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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연혁

중구지역은 배산임해의 지형으로서 평지가 적은 곳이다.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소속되었다가 거칠산국(居漆山國)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후 거칠산국이 신라에 정복되면서 거칠산군으로 편재되었고, 대증현이 설치되었다. 중구지역은 위치로 보아 대증현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통일신라 시기에는『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 때 동평현으로 개명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동평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현종 12년(1021)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어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에 영속되었으므로 중구지역은 양주의 관리하에 있었다.

그러나 중구는 조선시대 이전의 거주민의 활동을 전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조선 태종대부터 부산포(현 부산진시장 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중구지역에는 선조 40년(1607)에 두모포(현 수정동 일대)에 설치되었던 왜관이 숙종 4년(1678) 초량(현 용두산 일대) 지역으로 이건하여 초량왜관이 설치되면서 한일교류의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들 지역은 동래부의 동평면 해정리(海丁里)의 일부와 사천면 하단의 신초량리 일대가 이른바 초량왜관의 자리였다.

1876년 제국주의에 의한 근대개항으로 종전의 왜관은 일본인의 전관거류지, 조계지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점으로 이 지역은 1914년 무렵 종전의 동래부에서 부산부의 관할지역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구지역이 일대 확장과 부산의 중심지로 기능을 하게 된 계기는 이 시기의 매축공사였다. 이로 말미암아 부산 중구에 북항과 남항의 근대적인 항구로 바뀌면서 부산항은 비로소 무역 항구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 지역을 중구라고 부르게 된 것은,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될 때 부산의 중심부에 위치한다하여 중부출장소라 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이때 중부출장소가 관할하게 된 동수는 14개였다. 그후 1956년 부산시 조례개정에 의해 중부출장소 관할 부평1, 2동을 부평동으로 통합하였고, 광복동․창선동․신창동의 3개동을 광복동에 병합함으로써 10개동으로 줄어들었고, 1957년 구제(區制)실시에 따라서 중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은 부산광역시 16개 구·군 가운데 그 행정구역이 가장 좁으면서도 국제시장․자갈치시장 등의 상가와, 수출입 화물선과 국내외 여객선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있는 부산항의 중심지이자 국가경제의 전략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해상운송만의 전진기지라 할 수 있고, 부산에서도 가장 많은 금융기관, 남포동을 중심으로 한 부산상권의 중심지로서 유행과 멋을 창조․선도하는 패션의 진원지이다. 현재 중구의 관할 동은 중앙동․동광동․대청동․보수동, 부평동․광복동․남포동․영주동 등이 있다.

광복동

광복동(光復洞)은 숙종 4년(1678)에 두모포왜관에서 이건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가 체결될 때 까지 198년 동안 존속하였던 곳이다. 그 이후 일본인전관거류지로 이어졌다. 초량왜관의 중요 건물들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서관에는 동대청·중대청·서대청의 3대청이 있었다. 각 대청에는 동헌·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점 이후 일본인들의 중심 거주지가 되었고, 1914년 4월 부제실시로 부산부 관할구역이 되면서 광복동은 변천정(辨天町)·금평정(今平町)·서정(西町)·행정 (幸町)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오늘날의 광복동이란 동명은 광복이후 동명 개칭 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맞아 그 뜻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이 지역을 광복동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법정동으로 광복동1,2,3가가 있다. 1956년 시조례로 법정동인 창선동과 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포함시켜 관할하고 있으며, 1977년과 1992년 동광동 일부를 광복동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포동

초량왜관이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게 되자, 일본인은 그들의 이권을 부산 주변으로 확대시키기 위하여, 왜관 주변을 둘러싼 석벽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일본인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이권과 세력을 부평동·대신동·영도 방면으로 확대시켜 갔고, 마침내 영주동과의 사이에 있던 쌍산(雙山=雙岳)을 제거하여 그들의 거류지를 부산의 조선인 거류지와 연결시켰다. 일본인 거류지 확대가 한계에 다다르자 바다를 매축하기 시작하였는데, 북빈(현 북항)매축공사에 이어 남쪽 바닷가도 매축하기 시작하였다. 남항일대의 용두산쪽 바닷가는 자갈돌들이 많아 자갈치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 남빈해수욕장 (南濱海水浴場)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928년 남빈매축 허가를 얻은 일본인들은 부지 확보외에도 남항일대를 완전한 항만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었다. 지금의 영도대교에서 충무동까지의 모든 해안을 직선으로 매축하여 연안 무역항 및 어염의 기지로 세우고자 한 것이었다. 용두산 아래의 바닷가였던 지역과 매축된 곳을 일제시대에는 남빈정(南濱町)으로 불렸으며, 광복이후 1947년 영도의 남항동과 구별하여 남포동(南浦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77년 시조례에 따라 중앙동과 동광동 일부가 편입되었고, 법정동으로 남포동1,2,3가가 있다. 1982년 법정동인 대교동3가와 동광동1가가 편입되었다. 또한 1982년 충무동1,2,3가 를 남포동4,5,6가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청동

