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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김법린

부산 동래에서 1899년에 태어났다. 범어사 명정학교 보습과를 졸업 후,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불교 승려로서 3·1운동 때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다. 그리하여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만세운동 후 일경의 경계망을 피하여 1919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 때 그는 불교학교인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설치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대표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다. 한국민단본부는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중앙학림 출신 승려 수십 명이 결성한 항일비밀결사로서 기관지「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단본부에서는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등지에 부원(部員)을 파견하여 국외독립운동과의 연결을 꾀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상해에 파견되었던 그는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내 파견원의 자격으로 1919년 5월경 다시 국내에 들어 왔다. 국내에서 그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기 위하여 「화신공보(華新公報)」를 발간하여 지방까지 배포하면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로 넘어가 안동현(安東縣) 육도구(六道溝)에 동광상점(東光商店)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상해의 신상완(申尙琓)과 백성욱(白性郁), 국내의 김상헌(金尙憲)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승려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을 계획하고 국내에 들어왔으나 사전에 동지가 피체됨으로써 다시금 상해로 망명하였다. 의용승군 계획은 사전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전국의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뜻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의용승군 계획이 좌절된 직후 그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승려로서 외국 유학을 떠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폭넓은 세계를 접하고 그 속에서 조국 독립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유학에 나선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文學部)에 재학하면서 한편으로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그는 1928년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렇듯 표면활동과 함께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것이 만당(卍黨)의 결사운동이다.

만당은 불교계 민족운동의 지도자인 한용운의 지도 아래 김법린과 조은택·박창두 등 승려들이 1930년 5월에 조직한 항일비밀결사였다. 이러한 만당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당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 동경(東京)에 까지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김법린은 동경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피체되었다.

이 때 일제에 피체된 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불로 지지기', '공중에 달고 치기', '비행기 태우기' 등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악형의 고문을 2년 넘게 당하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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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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