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서브메뉴열기
HOME > 부산소개 > 부산의 인물 >
부산의 학생 항일 운동(소위「노다이」사건)

부산의 학생 항일 운동(소위「노다이」사건)

부산학생 항일운동(소위 노다이 사건)은 1940년대 일제의 태평양전쟁으로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에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과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운동, 동래고보, 부산진 일신여학교, 동래 범어사 학생의거 등의 항일정신을 이어받아 부산에서 소위 『노다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1940년 11월 21일 일본군 노다이(육군대좌)의 총지휘로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이 부산, 경남의 중등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 부산2상 (한국인학교), 부산중(일본인학교), 부산1상(일)으로 구포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서군(동래중학(한), 마산 중학(일), 진주농(한), 진주중(한)으로 진영역에서 김해방면으로 진격하는 모의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민족차별에 한국인 학생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또,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때에도 전년도 우승교인 동래중 보다는 부산중학을 먼저 입장시키는 등 차별은 계속 되었고, 이에 항의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담가(擔架)경기 때도 동래중학이 1위를 하자 재시합을 시켰다. 무장행군시에는 전년도 1등인 부산2상을 가장 불리한 코스에 배치시켰으나, 1위를 달리자 반칙을 선언하여 우승을 놓쳐버렸다.
이와 같은 차별에 대해 동래중과 부산2상 학생들은 폐회식 참가를 거부하였으나 학교의 요청으로 참여하였고, 폐회식이 시작 되자 학생들은 울분이 폭발하여 일장기 하강식때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고, 마침내 울분이 폭발하여 운동장은 아수라장의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이에 놀란 경남지사와 노다이, 일경은 도망을 쳐버렸다. 학생들은 교사들의 만류에도 양교생들은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여, 1,000여명이 시내를 행진하면서 '황성옛터' '아리랑' 등을 부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하고 외치었다. 하오 7시경에는 중앙동 부근에서 4, 5학년은 재집결하여 노다이 관사를 습격하기로 하고, 8시경 항거의 횃불은 영선고개를 거쳐 부산터널 부근 노다이 관사로 향하였다. 그러나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마침내 저녁 10시경에는 부산헌병대에서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시위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200여명을 검거하였다. 이중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의 학생은 송청, 투옥되었다. 부산2상 학생은 홍병희, 이병도 등 6명이었고, 동래중학 학생은 김인규, 김영조 등 8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부산지방법원의 제1심 재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에서 징역 8월 선고를 받은 학생은 모두 12명이었다.
이들 12명은 즉시 대구복심법원에 공소제기, 대구형무소에서 제2심을 유복자인 추유복의 가정형편을 동정한 동지들의 위증으로 무죄를 선고받는 등 우정어린 옥중미담을 낳기도 하였다.

이 사건의 지독한 고문과 옥중생활의 여독으로 출옥한 후 2주일 만에 순국한 김선갑(부산2상)과 김명수(동래중학) 두 사람이 있었다. 양교의 자체적인 학생처벌에서도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와 같이 부산 학생사건은 포악한 일제에 항거하여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발휘한 학생의거이며,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대규모적인 항일투쟁 중에서도 최후의 것에 속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독립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밝힌 것이었다.
당시 일제의 엄중한 보도 관제만 없었더라면 이 사건은 광주학생 사건보다도 더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표용수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6-12-19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