대청동(大廳洞)의 유래는 초량왜관(지금의 용두산 부근 약 330,000㎡) 북쪽 담장 밖에 있는 수문너머, 동래부에서 30리 거리에 연향대청이 위치하였다. 연향대청(宴饗大廳)은 일본사신을 맞이하여 동래부사나 부산첨사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연대청(宴大廳)이라 불렀다. 『증정교린지』에 따르면, 연대청은 35간으로서 거기에는 28간의 공수간과 38간의 외대문, 1간 반의 중문, 각 5간씩의 동고 및 서고 등이 있었으며, 내간자의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다. 연대청의 부속건물로는 북문인 연향문과 1간의 내북문이 있었다. 북문은 연향시 왜사(倭使)가 출입하는 곳으로서 동복병장이 지키고 평시에는 봉쇄하였다. 이 연대청 현관에는 유원(柔遠)이란 액자가 붙어 있어서, 연대청은 일명 유원관, 유원루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가진 연향대청은 현재의 남일초등학교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이로써 그 지명을 일제시기부터 대청정(大廳町)으로 불렀으며, 광복 후에도 일본식 지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대로 대청동(大廳洞)이라 하게 되었다. 법정동으로 대청동1,2,3,4가가 있다. 대청동은 1982년 법정동인 복병동을 대청동에 병합시켰으며, 복병동은 부산지방 기상청이 있는 복병산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동광동

초량왜관의 출입문은 수문(水門)을 비롯하여 수문과 북문이 있었는데, 수문의 통행이 가장 많았다. 이 수문을 비롯하여 재판옥지(裁判屋址), 동향사지(同向寺址) 등이 오늘날의 동광동에 해당한다. 수문은 옛 동광초등학교의 동편에 있었는데 왜관에서 일본인들이 관구(棺柩)를 운반할 때 사용했기 때문에 무상문(無常門)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북문은 대청동의 연혁에서와 같이 평상시에는 늘 열어두고 연향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동광동은 초량왜관 시대에 동관이 위치해 있던 곳이다. 동관은 바로 일본에서 오는 배가 정착하는 곳이며, 왜관의 최고 책임자인 관수(館守)의 집과 거래가 이루어지던 개시대청이 있었던 곳이어서, 일본인조계지가 되자 본정(本町)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복 이후 일본식 동명 개정에 따라 동관이 있던 자리라는 의미의 동관동으로 고쳐야 옳지만, 발음의 어려움과 이웃한 광복동의 동쪽에 위치 한다하여 동광동(東光洞)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동광동1,2,3,4,5가가 있다.

보수동

보수동(寶水洞)은 보수천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보수천은 부산개항 직후부터 부른 이름이며, 그 이전에는 법수천(法水川)이라고 불렀다.『감동어기전말등록』에는 구초량(舊草梁)의 법수천 동암(東岩) 밖이 곧 왜관 수문의 옆이라 하였고,『순영등록』에는 초량 법수천이라 기록되어 있다. 법수라 함은 불법계에서 중생의 번뇌를 씻어 정하게 한다는 것을 물에 비유해 일컫는 말이며, 중생의 마음속의 때를 씻어주는 물이란 뜻이다. 법수천(法水川)이라는 이름이 어느 때부터 기원하였는지 그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옛날 구덕산에 구덕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고, 또 18세기 중엽 왜인들의 약탈에 못이겨 그 절을 다른 곳으로 옮겨갔으므로 폐사가 되었다는 기록 등을 아울러 생각해 볼 때, 법수천이라는 이름은 이곳 구덕사의 승려들이나 그 불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법수천은 법수천에서 따온 말로서 불교적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여 법주(法主)와 법왕(法王)이란 뜻으로 윤색된 표현으로 보인다. 근대개항 후 법수천의 법(法)을 보(寶)로 고쳐 보수천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 뜻은 법수와 같은 것이다. 1880년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나무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다. 그후 1886년 나무통으로 물을 끌어들이는 시설을 하였으며, 1894년 보수천 상류에 물을 모으는 둑인 집수언(集水堰)을 만들고 자연여과장치를 시공하였다. 이와 아울러 거류지 가까운 곳에 대청배수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상수도 기원이 되었다. 법정동으로 보수동1,2,3가가 있다. 보수동에는 검정다리 마을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었다.

