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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왜관

부산포왜관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조선에서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이다. 조선이 개국(1392)한 직후에는 일본배들이 조선의 각 포구에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이는 조선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물론, 왜구(倭寇)가 사라지지 않은 터라 국가 안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에 조선정부는 1407년(태종 7)에 처음 제포(薺浦)와 부산포(富山浦)에 왜관을 설치하고, 1426년(세종 8)에는 염포(鹽浦)에도 왜관을 설치하여 3개 포구에만 일본배들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일본사절도 부산포 왜관에 입항하여 잠시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고, 왜인 무역상들도 왜관 내에서만 상거래를 허용하였다.

부산포왜관(富山浦倭館)은 현 자성대공원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부산진시장 주변으로 당시 그 주변에는 담을 쌓아 조선인과 자유로운 접촉을 막고, 일본인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왜관에 왔던 일본인들은 거의 대마도 거주인으로 무역상인, 어부가 대부분이고 생계가 어려워 왜관으로 이주하여 일본인을 상대로 작은 가게를 하던 상인도 있었다.

한편, 일본인의 왜관에 머무는 기간이 점점 늘어나고, 거주하는 사람도 증가하여 1494년(성종 25) 당시 부산포왜관에 거주하였던 일본인은 127가구에 453명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항거왜인(恒居倭人)이라고 불렀는데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고, 왜관을 중심으로 일본인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왜관에는 관사(館舍)와 무역품을 보관할 창고는 물론 일본인이 거주하는 초가집이 밀집해 있었고 왜관 주변에 토지를 경작하기도 했다. 1407년(태종 7) 부산포왜관이 개항한 이래 1544년(중종 39)「사량진왜변」으로 다른 곳의 왜관은 폐쇄되었고 유일하게 부산포왜관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후 일본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607년 두모포왜관이 다시 설치되었고, 1678년 초량왜관으로 이전하였다가 1876년 2월「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규)」이 체결되면서 일본인전관거류지로 바뀌었다. 2000년 부산광역시에서는 역사유적지에 표석을 설치하는 계획에 따라 동구 좌천동 지하철역 부근의 도로공원에「부산포왜관·영가대터」의 표석을 세워 역사교육 및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료관리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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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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