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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

초량왜관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이다. 조선전기에는 제포(현 웅천), 부산포(현 부산), 염포(현 울산) 세 곳에 왜관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이전의 왜관은 폐쇄는 물론 일본사절이 서울로 올라가 조선국왕을 알현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임란 이후 일본의 지속적인 요구로 1607년(선조 40) 다시 개관한 두모포왜관은 좁고, 선착장 시설이 좋지 않아 일본의 요구로 여러 차례 이관(移館) 논의를 거쳐 왜관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1678년(숙종 4) 용두산공원과 복병산 일대 약 330,000여㎡ 부지에 새롭게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이후 조선정부는 대일관계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한편, 보다 효율적인 왜관의 운영·관리를 유지하였다. 초량왜관에는 500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거주하였고, 외교·무역을 위해 조선측이 지어준 각종 건물이 즐비하였으며, 일본인들도 자체적으로 그들의 생활에 맞도록 일본식 집을 짓기도 하였다. 또 의식주 생활에 관련된 일본 물품을 파는 가게도 직접 일본에서 건너와 운영되고 있어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량왜관은 넓은 부지에, 늘어나는 무역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좋은 항구를 가지고 있었고 창고도 넉넉하여 양국 교류가 한층 증대될 수 있었다.

특히, 왜관은 양국의 문화가 만나는 문화접점지역으로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일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왜관 운영을 위해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요구되었는데 왜관과 가까이에 사는 부산사람의 부담이 가장 많았다.

초량왜관은 1876년 2월「강화도조약」으로 부산항이 개항될 때까지 존속하다가, 개항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日本人專管居留地)로 바뀌었다. 이곳을 통해 서구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부산항 주변지역은 전통사회의 모습은 쇠퇴하고 새로운 근대 도시의 모습으로 변화해 갔다.

2000년 부산광역시에서는 중구 광복동 용두산공원 에스컬레이터 정상부근 담벽쪽에 「초량왜관터」의 표석을 세워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1738년 변박(卞璞))이 그린 초량왜관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는 왜관의 건물 배치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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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편찬실 (051-888-5058)
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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