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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구

연혁

사상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과 따뜻한 기후 등의 좋은 자연적인 조건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생활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사상지역의 신석기 유적으로는 모라동과 학장동의 조개무지 유적에서 김해문화기의 김해식 토기 파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동래에는 독로국(瀆盧國)이 있었으므로 낙동강 하구의 동안지역인 사상지역은 변한 12국중 독로국에 속하였던 지역이다.

삼한 및 삼국시대 사상지역은 거칠산국(居漆山國)의 영역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칠산국은 신라 지증왕 16년(505)에 거칠산군이 되었고, 거칠산군에는 두 개의 속현이 있었는데 그 하나는 갑화량곡현이며, 또 하나는 당감동 근처에 그 치소를 갖고 있던 대증현이다.

거칠산국은『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 의하면,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권23, 동래현조에 의하면, “옛 장산국이다(혹은 내산국 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점유하고는 거칠산군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사상지역은 구포․주례․개금지역과 함께 동평현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성종 2년(983)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이때 사상지역은 상주목에 속했고, 동왕 14년(995) 전국을 12도로 나누고 사상은 영동도 양주군(현 양산) 동평현에 속해 있었다.

조선시대 동래는 태조 6년(1397)에 군사요충지로 진이 설치되고 병마사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를 겸임하였으며, 세종 5년(1423)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개칭, 세종 22년 진을 속현인 동평현으로 옮겼다가 다시 환진하였다. 명종 2년(1547) 동래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동래부지(1740)』에서는 7개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82리 19동 체제로 사상은 사천면에 속했다. 사천면은 상단에 포함되었고, 뒤에 상단은 사상면으로 하단은 사하면으로 불렀다.

『동래부읍지(1832)』에는 사상면에 주례리․괘내리․덕포리․대수리․모라리․장문리․엄광리의 6개의 자연마을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는 12면 154동리로 사상지역은 사상면(주례리․감동․괘내리․모라리․덕포동․창법동․서전동․엄궁동․장문동․학성동․구포동)에 속하였다. 일제시기에는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49년 8월 부제를 시제로 개칭되고, 이후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가 되었다가 1975년 1월 1일 부산진구의 구포 및 사상출장소를 통합하여 북부출장소가 되었다. 1978년 2월 15일 북구로 승격, 그리고 1995년 3월 1일에는 북구에서 사상구로 분구되었다. 현재의 관할 동은 삼락동․모라동․덕포동․괘법동․감전동․주례동․학장동․엄궁동 등이 있다.

감전동

감전동(甘田洞)은 낙동강하구에 형성된 삼각주의 북쪽은 삼락동에 속하고, 남쪽이 감전동에 속하는데, 이곳은 습지로 쓸모 없는 땅이었으나 사상공단 조성으로 매립되어 공장지대로 부산의 대표적인 공단지대로 바뀌었다.『동래부지(1740)』의 기록에는 사천면 상단(上端) 장문리 지역이었고,『동래부사례(1895)』에 처음으로 감동리(甘洞里)란 지명이 처음으로 보인다. 감전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고, 원래는 감동(甘東)마을로 감동촌 또는 감동리(甘洞里)로 불러왔다. 감동(甘洞)의 어원은 "검도" "검터(劒瀆)"이다. 검은 "감, 곰, 금" 등으로 호전하여 신(神)이란 뜻이며, 동은 독(瀆)으로 제방, 둑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부터 우리 나라에는 곰(熊)이라는 동물을 토템으로 삼아 신성시하며, 이를 곰이라 불렀다. 오늘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곰이란 말은 곧 신(神)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감전동의 이름의 유래는 농토가 비옥하여 감전(甘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속설이 있는 듯 하나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옛날부터 마을의 명칭이 생기는데는 더 깊은 전통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중에는 "감"이라는 말이 붙는 곳이 많고 대개 "감(甘)"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흔하다 부산만 하더라도 당감동(堂甘洞)·감천동(甘川洞) 등에서도 알 수 있다. 1978년 8월 공업지대로 발전하면서 급증하는 인구증가로 감전1,2동으로 분동하였다. 이후 인구 감소로 감전1,2동을 통합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동감마을, 서감마을, 장인마을, 포푸라마치가 있었다.

