도기우의 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용을 대신한 도마뱀을 동자들에게 맡겨 주원절차를 따르게 한 역탕기제를 지내기도 했고, 산상에서 북치며 불리우는 번시행사가 있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풍속이 되기도 하였다.

기후제와 기청제

비가 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내 비를 빌었던 일은 고려시대부터 많이 있었지만 이러한 일은 이미 고대부터 시작되었다.

단군신화에 보이는 우사, 운사, 풍백 같은 것은 비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다. 기우제는 산천을 대상으로 하여 무당, 승려, 조관 등을 사제자로 삼아 거행되었으며 이것은 관행공제뿐만 아니라 민간의 제사로도 거행되었다.

민간의 기우제 방법은 산상에서 불을 질러 비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산상의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하여 가물면 묘를 파헤쳐 버리는 묘끝파기 기우행사도 있었다. 또 버들가지 같은 것으로 마개를 한 물병을 처마에 매다는 방법으로 비를 빌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성현의 용재총화에 기우제에 관한 방법과 순서가 기록되어 있다.

기우지례는 먼저 오부에 영을 내려 도랑, 개천, 논밭둑, 길을 깨끗이 한 다음 종묘, 사직, 사대문에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오룡제를 베푸는데 동교에는 청룡, 남교에는 적룡, 서교에는 백룡, 북교에는 흑룡, 중앙 종루거리에는 황룡을 그려 붙이고 제관을 명해서 3일간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한편 용제를 한강 가운데서 베풀고 도사로 하여금 용왕경을 외우게 하기도 하며 호랑이 머리를 박연폭포 등에 던지기도 하였다.

또 창덕궁 후원이나 경회루, 모화관 못가 등 세 곳에서 도마뱀을 물독에 넣어 띄우고 어린아이 수십 명을 청의로 변장시켜서 버들가지로 물독을 치게 하고, 징을 울리게 하면서 크게 외치기를 '도마뱀아, 도마뱀아, 안개를 토하고 구름을 일으켜서 큰비를 내려 달라. 그러면 내 너를 돌아가게 하마.'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내 만호 민가에 명하여 물을 담은 병에 버들가지를 꽂아서 방방곡곡에 차려놓고 아이들을 모아 비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고 남문의 시장을 옮기고 북문을 열기도 하였다. 시장을 옮기는 기우의 방법은 삼국시대 이래 최근까지 전국적으로 행해진 일이다. 조선 전기의 왕조실록에도 서울의 시장을 옮긴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50년(628년) 여름에 큰가뭄이 들어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를 빌었다는 기록이 있다. 시장을 옮기고 용과 비를 관련시킨 일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같은 방법으로 기우를 했는데 예종 6년 7월에는 동현(을지로)으로 서울의 시장을 옮기고 숭례문(남대문)을 닫도록 명하였다. 인조 25년 6월에는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에 남문을 열고 북문을 닫으며 시장을 옛 위치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것은 기우의 반대인 지우, 기청제 행사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가뭄-남문-양의 관계를 막고 비-북문-음의 관계를 열어 비를 맞아들이던 음양사상에 입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상관측기록

근대적 과학으로서의 기상관측은 조선시대 초기에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을 발명함으로써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자급자족하는 토지경제의 확립과 농작물 수확고 증가를 위하여 자연조건, 특히 강우량이 농업경작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을 극복하려던 노력이 하나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강우량이 넉넉치 못하고 우기가 편제하는 자연적 조건하에서 관개수리사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수전경작에 미치는 강우량의 영향은 너무도 컸다. 비가 적기에 적당히 내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풍년과 흉년으로 직결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역대의 군왕들은 이상기후를 대처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며 수시로 기우(祈雨) 기청(祈晴) 기한(祈寒) 기설(祈雪)등의 기제(祈祭) 또는 별려역제를 친재(親宰)하였다. 이들 기상재변을 군왕의 정신적 도의적 및 물질적 책임으로 보고 사직행사 중의 가장 중요한 하나로서 비중을 두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고대사회에서 각종 중요한 천문기록을 많은 관심 속에서 비교적 충실히 남겼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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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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