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연향대청

연향대청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절 활동은 철저히 통제되어 서울에 있던 동평관(東平館 : 일본사신들이 머무는 곳)은 폐쇄되고 부산의 왜관만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조선정부는 계속된 일본정부의 강화요청을 받아들여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 1607~1678, 현 동구 수정시장 일대)을 세워 일본의 교역을 허락하였다. 그 후 양국의 선린우호관계가 안정적으로 확대되자, 1678년(숙종 4)에는 그 규모를 확대하여 초량왜관(草梁倭館 : 1678~1876, 현 용두산과 복병산 일대)을 세웠다.

연향대청(宴享大廳)은 17~19세기 양국간의 선린우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물로 당시 규모는 연향대청 18칸, 헐소(歇所 : 일본사신들이 잠시 머물던 곳) 2칸, 헐청(歇廳) 2칸, 남문 3칸, 북문 1칸, 공수간(公須間 : 연향대청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곳) 17칸으로 1653년 동래부사 임의백이 처음 세웠다. 1868년 동래부사 이항이 중창하고, 1709년 동래부사 권이진이 거듭 중창하였는데, 그 위치는 초량왜관 북쪽 담장 밖에 있고 동래부의 남쪽 30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부산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가 되자, 일본사신들은 부산포에 도착하여 먼저 초량객사(草梁客舍 : 조선 임금의 전폐를 모셔놓은 곳)에서 예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였다. 이어서 연향대청으로 자리를 옮겨 동래부사와 일본사신이 공식적인 서계(書契 : 외교문서)를 교환하고, 동래부사의 환영연을 받은 뒤 일본사신 일행은 북문을 통하여 초량왜관으로 들어가 머물렀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연향대청은 1876년 초량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면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 제1소학교가 세워졌다가 현재 광일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의 대청동이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2001년 부산광역시에서는 연향대청이 있었던 중구 대청동 광일초등학교 입구 화단에「연향대청터」의 표석을 세워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예술과
시사편찬실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7-09-15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