괴법동

괘법동(掛法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사천면 상단 괘내리로 그 이후 계속해서 괘내리로 불리게 된 지역이다. 1901년(광무 5)의 기록에는 사상면에 냉정촌·주례촌·감동촌· 괘내촌·덕포촌·모라촌 등 6개 촌이 기록되어 있어 촌과 리를 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괘법동의 지명유래를 보면, 괘내(掛乃)마을이 제일 먼저 생기고 뒤이어서 두 개의 마을이 생겼는데 동쪽은 동괘(東掛), 서쪽을 서괘(西掛)라 한 것으로 보인다. 괘내는 괘법동의 서쪽을 흐르는 작은 내를 중심으로 개(海)를 흐르는 내(川)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이 고인 곳"이 "물이 괸 곳"이므로 이곳을 "괴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며, "괴"를 한자로 적자니 괘(掛)가 된다는 것이다. "개"나 "괴"가 "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비약적으로 "계(桂)"가 된 경우도 있다. 괘법이란 동명은 괘내에서 비롯된 것으로 바닷가나 강가에 있는 마을 또는 물이 고여 있는 마을이란 말로 추정되며, 사상 팔경대의 법곡(法谷)과 같이 붙여져 얻어진 이름으로 보인다. 괘법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1975년 구포 및 사상출장소의 통합으로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 북구로 승격되었고, 1995년 3월 행정구역개편으로 사상구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괘내마을, 서괘마을, 동괘마을이 있었다.

덕포동

덕포동(德浦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상단 덕포리(德浦里)의 기록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포는 옛 이름이 "덕개"이며 덕(德)을 득(德)으로 발음하였다. 덕은 "언덕" "두덕" "부"의 차자(借字)로 옛부터 지명에 많이 사용되어 왔다. 따라서 "득개", "덕개"는 "언덕개"라는 말이며 언덕에 있는 포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언덕 끝에 배를 대는 포구에 "득포 또는 덕포"라는 이름이 붙는다. 오늘날의 덕포동에는 낙동강을 향하여 길게 뻗어나온 긴 동산이 한 곳밖에 없다. 즉 상강선대와 하강선대의 중간 간선도로변에 있는 바위 언덕이 그것이다. 이곳이 바로 언덕개 즉 덕포동의 원위치가 되는 셈이다. 이 언덕이 바로 동리의 포구였고 여기에서 동리이름이 덕포동이 된 것이니 이곳이 퍽 유서깊은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바위에는 강물의 침식을 받은 흔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해안석(海岸石)인 셈이다. 1982년 아파트가 신축되는 등으로 인구의 증가로 덕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가포마을, 덕포마을, 웃덕포마을이 있었다.

모라동

모라동(毛羅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方里條)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모라리에 속한 오래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래부읍지(1832)』에 의하면, 사천면이 사상면과 사하면으로 분리되면서 사상면 모라리가 되었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모라"를 "모란"이라고 변음하여 부르며 모라동의 뒷산기슭에 옛날에 모란(牧丹)꽃이 많이 피어 있어서 동리 이름을 "모란"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모라"라는 말은 "마을"이라는 우리말의 고대어(古代語)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집회소(集會所)가 있고 이 집회소의 명칭이 "마을"이며 이것이 촌락의 명칭과 함께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 집회소를 사용하던 건물이 후세에 내려오면서 지방에 따라 도청(都廳), 공청(公廳), 모정(茅亭)으로 변하고 그 뒤에는 집이 없어졌어도 정자나무 밑에 모여서 마을일을 의논하였다. "정자나무"라는 이름은 그 식물명이 아니라 없더라도 정자에서 모였던 것처럼 동민이 고목밑에 모이는 곳이라는 뜻에서 부른 것이다. 이 집회소를 우리말로 "마을" "모을" 또는 "말" "몰" 또는 "마슬" "마실"이라고 했으며 동시에 집회소가 있는 촌락을 같이 말하게 된 것이다. "마슬" "마실"은 마을의 변음이다. 1991년 9월 시조례로 모라1,2동으로 분동되고, 1994년 신라대학의 이전과 신흥 주택지로 변모로 모라2동을 모라2,3동으로 분동되었다. 이후 인구의 감소로 모라2,3동이 통합하여 모라3동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소곡마을, 모라리가 있었다.

삼락동

삼락동(三樂洞)이라는 지명은『동래부지(1740)』는 물론 이후 읍지의 어느 곳에서도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낙동강 하구지역은 갈대밭으로 삼락동이 육지로 된 것은 오랜 시간을 통해 삼각주가 형성되어 사주가 굳어져 사람이 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 좁은 사주가 있었는데 이곳을 유두(流頭)라 하였고 이 강을 유두강이라고 했으며, 유두동이 여기에 있었다. 1932년 사상제방의 축조로 이곳은 유사퇴적으로 이루어진 농토는 비옥하여 영농지역으로 발전하였다. 1968년 이 지역을 공업단지 조성과 강변도로의 개통으로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삼락동의 유래는 사락(砂礫)에서 온 것으로 보이며, 낙동강변 서쪽에 형성된 삼각주에 위치한 까닭에 삼락동이란 동명을 가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삼락이란 세가지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으로 군자의 삼락(三樂)과 인생의 삼락의 두 가지가 있다. 군자의 삼락이란 부모가 함께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고 사람을 대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 그리고 천하에 영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을 말하는데 맹자진심상편(孟子盡心上篇)에 있는 말이다. 삼락동은 앞에서 말한 사락(砂礫)의 뜻에서 온 삼락이지만 이 말의 뜻이 공자와 맹자의 글에서 좋게 나와 있어 동명으로는 적정한 것으로 보인다. 삼락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가 되었다가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가포마을, 삼락리, 신초마을이 있었다.

