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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동화장장

아미동화장장

부산항이 개항되면서 일본인들은 지금의 중구와 서구를 중심으로 정착하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부산 각처에 흩어져 있던 공동묘지를 일본인 전관거류지 외곽지대였던 부산부 곡정(谷町) 아미산으로 옮겼다. 지금의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까지 이어지는 감천고갯길 일대는 일제강점기 시절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부산부에서는 부내에 흩어져 있는 사영(私營) 화장장(火葬場)인 영도·부산진·아미산·대신리의 화장설비가 불완전하여, 1929년(소화 4) 1월 곡정(谷町) 2정목(지금의 아미동 천주교아파트 자리)에 부영(府營) 화장장을 신설하였다.
당시 화장장 부지는 968평3합, 건물은 136평6합이며, 화장시설은 무연무취특허일신식 2기의 설비로 1시간내외에 완전소각 가능하였다 한다. 1933년(소화 8)의 화장장 이용횟수가 1,480회에 달하였다.

부산부의 화장장 신설에 대하여 곡정(谷町) 주민들의 화장장 이전과 관련한 반대는 오늘날과 같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드렸던 것 같다. 1928년 1월 28일자『동아일보』기사를 보면,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반대의 기세는 갈수록 맹렬, 부산 곡정 화장장 문제- 부산 곡정(현 아미동) 한 복판에 화장장을 설치하기로 부협의회에서 결정하여 도지사의 허가를 얻게 되었음으로 그 부근주민은 즉시 반대운동을 일으키어 열렬히 활동 중이라 함은 기 보도한 바 있다. 비단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측에서도 이 운동에 참가하야 어디까지 그 화장장 설치를 중지시키고야 말 기세를 보이는데 전번 곡성 주민대표가 상경하야 정무총감을 방문 진정한 결과 부협의회에 다시 협의하야 그래도 듯지 안커든 다시오라는 회답이 있었음으로 위원들은 부산에 온 후 방금 수구(水口)신임경남지사와 부산부윤을 방문하고 교섭중이라 하며 곡정민측에서는 불원간 화장장위치 반대 부민대회를 개최하고 더욱 반대의 기세를 놉힐터이라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화장장이 이곳 아미동으로 통합 이전한 이후 장례행렬이 날마다 줄을 잇고 화장장에서는 유족들의 곡성이 계속되면서 불에 타는 시체의 악취가 온 마을에 풍겼다. 그 이후 아미동이라 하면 화장막을 연상케 하여 마을의 발전에도 큰 지장을 가져왔다.

당시 화장장 이전은 지금의 서구와 중구의 일본인 주거지 일대를 도시계획에 맞춰 효과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묘지와 화장장 등의 시설을 인근 외곽지역으로 한데 모은 것이다.

이후 아미동 공동묘지에는 화장과 납골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의 가족묘와 개인묘가 빼곡히 들어섰다. 화장장의 연기가 아미골을 뒤덮었고, 제물로 차려진 음식은 까치들을 불러 모았다. 화장장 부근 지금의 '까치고개'란 이름도 이때 생겼다. 1945년 8월 15일 패망과 함께 일본인들은 황급히 귀국길에 올랐다. 수백여 기의 일본인 무덤은 그대로 남겨졌다. 5년 뒤 한국전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아미동 공동묘지는 피난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했다.

중구 보수동이나 영도구 청학동 등 다른 피난민 정착지역에 비해 아미동의 무덤 일대는 땅을 골라 천막만 치면 간단히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가족묘 주위를 직사각형으로 두른 경계석과 외곽벽은 그 자체가 훌륭한 집벽이 됐다. 이곳 주민들에 의하면, "당시에는 마땅히 집을 지을 재료가 없어 주변에 널브러진 비석과 상석 수백여 개를 하나씩 가져다 건축자재로 썼다"면서 "생존을 위해서 무덤 위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었다"고 어려웠던 지난날을 회고했다.

실제로 아미동 감천고갯길 주변 6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16, 17, 19통 일대에는 지금도 골목과 집 주변 곳곳에서 비석과 상석 등 옛 일본인 무덤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아미동 화장장은 부산의 변두리 지역이었던 지금의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옮겨지면서 아미동은 도로가 확장과 더불어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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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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