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명지염전

명지염전

강서구 명지동 남서쪽 바닷가 자연마을인 하신(下新)마을의 남쪽에는 박진사라는 소금밭이 있었다. 명지도(鳴旨島) 제염(製鹽)은 조선초기에는 일반백성들이 생산 판매하다가 조선조 태조 때부터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고 염전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쌀과 베[布]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중종 때 이르러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사유화가 되었다가 영조 때 관에서 염전을 점유하는 등 그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점유권이 바뀌고, 관리들의 부조리로 물의를 일으켜 말썽이 자주 일어나자 공염제도(公鹽制度)는 1819년(순조 19)에 폐지되고 말았다.

이러한 연유로 명지동의 제염사(製鹽史)도 옛문헌 기록에 자주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 휴업을 하고 말았는데, 이 당시 이곳에서 생산된 소금은 연간 60㎏들이 10만가마니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 최종호·김명수·박재규·박석곤 등 몇몇 뜻있는 인사들이 발기하여 명지면에서 17명, 신호 7명, 녹산 9명 등 총 33명이 투자하여 염장(鹽場)을 복구하여 연간 20가마니를 생산하기도 하였으나 경제성의 부진을 면치 못하였으나 박석곤·엄명섭·박소룡씨 등이 최후까지 버티다가 중단하고 말았다. 이로서 옛 명지의 특산물인 제염업은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명지도(鳴旨島)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세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8도 해안의 염분이 332개소에서 1,313개소에 육박하여 고려시대에 비하여 그 수가 2, 3배에 이르렀다 한다. 또한『태조실록』에는 소금은 오곡 다음가는 중요한 것이라 하였으니, 조정에서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 염전을 관유화(官有化) 하였기 때문에 서로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빈번하였다는 가례가 옛 문헌에 자주 보인다. 명지동 짐목마을 일대에는 진목염전이 광복이후에 까지도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을 옛날에 소금을 굽는 가마솥이라는 뜻으로 ‘웃가매, 아랫가매, 땅가매’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 옛날 염전이 있었던 곳은 바뀌어 전국적으로 이름난 명지대파의 재배지로 탈바꿈하였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시사편찬실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7-09-15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