엄궁동

엄궁동(嚴弓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엄광리(嚴光里)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사상면 엄궁동(嚴弓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엄궁동의 유래에 관하여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낙동강에서 바라본 동리의 모양이 활과 같아서 활궁을 붙여서 엄궁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궁(弓)"은 그렇다 치더라도 "엄(嚴)"에 관하여는 설명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일설에는 엄광산은 "엄비치산"으로 해가 먼저 비치는 산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엄궁(嚴弓)은 엄광산의 엄광이 와전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설은 엄광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라 "엄광"일 것인데 이것이 잘못 전하여 "엄궁"이 되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산기슭에 생긴 마을의 이름이 그 산의 이름과 같이 통칭되는 예는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보기 어려우며, 부산의 경우 여러개의 산이 있으나 그 산 이름이 마을이름이 된 예는 없다. "암·엄"의 궁극적 어원이 "곰", 즉 "신"이며 곧 여신임을 알수 있다. 이상과 같이 엄궁이라는 동명의 뜻은 신성한 신의 마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엄궁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 부산진구의 사상출장소,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동네마을, 안동네마을, 엄광리가 있었다.

주례동

주례동(周禮洞)의 "주례(周禮)"라는 말의 어원은 "두리"로 파악되고 있다. "두"와 "주"가 같은 음이며 "리"가 "례"로 적힌 예도 있다. "두리·도리"는 지명이 되어 불리는 경우 대개 "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몇가지 예를 들면 충청도의 주현(周縣)·주성산(周城山), 강원도의 주진(周津), 전라도의 주로치(周路峙), 함경도의 주원(周原) 등이 그것이다. 또한『삼국사기』〈김유신전〉에는 일작 두솔(兜率)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두리·두루‥"에서 온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두레"는 한 마을의 농사를 힘을 합하여 이른바 "품앗이"를 하고 농악을 중심으로 결속하며 농촌사회의 공동체를 이루는 단체였으며 이 "두레"가 한자로 표기된 것이 "주례"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동래부지(1740)』에 보면, 사천면 상단(上端) 주례리(周禮里)라 하여 부의 남쪽 30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례동의 위치가 동평현의 현치(縣治)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나오다 낙동강변으로 도는 곳에 있으므로 해서 이런 마을이름이 붙었다고 하고, 또 낙동강변에 있기 때문에 변(邊) 즉 가(邊)이라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할 수 있다. 1978년 11월 시조례에 의해 주례1,2동으로 분동, 1992년 아파트의 신축 등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주례1동을 주례1,3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냉정마을, 본리, 주례마을이 있었다.

학장동

학장동(鶴章洞)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사천면 상단 장문리(場門里)가 나오는데 "장문리는 부에서 35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광산 기슭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주례동과 학장동을 동서로 이어진 학성(鶴城)이 있었다. 엄궁동쪽에서 주례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 "두레재" "두루재"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두루재"에 마을이 들어서고 그 마을 명칭을 "두루재"를 한자로 "학성(鶴城)"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학성을 "두루잣"이라고 하였는데 "드르잣(野城)과 음이 비슷하나 지리적 사정으로 보아 "드르"가 "두루"일 것이다. 또한 장문리(場門里)에 있었던 장문시장(場門市場)이 유명하였다 한다. 학장동에는 자연마을인 장문리(場門里)·구덕리(九德里)·학성리(鶴城里)가 있었으며, 학성리와 장문리 두 마을 합하여 학장동(鶴場洞)이라 했다가 장(場)을 보다 부르기 좋은 장(章)으로 바꾸어 학장동(鶴章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학장동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7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유적 발굴을 통해 도로변에서 김해문화(金海文化) 토기편을 발견하였고, 또한 학장동 조개무지는 낙동강 하구지역에 취락을 형성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금관가야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보인다. 학장동은 1914년에는 동래군 사상면에 속했다가 1936년 부산부에 편입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소속되었다. 1963년에는 사상출장소에 1975년 북부출장소에 소속되었고, 1978년 2월에는 북구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사상구의 신설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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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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