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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 일신여학교 의거

부산진 일신여학교 의거

부산진 일신여학교(동래여고의 전신)는 1895년 10월 15일 호주 선교단에 의해 좌천동에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로부터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게 되니 우리 민족과 일본제국주의 간에는 대립과 항쟁이 치열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속에서 교육 받고 자란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부산에서 선도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2일, 3일경 서울로부터 부산지역에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학생대표단들에게 전해지면서 일신여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 연락이 닿았고 학교별로 나름대로 의거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때 일신여학교 측에서는 학생 이명시가 연락을 담당하였으며, 평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온 주경애, 박시연 선생은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부산상업학교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는 한편, 일신여학교 동료 교사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졸업시험을 며칠 앞둔 고등과 4학년 학생들에게도 궐기하자고 권유하였고, 3월 10일 기숙사의 고등과 학생들은 밤을 새워 태극기 100개를 만들어 11일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1일 오전 9시경 고등과 학생 김응수, 송명진, 김반수 등 11명과 교사 주경애, 박시연과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문을 뛰쳐 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고, 서울의 3.1 독립운동에 대해 듣고 있었던 민중들은 여기에 크게 호응하여 학생들과 합류하였고, 시위 군중 수백명은 감격에 넘쳐 힘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시위는 밤늦은 11시까지 계속 되었으나, 일본군경이 대거 출동하여 여학생 전원과 여교사 2명을 부산진 주재소로 연행하 면서 일단락되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교사는 옥중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일경들의 한결같은 문초 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과 뺨을 때리고, 구둣발로 차는 등 그 만행의 횡포가 말로 형 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관련자들은 부산감옥에 수감되어 1919년 4월 26일 여 학생들은 징역 6월을 언도 받았고, 여교사 주경애, 박시연은 각각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 았다. 이 의거에서 여학생이 아닌 박연이라는 16세 처녀도 시종일관 여학생들과 행동을 같 이 했기 때문에 징역 6개월의 언도를 받아 여학생들과 같이 옥고를 치렀다. 일신여학교는 20일동안 휴교령이 내려졌고, 4월 1일에야 개학을 하였다.

이후 학생들의 항일 독립의지는 졸업식 거부로 이어졌다. 일신여학교의 여학생들은 모두가 16세 전후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고 또 이들이 일제의 침략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박은 부산에서 용감히 시위항쟁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3.1운동사에 있어 다른 지방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었고 또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여학생 의거는 당시의 경상남도의 3.1운동의 첫 화살을 던지게 되어 그 후 경남 각지에서 만세 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표용수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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