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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범어사의 학생의거

동래 범어사의 학생의거

이담해 등은 곧 범어사와 관련된 김법인, 김영규, 차상명과 지방학림 대표 김상기 그리고 명정학교 대표 김한기 등 7명의 대표자들 을 한 자리에 모여 논의한 결과, 서울의 3.1거사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곧 상경하였다. 한편, 당시 범어사 지방학림을 졸업한 김법인과 같이 서울 불교 중앙학림(현 동국대 전신)에 재학하던 김상헌은 동학교 학생들의 모임인 유심회(惟心會)에 가담하여 불교교리 연구와 민족사상에 대하여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이라는 교내 잡지를 발간하였는데 그는 그 편집실무를 맡고 있었다.
이들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각 학교 학생대표들과 수만명의 민중들을 지도하는데 동참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들의 항거를 위해 각 지역대표에게 지도 연락 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동래 범어사 연락책인 김법린과 김상헌은 한용운의 지시에 따라 3월 1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로 내려왔다.

이때 이미 부산진 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 학생들의 거사가 일어난 후였다. 이들은 범어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3월 18일(음력 2월 17일) 동래읍 장날에 거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오계운의 밀고로 주동자들은 연행되었다. 그러나 18일날 밤 이 근우, 김해관, 김재호, 윤상은 등 40여명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은 동래읍 서문 근방에서부터 의거를 시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외치면서 동래시장을 거쳐 남문에 이르기까지 행진을 하여 해산하였다. 3월 19일 아침, 윤산은, 허영호, 이영우, 황학동 등은 먼저 허영호가 작성한 『일사는 자유를 얻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격문(삐라) 수백매를 동래 시장통에서 군중들에게 미리 배부하고, 5시경, 이근우, 양수근, 김영식, 오시권, 황만우 등을 비롯한 수십명의 양교 학생들은 동래시장 남문 근방에서부터 시위를 시작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잇따라 소리 높이 외치면서 동래경찰서 앞으로 돌진하였다.

한편, 3월 19일 오후 6시경, 김해관, 김재호, 최응권을 비롯한 수십명의 다른 학생들은 별도로 동래시장에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잇따라 소리 높이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계속되는 부산지역민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경은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왔고 주동 인물의 검거가 계속되었다. 범어사 학생의거에 관련하여 차상명, 김한기 , 김상기, 정성언, 김해관 등 34명이 검거되었다. 시위의 주동자들은 6개월 내지 3년의 징역 언도를 받아 부산 감옥 또는 대구감옥에서 치렀다. 3.1운동 후 범어사 명정학교, 지방학림은 해체되어 그 후 중등 3년과정의 불교전문학원이 설치되어 8.15 광복 전까지 존속하였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표용수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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