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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기생조합

동래기생조합

조선시대 동래부에 관기를 둔 것은 다른 지방의 관기와는 달리 의주(義州) 관아의 관기처럼 외교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의주의 관기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하기 위함이고, 동래(東萊)의 관기는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사신들은 각자 자기 나라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고, 그 사신을 맞아들이는 나라 또한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의 대화의 경색과 분위기 변화를 위해서는 부드러운 풍류와 춤들을 곁들일 만했다.

더욱이 동래부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이 한양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되면서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전담하고 있었다. 왜관 밖에 있었던 연향대청(宴享大廳, 지금의 광일초등학교 자리)에서 외교문서 교환 및 사신접대가 이루어졌다. 연향에서는 관기들의 기악연주 등 연회자리가 마련되는 것이 관례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동래부에 예속되어 있던 관기들이 자유의 몸이 되면서 그 기생들이 기악과 춤과 예절을 닦던 교방(敎坊)이 없어졌다. 교방에서 풀려난 기생들이 자치적으로 조직한 것이 동래기생조합(1910년)이었다.

이 기생조합은 동기들에게 가무(歌舞)를 가르치고, 자기 자신들이 닦은 가무를 연희자리에서 베푸는 일을 하였다. 1912년에는 동래예기조합(東萊藝妓組合)으로 이름을 바뀌어오늘날 명륜동인 부산지방기상청(구 동래세무서)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명륜동에 있던 기생조합은 중일전쟁 중에 온천장의 여관업자들의 요청으로 지금의 동래구 온천동 210번지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무렵 법인조직으로 변경하였다.

그 기생들의 집합체를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 하였으나, 통칭 권번조합이라 했다. 5.16군사 쿠테타 이후 국악원(國樂院)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는 쇠퇴해 가는 우리국악을 살리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1970년에는 '동래국악원'이라 하게 되고, 그 이후 '동래국악진흥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이름 아래에서도 여인들은 지난날의 기생조합이나 예기조합의 그때처럼 연희자리에 한복을 차려입고 북과 가야금을 가지고 나갔다. 그 명맥은 이어오던 동래기생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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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7-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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