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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거제리포로수용소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

부산 거제리포로수용소(釜山 巨堤里捕虜收容所)는 지금의 연제구 중앙대로12001(연산동 1000번지) 부산광역시청과 부산지방경찰청(옛 53사단 사령부), 연제구청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가장 먼저 만들어진 포로수용소는 7월 7일 대전형무소 내에 설치된 "대전포로수용소"로, 7월 8일 최초로 북한군 포로 5명을 수용하였다. 한국군은 육군 헌병사령부에서 포로를 수용 및 관리하였으며, 그 후 전세가 불리해지고 전선이 밀리게 되자 대전포로수용소는 7월 14일 대구로 이동하여 효성초등학교(당시 효성국민학교)에 "제100포로수용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포로수용소는 전쟁기간 중에 획득되는 포로를 모아서 관리하는 곳으로 포로수집소와 포로수용소가 있다.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전선에서는 포로수집소, 후방에서는 임시 포로수용소 또는 영구 포로수용소를 설치·관리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설치·관리한 최초의 포로수용소는 1950년 7월 대전에 설치된 미군 제24사단의 임시 포로수용소였다. 이후 7월 16일 영천에 미군 제25사단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7월 19일에는 영동에 미군 제24사단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이곳의 포로들은 대구에 있는 미군 제8군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부산지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50년 7월 24일에 지금의 부산광역시청과 부산지방경찰청, 연제구청이 자리 잡고 있는 일대에 부산 거제리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이 시설은 유엔군사령부 관할 아래 미 제8군사령부가 관리하였으며, 다른 포로수용소와는 달리 전쟁 중에 붙잡히는 포로 전부를 장기적으로 수용 및 관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수용소이다. 이 시설은 7월 26일부로 "주한 미8군사령부 제1포로수용소(Camp EUSAK No1)"라 명명 되었으며, 통상 "제1포로수용소(POW Enclosure)"라고 불리어졌다. 당시에는 여름철로 우선 24인용 천막을 치고 포로를 수용하는 실정이었고, 기존의 시설을 포함하여 수용소의 초기 수용능력은 고작 250명이었으나, 이후 천막 막사를 추가 설치하여 500명까지 수용인원이 증가하였고, 그 후 시설과 설비를 급속히 확장하여 10,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군 지휘부에서 운용한 포로수용소는 전세의 변동에 따라 계속해서 포로수용소를 이동시키는 일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8월 1일에는 부산 영도에 있는 해동중학교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여 "포로수용소 본소"로 하였고, 대구에 있던 수용소는 포로집결소로 운영하였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되자 국군과 미군이 별개의 수용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8월 12일에는 한국군이 관리하던 부산 영도수용소를 폐쇄하고, 거제리에 있는 미군 제8군사령부가 관리하는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통합되었다. 포로수용소가 단일화되면서 수용규모 50,000명을 목표로 시설확장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후 다른 포로수집소 및 임시 포로수용소에서 수집 분류된 모든 포로들이 여러 경로를 거쳐 부산으로 후송 집결되면서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명실상부한 국군과 유엔군이 획득한 포로를 수용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미간의 포로관리에 대한 업무 논의를 통해 한국군은 포로의 급양 및 경비를 담당하고, 미군은 시설, 보급 및 포로관리를 담당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 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고 아군의 반격으로 붙잡히는 포로의 엄청난 증가로 8월의 2,000명에서, 9월에는 11,000명에 육박하였다. 계속 증가하는 포로의 관리를 위해 9월에 "인천 임시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0월 2일 서울 마포형무소에도 포로수집소가 설치되었으나, 이들 임시 포로수용소, 포로수집소를 거친 포로들은 전부 부산 포로수용소로 집결되었다. 9월 하순부터는 포로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자 기존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로는 늘어나는 포로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포로수용소의 확장을 위하여 주변지역으로 철조망이 더 많이 설치되면서 "제2, 제3, 제4, 제5, 제6포로수용소"까지 증설되어 그 규모는 자꾸만 늘어나게 되었다.

1950년 10월말까지 한국군과 유엔군에 의해 붙잡힌 포로의 계속적인 증가로 그 숫자가 117,000여명에 육박하였다. 이러한 포로의 증가는 수용 및 관리 능력을 초과하게 되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미군 제8군사령부에서는 제2군수사령부(2nd Logistical Command)를 창설하여 포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보충하고 병참문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한국군은 1950년 10월 25일 이를 지원할 제31, 32, 33 포로 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계속되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해 포로들의 지속적인 증가와 10월 25일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으로 중공군 포로까지 늘어나자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0월 28일에는 평양에 2개의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향후 안정적인 포로들의 수용과 관리를 위해 11월 27일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가 확정되었고, 12월 4일 5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인천 포로수용소를 확장하였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가 제6포로수용소까지 확장하였으나 계속 늘어나는 포로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2월 중순경에는 "수영 대밭 제1, 제2, 제3포로수용소(수영구 광안4동 옛 인쇄창부지 추정)"와 "가야 제1, 제2, 제3포로수용소"를 증설하게 되었다. 이들 포로수용소는 포로들의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의 지소인 셈이다. 포로의 수는 계속 늘어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를 비롯한 부산지역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수는 140,000여명에 달하였다.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하여, 경상남도 거제시 신현읍·연초면·남부면 일대 1200만㎡ 부지에 포로수용소 설치키로 결정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설치공사를 시작하여 2월말 경에는 거의 마무리와 함께,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들을 이송하기 시작하여 50,000여명이 옮겨졌다. 3월 1일에는 주요 본부 및 경비대대 등 관련부대가 거제도로 이동되었으며, 나머지 포로의 이동이 계속되어 3월말까지 이송된 포로는 숫자는 약 100,000명에 이르렀다. 6월말 경에는 육지 포로들의 이송이 거의 마무리되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수용 인원이 140,000명이 넘어서게 되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있던 포로의 대부분이 거제도로 옮겨지게 되자, 부산의 "제1포로수용소"라는 명칭도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보조적인 위치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전방지역에서 붙잡힌 포로는 일단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로 이송하여 기초조사 등 절차를 거친 후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포로송환 개시(9월 6일 송환업무 완료)되면서 폐쇄되었으며, 이후 포로수용소 자리였던 연제구 연산동 1000번지 일대에는 한국군 군부대인 53사단(육군 7376부대) 사령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군부대는 1980년대 말 이전과 함께 1990년 11월 부지를 매수하여 1994년 1월 18일 착공하여 1998년 1월 10일 준공하였고, 1998년 1월 20일 개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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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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