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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여객부두(부관연락선)

국제 여객부두(부관연락선)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은 1905년 1월 1일부터 부산(초량)과 서울(영등포)간 경부선 철도 개통에 이어 부관연락선(취항 당시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공식명칭은 관부연락선이었음) 이 운항되면서 일본 본주(本九)의 동해도철도선(東海道鐵道線)과 산양철도(山陽鐵道)가 이 부관연락선과 연계가 되었다. 이 부관연락선으로 맨 처음 취항한 것은 1905년 9월 11일 산양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 소속의 일기환(壹岐丸, 1,680톤)이었다. 부관연락선은 일본의 산양철도를 거쳐 한국침략의 거점지인 대판(大阪)과 신호(神戶)를 연결하게 되어 있었다.

이어 11월에는 대마환(對馬丸, 1,602톤)의 취항으로 부산과 시모노세끼에서 매일 출항하게 되었다. 이들 연락선은 일본 동경에서 기차표 한 장으로 조선의 서울까지 올 수 있었다. 이를 여객선이라 하지 않고 연락선이라 한 것은 일본의 산양선 철도와 조선의 경부선철도 사이를 연락하는 배라 해서 연락선이라 했다. 당시에는 산양철도, 부관연락선, 경부·경의선 철도는 일본 국유의 철도원 소관아래 있었다.

부관연락선이란 말 자체에도 이미 일본의 조선과 대륙으로 침략을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상의 우월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여순(旅順)·대련(大連)부근 조차는 물론 장춘~여순간의 철도를 러시아에서 양도받으면서 대륙침략의 발판을 굳혔다.

일본은 1905년 조선의 정치·외교를 보호한다는 이른바『을사조약』 체결로 대륙침략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부관연락선 운항이 다시 가속화되었다. 1908년에는 1천 9백톤급의 살마환(薩摩丸)을 취항시켰고, 1911년에는 1천 9백톤급 매향환(梅香丸)과 앵환(櫻丸)을 취항시켜 부산과 하관에서 아침과 저녁 두 번씩 출항하는 선편이 늘어났다. 1912년에는 매향환이 일본 문사항(門司港)에서 침몰되자 홍제환(弘濟丸)을 취항케 했을 뿐 아니라, 1913년 1월 3천톤급 고려환(高麗丸)과 4월 신라환(新羅丸)의 취항으로 크게 증강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승객은 일본인으로 1908년 약 12만명(1,226회 취항)이었던 것이 1912년 약 20만명(1,416회 취항)으로 급증하게 된 것은 본격적인 대륙침략이 시작되었다. 1912년 이전까지는 연락선이 닿는 자리는 지금의 연안여객부두 안쪽 자리쯤이었다가 1912년 제1부두가 개장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가속화 되면서 1922년 5월 11일에는 3천6백톤급의 경복환(景福丸)과 11월 22일 덕수환(德壽丸)과, 1923년 3월 12일 창경환(昌慶丸)을 취항하자 종전의 여객선인 고려환(高麗丸)과 신라환(新羅丸) 두 척을 화물선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선박 증가는 중일전쟁(1937년)이 일어나면서 병력 및 군사물자의 수송과 함께 일본인을 이주시켜 식민정책을 강화하자는 데 있었다. 태평양전쟁을 앞둔 1936년 11월 16일에는 7천5백톤급의 금강환(金剛丸)과 1937년 1월 31일 흥안환(興安丸)을 취항시켜 시속 16노트로 종전의 11시간의 운항시간을 7시간 30분으로 단축시켰고, 1942년 9월 27일에는 7천 5백톤짜리 천산환(天山丸)과 1943년 4월 12일 곤륜환(崑崙丸)을 추가 취항시켰다.

이러한 연락선의 증강은 대륙의 침략 과정과 병행되어 갔지만, 부산항을 찾는 일본인은 조선 또는 대륙침략의 책략을 수행하기 위해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었다. 그 반면 부산항에서 떠나는 사람으로는 일본 유학을 떠나는 우리나라 유학생(일본유학생수는 1926년 3,945명, 1930년 약 4,000명, 1935년 4,944명, 1938년 12,356명, 1942년 29,427명)도 있었지만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농토를 잃고 탄광의 광부로, 부두의 노무자로 가족을 두고 삶의 길을 찾아 단신으로 떠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제의 강점이후 10여년간 부산에서 일본으로 노동자가 되어 이 연락선을 타고 간 사람은 70만명이나 되었다. 이들 가운데 약 40%는 경상남도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 일본으로 도항하는 사람이 매년 증가하면서 1927년에는 14만 8천여 명이나 되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전환될 무렵에는 징용·보국대·징병·학병·여자정신대로 본의 아닌 타의로 끌려가는 우리나라 사람의 수가 날로 많아져 갔다. 강제징용의 예만 해도 1940년에는 1,892명이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1년 뒤인 1941년에는 6,898명으로 4배 가까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10월 15일 밤에는 下關을 출항한 7천5백톤급 곤륜환(崑崙丸)이 미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고 544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이 사건 후에는 전쟁 수행상 다급한 수송이 요구되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야간운항을 줄이고 낮에만 수상기의 엄호를 받고 운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6월 30일부터 태평양전쟁으로 전세악화로 관부연락선 항로가 폐지되었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연락선의 구실은 사라지고 한동안 미군의 통제아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본인 귀환민과 일본에서 부산으로 오는 우리나라 귀환동포 수송을 부정기적으로 담당하다가 이후 운항이 중단되었다. 1960년대 한일간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1964년 부산과 오사카 사이에 '아리랑호'가 취항하여 운항되었다. 1969년 8월 3일 부관페리주식회사가 설립되고, 부관연락선이 끊어진지 25년이 지난 1970년 6월 17일 부관페리호(3,875톤)가 부산과 시모노세키간을 운항하게 되었다. 이후 1983년 4월 27일 국적선 훼리부관호(5,631톤)가 부산~시모노세키간을 취항하였다. 1986년 3월 31일 부산~오사카간 정기여객선인 올림피아 88호가 첫 출항을 하였고, 1989년 12월 13일 부산~하카다간 훼리 카멜리아호 취항하였다.

부산국제여객부두의 대지면적은 86,833㎡이며, 건물 연면적은 12,053㎡이다. 터미널 건물은 4층으로 출입국 대합실과 통관장 그리고 귀빈실을 갖추고 있고, 부대시설로는 문화재감정관실, 세관사무실, 여행사, 선박회사 등이 상주하고 있다. 여객부두는 4개선석 652㎡로서 연간 소형컨테이너 약 6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2000년 이후 한·일간의 국제여객 노선에 초고속 쾌속선인 카훼리선 취항으로 운행 시간이 2시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으면서 많은 일본관광객들이 부산을 찾고 있다. 또한 2008년부터는 2만톤급의 초대형 크루즈여객선인 '펜스타'를 투입하여 패키지 일본여행 상품권을 판매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과의 정기여객선의 운항으로 앞으로 중국관광객도 부산을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부두의 총면적은 4만㎡이며, 여기에 마련되어 있는 건물면적은 1만1천7백81㎡이다. 여기에는 컨테이너 야드 1만3천2백㎡와 차량 통관장 3천1백19㎡가 마련되어 있다. 둘째, 터미널 건물(3층)은 출입국 대합실과 통관장 그리고 귀빈실을 갖추고 있고 아울러 선박회사의 사무실로도 이용되고 있다. 셋째, 안벽은 320㎡로서 연간 소형컨테이너 약 6만개를 처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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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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