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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선산착평공사

영선산 착평공사

영선산착평공사(營繕山鑿平工事) 이전 부산항은 동·북·서가 산으로 둘러싸여 남으로 절영도가 가로막아 천연의 양항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를 형성한 주위 산지(山地)로 말미암아 시가지를 형성하는 데는 좋은 편이 못되었다. 부산 매축회사의 공사로 얻어진 땅으로 넓은 지역을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항만을 가진 서쪽 지역이 좁아 경부선 철도와의 연계가 불편했다. 따라서 항구의 선박과 철도의 열차 사이를 연결시키면서 육로교통의 원활을 위해 시가지 확장과 그 연결이 필요했다.

그 확장 연결로 가장 요긴한 일은 부두는 오늘의 중앙동에 있는데 경부선 종점은 초량에 있어 바다와 육지의 물량 양하역(揚下役)이 원활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전관거류지 지역인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인 초량을 연결하여 일본인 거류지에서 부산진으로 북상(北上)하는 일이 일본인들로 보아서는 요긴했다. 그렇게 북상과 해륙연계를 하려니 현재의 중구지역과 동구지역 사이 영선산(營繕山)과 영국 영사관산(영국이 조차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해발 130척(尺)으로 큰 장애물이 되어 부산항은 두 지역으로 나누어진 꼴이었다. 그래서 이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을 1909년 5월 착공하여 산을 깎아 내려[鑿平] 평지를 만들면서 그 산의 흙과 돌로 바다를 메워 1912년 8월 공사를 완료하여 136,537.5㎡을 얻었다. 공사에 소요된 총 공사비는 예산을 훨씬 초과하여 105만1천5백원이었다.

이 공사로 영선산과 영국 영사관산이 없어지고 초량 앞바다와 제1부두 사이 매축지에 호안(護岸)의 돌벽[石垣]과 바다에서 짐을 부리는 물양장이 축조되었다. 이 호안과 물양장 매립에는 영선산과 영사관산에서 나온 바윗돌을 이용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었을 그때는 초량이 종점이 되어 있었다. 영선산과 영사관산이 가로막아 더 이상 남쪽으로 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두 산이 없어지자 초량 종점의 경부선 부산 본역이 중앙동의 세관이 있는 제1부두 쪽까지 뻗어나와 부산항의 선박의 물자와 인력이 육지의 경부선 철도에 바로 연계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륙침략의 길은 더욱 확고한 터전을 잡은 셈이었다.

이 부산항과 경부선 철도의 연계는 일제로 보아서는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부산에 형성하는 요긴한 일이었다. 그것은 대륙침략의 또 하나의 관문인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鴨綠江架橋工事)와 부산의 경부선 종점의 연장을 같은 시기에 획책한 일로서도 알 수 있다. 부산의 경부선 종점을 제1부두까지 연장하는 영선산 착평공사는 1909년 5월에 기공되어 1912년 8월에 준공된 데 대해 신의주의 압록강 가교공사 또한 같은 시기인 1909년 8월에 기공되어 1911년 10월에 준공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일본에서 오는 물자와 인력은 바로 중국대륙까지 나아가고 중국대륙의 물자와 인력은 바로 일본으로 수송하게 되었다. 오늘의 경부선 종점인 부산본역은 1969년 중앙동에서 초량으로 되돌아갔지만 옛 부산 본역이 중앙동에 있을 옛부산역 광장을 새마당이라 한 것은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워 새로운 마당이 되었다고 해서 새마당이라고 했다.

영선산 착평공사는 부산 일본거류민단 사업으로 시행되었지만 형성된 토지 소유권은 구한국정부에 귀속되게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공사비는 일본 거류민단이 일본 제일은행에서 대부하되 원리금 상환은 토지소유자인 구한국정부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본 거류민단의 필요에 의한 이 사업이 한국정부가 관장하는 형식이 되었던 것은 토지의 소유문제와 일본정부의 힘이 작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의 시작은 구한말이었지만 완공은 일제강점기 때로 공사대금의 원리금 상환도 일제강점 이후의 조선총독부가 정리하고 형성된 지역의 시설도 조선총독부 의도대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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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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