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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대화재

부산의 대화재

광복 이후 부산의 도시변모는 화마(火魔)의 도시라 불릴 만큼 대형 화재가 많았다. 1945년 광복 당시 부산의 인구는 30만명으로 이중 일본인이 6만 명이었다. 일본인들은 철수한 대신「우환동포」라고도 불리던 귀환동포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혼란을 이루었다.

여기에다 한국전쟁으로 피난민이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공지·도로변 산중턱까지 할 것 없이 시가지는 온통 판자집으로 메워졌다. 판자집은 용두산일대를 비롯하여 중구·서구·영도구·부산진구 등을 중심으로 부산전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당시의 산중턱까지 지어졌던 판자집으로 인해 이후 꾸준한 주거정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산중턱까지 주택지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판자집의 난립으로 화재에 대한 무방비 상태였다.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1월 27일 저녁 8시 30분경 영주동 서쪽 산비탈에 있는 피난민 판자촌에서 불이 일어나 때마침 거세게 불어 닥치는 하늬바람을 타고 영주동·동광동·중앙동·대청동 입구 일대까지 불길이 번져 그 이튿날인 11월 28일 새벽 6시 30분이 돼서야 겨우 불길이 잡혔다. 역전 대화재로 인한 피해를 살펴보면, 피해 총액은 1백 77억환으로 집계되었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주택이 3,132채, 29명의 인명 사상자가 발생했는가 하면 6,000여 세대 30,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당시 피해액은 국제시장 대화재 때의 12.6배에 이르렀다 한다.
부산역전 대화재는 지금의 중구지역의 절반에 가까운 지역을 초토화시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국제시장 대화재가 발생한지 10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시기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 화재로 르네상스 양식의 부산역사(釜山驛舍, 1910. 10 준공)과 부산우편국(釜山郵便局, 1910. 5 준공), 부산일보사 사옥, 부산방송국이 불타 버림으로서 교통과 우편통신 그리고 방송시설과 같은 도시의 중추 기능을 잿더미로 만들고 말았다. 따라서 이 화재는 부산에만 충격을 주었던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이 전국에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었다.
국제시장 대화재
1953년 1월 30일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경제적 심장부였던 국제시장을 휩쓴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불은 널빤지 가게들이 빼곡빼곡 들어서 있던 국제시장의 어느 목로술집에서 일어나, 세차게 불어 닥친 하늬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나아갔다. 이 불은 이날 저녁 7시 40분 춘향원(春香園)이라는 판자집 술집에서 실수로 일어난 불로 7시간만인 1월 31일 새벽 2시에야 경우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화재가 일어났던 곳이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데다가 한겨울로 난로를 피우고 있어 겨울바람에 의해 삽시간에 불길이 번졌던 것이다. 당시 한·미 합동소방대까지 출동하였으나, 크게 불길이 번졌던 것은 수도가 고장나 초기 진화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피해규모로는 총액이 1,400여억원 이었고, 4,260채의 가게가 전소되었고 6,800세대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1953년 대화재 이후 부산시에서는 590여원을 투입하여 국제시장을 재건시켰으나 1956년 8월 2일 밤에 또 다시 큰 불이 일어나 136개의 점포가 불타는 대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전소되는 등 많은 재산상의 피해를 내기도 했다. 이후 국제시장 상인들은 화재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고, 불조심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부산시의 소방당국에서는 국제시장 일대 상가에 소방설비를 강화시켜 화재예방을 해나갔다.
용두산 대화재
1953년 11월 발생했던 부산역전 대화재 때의 엄청난 불길이 할퀴고 간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1954년 12월 10일 새벽 4시 용두산에 자리 잡은 피난민 판자촌에 불이 나서 용두산 동쪽 언덕 그 기슭일대와 광복동·창선동 일대의 판자집 1,093채가 전소되고, 8,0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용두산은 조선시대부터 해송이 울창하게 이루고 있다고 하여 송현산(松峴山)이라 불렀다. 용두산은 화재가 발생하여 피난민 판자집이 거의 전부 불타 버렸고, 또한 아름드리 소나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화재 이후 용두산은 다시 정비하여 나무를 심어 산림지대로 가꾸면서 지금의 용두산으로 가꾸어지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대화재 이외에도 1957년 2월 27일 당감동 큰불(220세대 전소)이 발생하였고, 1959년 10월 23일 양정동 피난민수용소에 큰불(320세대 전소), 1960년 3월 2일 범일동 국제고무공장 큰불(63명 사망, 30명 부상), 1960년 10월 21일 충무로 5가 일대에 큰불(판자집 800여채 전소), 1960년 12월 25일 국제시장 큰불이 있었다. 환도 이후 7년간 큰불이 자주 나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부산을 불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후 부산시에서는 화재로 타고남은 판자집들은 도시미관을 위해 강제 철거되고 구획정리 사업의 시발이 되었으며, 이주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도시정비가 착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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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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