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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산신사

용두산 신사

용두산신사(龍頭山神社)는 1678년 3월 초량왜관이 이전해 올 때 대마도주가 용두산 정상에 金刀比羅大神을 봉사(奉祀)하여 金刀比羅神社라 칭하고, 조선과 일본의 통상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1765년 7월 住吉大神과 天滿天神을 합사하였고, 1865년 2월 天照皇大神, 1880년 6월 八幡大神을 합사하고, 1894년 居留地神社로 개칭하였다. 1896년 4월 弘國大神, 1899년에는 神功皇后 등을 합사하여 용두산 신사로 개칭하였다. 1916년 사전(社殿)을 공원 정상으로 이전 개조하였고, 1924년 개수하는 등 그 이후 여러 차례 개, 보수하였다. 일제는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의 신격화로 자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우리나라에는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910년 이전까지는 일본인거류민들을 위해 민간차원에서 신사가 건립되고 유지되었지만,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총독부가 보호하고 육성하면서 신사는 관, 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민에게도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19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사립학교 학생들의 강제 신사 참배정책은 일시 보류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사상관련 각종 행사개최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5년 11월 평양의 기독교계 사립학교장들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계 일부 학교는 폐교되는 등 분열을 맞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교육계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 되어가면서,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는 경찰력을 앞세워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1938년 9월 일제의 강요로 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급격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킨 신도들이 많았다 한다. 조선총독부의 지속적인 장려로, 19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일제는 각급 학교 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1940년 약 215만9000명, 19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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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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