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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보 학생의거

동래고보 학생의거는 일신여학교의 의거가 있기 전인 1919년 3월 7일부터 본격적으로 논의 되었다. 3월 7일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대표는 동래고보 학생대표 김귀룡, 고영건, 엄진영 등을 찾아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후 졸업반 4학년인 엄진영, 김귀룡, 고영건 등은 서로간에 거사의 모의를 시작하였다. 또한 3월 10일 경에는 경성고등공업전문학교에 다니 던 곽상훈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동래고보 수학교사 이환을 찾아 가서 독립선언서를 보이면서 동래에서의 의거를 상의하였다. 이환선생은 이를 쾌락하여 동래고보 학생 의거의 배후 참모역할을 담당함으로써 학생의거의 계획은 보다 철저하게 진행되어 갔다. 당시 동래고보에서는 교사 김병규가 지리를 담당하면서 몰래 한국사를 학생들에게 강의하여 주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민족의식은 상당히 고취되어 있었다. 주동 학생들은 동래 읍 학소대와 복천동에 있었던 엄진영의 집 등에서 모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제작하기로 하여, 3월 13일(음 2월 12일) 동래읍 장날 오후 2시에 거사를 단행하기로 하였다.

약속된 오후 2시가 되자 엄진영은 군청앞 망미루(옛 날의 군청 정문)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위에 모였던 40여명의 학생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 만세"라고 쓰여진 2개의 기치가 세워지고 독립선언서와 수백매의 전단이 뿌려져 삽시간에 군청앞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 버렸다. 이때 동정을 살피던 수백명의 일경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가운데 한국인 경찰관과 헌병보조원도 모자와 제복을 벗어 버리고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군경의 기마병 20∼30명과 일군 50명이 들이 닥쳐 주동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동자인 엄진영, 고영건, 서진령 등 24명은 검거되어 동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형량이 구형되었다. 징역 2년 6개월 : 엄진영, 김귀룡, 징역 1년 6개월 : 김인호, 고영건, 이상덕, 추규영, 김진형, 서진령, 김기삼, 김성조, 신종은, 김원용, 박덕용, 정호종, 징역 6개월 : 윤삼동외 7명 이었다. 이들이 실형을 언도 받은 때는 각각 미결구검 1년 6월에서 4월이 지난때였었다.

한편, 동래고보 학생의거의 배후 참모역을 한 곽상훈은 서울에서 검거되었다. 재판받아 징역 4월을 복역했던 윤삼동 등 9명은 1919년 8월 14일 가석방되었다. 부산, 동래에서 이 같은 학생들의 의거는 이 고장의 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들로 하여금 독립투쟁의 대열에 앞장서게 되었다. 한편, 동래고등보통학생 의거의 주동 인물들은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 『붉은 저고리 친목회』를 조직하여 세 번 이나 회합을 가졌고, 네번째 회합에서 일경에 발각되어 강제 해산을 당하였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표용수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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