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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객사

초량객사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임진왜란(1592~1592)을 전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절의 활동은 철저히 통제되어 서울에 있던 동평관(東平館 : 일본사신이 머물던 곳)은 폐쇄되고, 부산의 왜관만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객사(客舍)란 역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두고, 지방관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숙배를 올리던 곳이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초량객사의 규모는 정청(正廳 : 국왕의 전패를 모신 곳), 동서헌(東西軒) 44칸, 중문(中門) 3칸, 좌우익랑(左右翼廊) 2칸, 외삼문(外三門) 3칸으로 1676년 동래부사 이복(李馥)이 처음 세웠다. 그 후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중창하고, 1825년 동래부사 이항(李沆)이 외삼문을 개건, 1873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수하였는데, 그 위치는 초량왜관(草梁倭館 : 1678~1876, 현 용두산 일대) 북쪽 담장 밖 동래부의 남쪽 27리에 있었다.

이곳에 있었던 초량객사는 일본사신들이 부산에 도착하면 맨 먼저 접위관(接慰官)의 안내를 받아 역대 국왕의 전패에 숙배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는 등 숙배식(肅拜式)의 모든 절차가 이곳에서 행해졌다.

숙배하는 예식을 살펴보면, 파견된 왜사 이하 전원은 객사에 관복을 바르게 입고 서서 대문밖에 와서는 말에서 내려 서쪽 작은 문으로 들어와서 서쪽 마당에 서고, 동래부사. 첨사는 검은 빛깔의 단령(黑團領. 黑公服)을 입는다. 방안의 동쪽벽에 서서 서쪽을 향하여 공수(拱手. 공손하게 손을 맞잡는 것)하여 서고, 훈도와 왜사도 검은 빛 공복을 입고 동쪽을 향하여 서쪽 벽면에 서면, 예방(禮房)이 전패(殿牌)를 열고 예식을 치른다.

숙배식이 끝나면 동래부사와 일본사신은 연향대청(宴享大廳 : 현 광일초등학교 자리)으로 옮겨 서계(書契 : 외교문서)를 교환하고, 환영연을 마친 뒤 일본사신 일행은 초량왜관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초량객사터에는 1895년 사립 개성학교(開成學校)가 세워졌다가 그 후 부산공립보통학교(釜山公立普通學校)로 바뀌었다. 현재는 봉래초등학교(蓬萊初等學校)가 자리 잡고 있다. 2003년 부산광역시에서는 역사유적지에 표석을 설치하는 계획에 따라 초량객사가 있었던 중구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입구 화단에 「초량객사터」의 표석을 세워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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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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