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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일학생의거터

부산항일학생의거 터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은 1920년 6월 조그마한 동물원을 곁에 둔 넓은 빈터에 지나지 않았다. 1928년 9월 舊 경상남도청 앞~부용동~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까지 전차선로가 연장·운행되었다. 이곳 공설운동장은 1940년 11월 23일 부산항일 학생의거의 시발점이 되었던 곳이다. 일제는 중일전쟁(1937.7) 이후 국민총동원령(1938), 국민징용령(1939), 학도지원병제(1941)에 이어 1944년부터는 강제징병제 실시로 한국에 대한 군사적 억압과 대륙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1940년 11월 21~22일 일제는 전력증강의 일환으로 경남학도연합 군사대연습 모의 전투훈련을 노다이(乃台兼治, 육군대좌 ; 부산병참기지사령관)의 총지휘 아래 실시하였다. 경남의 중등학교 학생들을 경기관총과 38식 소총으로 무장시켜 동군과 서군으로 나누었다.

동군(東軍)은 2상(二商, 한국인학교, 현 부산상고)·부중(釜中, 일본인중학교)·일상(一商, 일본인학교)·진중(晉中, 한국인학교), 서군(西軍)은 동래중(東萊中, 한국인학교, 현 동래고)·마산중(馬山中, 일본인학교)·진농(晉農, 한국인학교)·진중(晉中, 한국인학교) 등으로 편성하여 진영역에서 하차하여 김해방면으로 진격케 하여 김해평야 특히 한림정(翰林亭)에 조우전(遭遇戰)을 벌이는 모의 전투훈련을 하였다.

11월 23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가 개최되었다. 입장식은 전년도 우승교(동래중학 : 현 동래고등학교)가 먼저 입장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일본인 학교를 먼저 입장시켰다. 종목별 경기에서도 한국인 학교에 불리한 코스를 배정하거나 차별적 편파 판정이 계속되었다. 동래중학과 부산 2상(현 부산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 항의하였으나 번번이 묵살당하여 대회장에는 일제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하오 5시경, 폐회식이 노다이 심판장의 강평에 이어 일본인 학교가 우승교로 발표되자, 판정의 부당함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항일의거 시발의 신호탄이 되었다. 6시경, 양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 1,000여 명이 시가행진과 노다이 관사 습격을 결의하였다. 학생들은 공설운동장을 출발하여 금지곡이던 우리 민요를 부르면서 보수동 네거리에 이르자 대열을 나누어 대청동과 광복동을 거쳐 중앙동으로 시가행진은 계속되었다.

7시경, 4, 5학년생 400여 명이 재집결하여 영주동 노다이 관사에 도착하니, 노다이는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울분을 참지 못한 학생들은 투석으로 외등과 관사의 유리창을 모두 깨어버렸다. 밤 10경, 부산헌병대는 각 경찰서에 긴급지령을 내려 학생들을 현장에서 검거하였다.

11월 24일, 양교는 일본 경찰의 취조장이 되었고, 매일 수십 명의 학생이 연행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때 일경과 헌병들에 의해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고, 주모자 15명의 투옥과 징계(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가 있었다. 특히, 김선갑·김명수 두 분은 출옥 2주일 만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공설운동장에서 촉발된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말기 국내에서 전개된 최대규모의 항일학생운동으로, 당시 일제의 삼엄한 통제가 극에 달했던 시대적 상황을 볼 때 광주항일학생운동 보다도 적극적인 학생운동의 의미를 갖는다.

부산시에서는 역사적 현장에 비석을 세워 그 뜻을 되새기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역사교육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2003년 12월 구덕운동장앞 광장 입구에 표석을 세워 항일독립 정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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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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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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