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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

부산근대역사관(釜山近代歷史館)은 중구 대청동 2가 24-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라 함) 부산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동척은 1910년(명치 43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20년(대정 9)에 마산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대정 10) 부산부 영정(榮町, 현 영주2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29년(소화 4) 지금의 대청동으로 옮겨왔다. 건축은 철근콘크리트 3층으로 외벽 기초에는 대리석을 벽면에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아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양을 넣고, 실내는 전형적인 은행 건물형태로 대형 기둥을 세워 문양을 새겨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창문은 아치 형태로 되어있고, 옥상을 철근콘크리트로 마무리하였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토지와 금융수탈의 선봉 역할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착취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동척 부산지점 건물은 미군이 진주하여 주둔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간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50~53년까지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1982년 3월 반미학생운동으로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84년 1월 부산미문화원 2층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산, 대구, 경남·북, 제주도 지역의 영사업무를 담당하여 오다가 1996년 미대사관으로 통합 운영하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미문화원으로 50년 3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4월 30일 우리정부에 반환하였다. 6월 10일 재정경제부와 협의를 통하여 시유지와 교환으로 부산시에 이관되었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건물의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고려하여 부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현장학습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부산근대역사관'으로 조성하여 2002년 7월 3일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9호(2001. 5. 16 지정)로 보존·관리되고 있다.

동척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일본제국주의가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일본정부의 직접적 지배하에서 그들의 특권에 기초한 독점적 특수회사이다. 일제는 1908년 의회에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이를 한국정부에 강요하여 1000만 원 자금으로 한국에서 척식사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하고, 일제는 이에 일정기간 상당액의 보급을 시행하고 한국정부는 사업용지의 일부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유지를 출자함으로써 한국이 자원개발 식산진흥을 담당하게 하며, 일본으로부터 선량 근면하고 경험이 풍부한 농민을 이식하고 진보된 농법을 시범함과 동시에 기업가에 대해서도 이자가 싼 자금을 공급하여 식산사업에 이바지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을 식민지화할 목적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일제는 동척회사가 설립되자 한국정부로부터 토지 17,536,860㎡를 출자 받았고, 1913년까지 토지 46,676,520㎡를 헐값으로 매입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후인 1920년 말에 회사 소유지는 경작지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6,030,000㎡에 달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제는 국유지를 강제로 불하하여 막대한 면적의 산림지를 가로채어, 1942년 말 158,400,00㎡의 임야를 소유하였다.

이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50%가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고, 영세 소작농에게 빌려준 곡물에 대해서는 20% 이상의 고리를 추수 때 현물로 거둬들였다. 또한 그 소유지는 일본인 이주자에게 싼값으로 양도되어 동척의 직영지 면적은 점차 감소되었으나, 1937년 동척이 직접 경영한 경작지 면적은 59,400,000㎡에 달하였다. 동척의 농업이민정책은 경제적인 목적보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은 각종 특혜를 주고 1910~1926년에 17회에 걸쳐 일본인 이민 희망자 약 1만 명을 엄선하여 조선침략의 담당자로 활용했다. 이들 이주민은 경기·경상·전라·황해·충청도에 가장 많았는데, 그들은 조선민중을 착취 압박한 일제의 대변자이며 앞잡이가 되었다. 이에 따라 1926년까지 조선인 빈농 약 29만 9천 여명이 토지를 상실하고 북간도로 이주하였다.

한편, 동척은 조선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로 세력이 확대되자, 1917년 회사법을 개정하여 본점을 도쿄[東京]로 이전하고 조선에만 국한하던 침략 및 착취의 대상과 범위를 몽골·러시아령 아시아·중국·필리핀 및 말레이반도까지 확장시켜 대륙에 대한 침략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을 경영하였다.

동척의 사업지역이 중국의 동북(東北)·내몽고(內蒙古)로 확대되었으나, 조선에서의 동척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야기한 이후 일제가 한반도를 그들의 병참기지화하기 위해 중공업에 집중 투자하자, 동척도 광공업 부분에 관심을 기울여 전기·탄광·제철 등 각 분야에 투자하였으나, 여전히 동척의 사업 중심은 조선의 농업에 대한 수탈이었다. 1920~30년대 농민의 격렬한 소작쟁의는 동척의 조선민중에 대한 수탈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또한 1927년 1월 의열단원 나석주 열사가 동척을 기습하여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 증오의 한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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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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