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조선방직주식회사

조선방직주식회사

조선방직주식회사(朝鮮紡織株式會社)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나라 목화의 재배와 매매 및 면사방직과 판매에 대한 영리를 목적으로 1917년 11월 범일동(지금의 자유시장에서 시민회관까지 일대 전부) 일대에 세운 회사이다. 대지 8만평 위에 세워진 조선방직공장은 일제가 부산에 세운 가장 큰 공장으로 식민지 노동약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면화를 싼값에 사다가 거대한 방직공장을 세워 면사로 가공하여 다시 우리나라 공장에 비싼 값으로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기는 등 2중의 착취를 자행하였다.

조선방직(주) 공장은 부산최대의 공장답게 직공수가 많았고 따라서 열악한 노동환경 때문에 노동쟁의도 자주 발생하였다. 1930년 1월 9일 불경기에 생활이 어려워진 직공들이 ① 임금 30錢을 80錢으로 인상할 것, ② 하루 8시간 노동제 실시, ③ 작업중 부상자 치료비 부담할 것 등을 요구조건으로 제시하면서 3천여명이 벌인 파업은 일제의 노동수탈에 항거한 한국인들의 노동쟁의로 유명하였다.

당시의 노동쟁의는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반제운동으로 발전시키기도 하여, 다른 공장에도 영향을 주어 영도의 조선노조를 비롯하여 각 정미공장, 범일동의 태화고무공장을 비롯하여 삼화고무공장 등 각 고무공장에도 파급되었다. 또한 1933년, 1936년에도 한국인 노동자들의 노동쟁의가 잇따라 일어나 일제의 노동수탈 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이후 일본이 물러가고, 미군정은 대규모 귀속업체가 많던 면방직 공업에 대해 군정 상무부 산하에 방직공장 운영부를 설치하고 귀속방직 공장을 직접관리 하였다. 조선방직은 부산 최대의 적산으로 광복 후 정방기 40,720추(錘), 연산기 6,760추, 면직기 1,232대, 인견직기 319대, 모포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모면공장, 2차 가공공장으로 대구의 메리야스 공장을 보유한 국내 최대의 면방직회사로 남아 있었다.

조방의 경영권이 미군정의 직접 통제하에 있었지만 조방은 활발한 가동과 생산증대를 보였다. 한국전쟁기에는 전시체제가 되면서 조방에서 생산된 제품은 정부관리하에 두어 정부가 지정한 곳에서 지정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1954년 국무회의에서 조방 불하 결정과 1955년 2월 대구공장을 분리하는 동시에 부산공장을 강일매에게 임대하였다가 8월에 불하되었다. 이후 영업주의 잦은 교체와 시설(1920~30년대 설치)의 노후화, 정부의 부흥계획의 혜택을 입지 못한 점, 또한 소극적 경영과 경쟁업체의 급속한 생산력 신장에 따라 몰락을 가속하였다. 결국 조방은 1968년 4월 11일 부산시로 넘어가 동 5월 1일 범일지구 재개발사업이 기공되면서 5월 14일 주변 무허가 건물철거를 시작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옛 조선방직(주)이 있었던 터에는 부산시민의 문화요람이었던 시민회관, 한양과 삼익아파트를 비롯하여 공공건물과 자유 및 평화시장, 각종 호텔, 예식장이 많이 들어서있다. 지금도 부산시민이면 누구나 조방 또는 조방앞이라 하면 그 유래는 알지 못하지만, 조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시사편찬실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7-09-15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