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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

초량동은 조선시대 동래부 사천면 구초량리였는데, 1910년 이후의 일제시대에는 부산부 사중면 초량동으로 바뀌었으며, 해방 후에는 초량출장소 관내로 있으면서 1982년 무렵에는 법정동인 대창동3가를 흡수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지의 기록에 초량항은 절영도 안쪽에 있다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영도안의 부산항 해변은 모두 초량항이었다. 초량은 우리말로 샛뛰라 불렀는데, 샛뛰는 억세 갈대라는 뜻의 초(草)자와 뛰 량(梁)자 음을 따서 지은 것이다.

개항전의 대마도 문서인 <다구찌집서(田口集書)>에도 초량의 원명은 사수도라 기록하여 샛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의 구관과 영주동 사이의 초량은, 그 일부가 속칭 초량 반상촌이라고 불리긴 하였지만, 그 대부분은 해정리라 하였다. 영주동 일대는 왜관시대 끝까지 초량 반상촌이라 불렀다. 신초량, 구초량이라는 이름은 개항 전후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06년 시구개정에 의해 구초량의 명칭이 부평동, 부민동등으로 바뀌고, 신초량은 초량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풍수상으로 부산의 지형을 엎드려 있는 소의 모습인 여와우형(如臥牛形)이라하여 풀밭이 있어야 하기에 초량(草梁)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한편 초량동은 조선후기 해정리하고 하였으며, 이 지대에는 고분(古墳)이 있었고 해정리 해변은 노송이 울창하여 이곳을 일인들이 기석빈(棋石濱)이라 불렀다 한다. 이는 바로 물로 씻은 깨끗한 돌들이 널려 있어 흡사 바둑돌과 같았다는 데서 불리어진 이름이다. 고종 2년(1885년)청관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의 고분은 철거되었다고 전한다.

초량은 현재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9년 동제 개편에 의해 초량 1,2,3,4,5동으로 나누어졌다가 1970년에 초량4동이 초량 4,6동으로 분동되었고, 초량 5동은 부산역 주변으로서 실거주 인구가 매우 적었던 까닭에 1985년 10월 17일 초량3동에 흡수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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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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