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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영화촬영소

최초 영화촬영소

우리나라 최초 영화촬영소인「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중구 대청동(복병산 숲속)에 설립된 것은 1924년 6월이었다. 요즘은 영화를 시네마라 하지만 일제강점 당시에는 키네마라고 불렀다.「조선키네마주식회사」설립에는 부산거주 일본상인들이 자금을 대고, 실제 회사 창립과 운영, 연기자 확보 등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역할이 컸다. 그중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라는 연극인 모임인 키네마회사가 탄생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대예술연구회는 1920년 이경손, 김정원 등과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극단이었다. 1923년 이후에는 지금의 중앙동 4가 있었던 국제관(國際館)에서 몇 차례 연극공연을 가졌다. 당시 공연 때 뒷날「조선키네마주식회사」를 창설하게 될 일본 실업가들이 관람하고 있었다.

1924년 4월 무대예술연구회가 어쩔 수 없이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고비를 맞게 되었다. 연구회는 영주동에 있었던 일본인 실업가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별장인 박간산정(迫間山亭)에서 해산을 위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연구회의 연극을 관람한 일본인 실업가들이 연구회 회원들에게 영화계 진출을 권유하였고, 연구회 회원 모두가 영화제작사에 들어오면 새로운 영화제작사를 창립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무대연구회와 일본인 실업가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 1924년 6월 지본금 20만원으로「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사장은 나데(名出)가 맡고, 촬영소장은 다까사(高佐)가 맡았으며, 그는 문학사 학위를 가진 사람으로 감독과 시나리오까지 맡았다.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무대연구회 회원 가운데 이승만, 엄주태, 이혜경은 서울로 돌아갔고, 그 밖의 회원들은 영주동의 영남여관에서 합숙을 하면서 촬영를 다녔다. 설립과 함께 교토에서 스토오(須藤), 오사카에서 사이토(齊藤), 미야시다(宮下), 니시가와(西川) 등의 촬영기사를 회사에서 맞아들였다. 영화촬영소를 갖추고 본격 극영화를 촬영한 영화사로서는「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우리나라에서 설립된 최초의 영화사가 아닌가 한다.

1924년 설립 첫 작품으로 '海의 悲曲'이라는 영화로 작품의 시나리오와 감독은 다까사(高佐)가 필명인 왕필렬(王必烈)이라는 이름으로 맡았다. 주연배우는 서울에서 내려 온 안종화(安種和)와 부산출신 야구선수로 야구계를 육성한 바 있는 은행원 이주경(李周璟)이 발탁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우연히 만나게 된 청춘남녀가 열렬한 사랑에 빠졌는데, 두 사람이 서로 배다른 오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다에 몸을 던진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영화제작에는 많은 제작비가 투자되었으나, 개봉결과 영화의 흥행으로 3천원의 흑자를 올렸다고 한다.

두 번째, 작품인 '운영전(雲英傳)'은 시나리오와 감독은 서울에서 온 윤백남(尹白南)이 담당하였고, 촬영은 미야시다가 맡았다. 주연은 신인배우 김우연과 '해의 비곡'에서 조연을 맡았던 유수준, 조연에는 안종화와 윤헌, '해의 비곡'의 주연을 맡았던 이주경이었다. 이 영화는 고대극(古代劇)으로 작품으로나 흥행에도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촬영초기 나운규(羅雲奎)라는 젊은 청년이 영화배우를 지망하여, 이 영화에서 가마를 메는 교군(轎軍)역인 단역을 맡기도 하였다. 나운규는 뒷날 우리나라 영화의 귀재로 알려지지만 이 작품이 대뷔 작품인 셈이다.

새 번째 작품으로는 일본인 다까사(한국명 王必烈) 감독, 이채천 주연인 '신(神)의 장(粧)'이었고, 1925년 네 번째 작품인 '시골의 호걸(豪傑)'로 윤백남 감독, 유수준과 김우연이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조선키네마주식회사」는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작품을 촬영하였으나, 1925년 조직 내부의 갈등과 자금압박으로 회사는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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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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