부평동

부평동(富平洞)은 부민동과 같은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며, 보수천 하구 일대는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예부터 샛디라고 불러왔다. 샛디는 초량이라는 말이다. 당시 보수천 일대의 샛디는 해정리(海汀里, 지금의 초량)까지도 샛디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초량을 신초량이라고 부르자 원래의 초량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구초량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명은 개항 당시까지도 그대로 존속하였다. 부평동의 부(富)는 부산의 옛 지명인 부산(富山)과 같은 뜻에서 사용한 것이라 하며, 평(平)은「터」라는 뜻으로 샛디의「디」와 통하는 글자로서, 일제시대에는 부평정(富平町)이라고 불렀으며, 광복 이후에 마찌(町)만 동(洞)으로 고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의 장(場)은 5일장 형태였으나, 1910년 설립된 부평시장은 1915년 부산부에서 관리하였다. 이 시장은 인근 70리까지 세력이 미쳐 조선의 최대 공설시장이었다. 이 시장 왼쪽을 백풍가(白風街)라 불렀다. 이곳을 내왕하는 통상문(通常門)이 있어 항상 백의(白衣)를 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수 운집하여 일일상품을 구입하였는데 백의인의 집합장소라 하여 백풍가라 불렀다. 법정동으로 부평동1,2,3,4가가 있다.

신창동

신창동(新昌洞)은 숙종 4년(1678) 두모포왜관에서 이건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주요 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東館)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西館)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서관에는 동대청, 중대청, 서대청의 3대청이 이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 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초량왜관은 일본인거류지로 일본인 단독조계가 설치되었다. 1914년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서정(西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졌다. 이곳은 일본인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광복 이후인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칭 때 서정(西町)을 신창동(新昌洞)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 7월 시조례로 법정동인 신창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편입시켜 관할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신창동1,2,3,4가가 있다.

영주동

영주동(瀛州洞)의 옛 이름을 임소(任所)라 하였다. 이 임소의 유래는 감리서(監理署) 설치에서 비롯되었다. 개항 후 외교통상의 업무량이 늘어나자, 고종 27년(1890)부터 업무처리를 위하여 감리서가 설치되었다. 그 관아는 지금의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취는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감리서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또 관원이 근무하는 직소(職所)라는 뜻에서 임소라 불렀다. 그리고 영선고개는 영선산(瀛仙山)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영선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영선(瀛仙)이 아니고 용선(容膳)이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영선이라는 설로 이 산에서 왜관안의 일본인과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이 고개 밑에 동관문이 있어 쌍방이 선물을 보낼 때에는 감리에게 허가를 받으면 역관이 이곳까지 와서 입회한 상태에서 용인(容認) 선물(膳物)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한 느낌이 든다. 또 다른 한 설은 영선산(瀛仙山)이 두 개의 봉우리로 양산(兩山) 또는 쌍악(雙岳)이라고 했는데 숙종 때 두모포왜관을 초량왜관으로 이설 할 때, 초량왜관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재목이 이 고개를 통해 운반되었고, 또 일부의 부재는 이 산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에 영선산이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용두산 주위에 초량왜관이 설치되고 그 초량왜관의 수문 밖에는 초량왜관을 관리하는 조선측의 관위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지금의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자리에는 초량객사(역대 국왕의 전패를 모셔 놓은 곳)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의 영선고개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영선산이 두 봉우리로 솟아 바다 저 멀리를 바라보는 경관이 아주 좋았다. 그런 자리에 지금의 외교관이자 통역관격인 훈도가 집무하는 성신당(誠信堂)과 별차(別差)가 집무하는 빈일헌(賓日軒) 들이 있었다. 그 훈도와 별차들이 자기들이 있는 곳을 신선이 사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으로 빗댄 말에서 영주란 마을 이름이 형성되었다. 지금의 영주1동 5, 9, 11번지 일대와 초량1동 562-3번지 일대에 자연마을인 청관마을이 있었다.

중앙동

중앙동(中央洞)은 영선산 아래의 골짜기의 맞은 언덕빼기 산봉우리가 해면(海面)에 돌출해 있었다. 이 두 개의 봉우리는 용두산의 좌청룡등(左靑龍嶝)에 해당된다고 한다. 두 봉우리의 사이에는 논이 있었는데 그 곳을 논치라고 불렀으며, 산 아래의 좌우에는 논치어장이 있었다. 이 논치어장은 현재의 중부경찰서 남쪽에 있는 중앙동 지역내의 유일한 고유지명으로 알려진 것이다. 개항 이후 중앙동 거리 바로 아래지역은 바닷가였으므로 당시에는 시가지의 발전은 어려웠다. 당시 초량왜관은 약 330,000㎡이라 하지만 그 중앙에 용두산(龍頭山)이 자리하고 있어 실제 사용 가능한 면적은 231,00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안을 매축하여 시가지를 형성할 목적으로 1902년에 부산매축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이를 중심으로 북빈매축공사가 추진되었다. 이때 매축하여 새긴 지역의 이름으로 이른바 새마당이며, 새로 생긴 넓은 땅이란 뜻이다. 이곳을 일제강점기 때에는 매축허가를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딴 좌등정(佐藤町)·대창정(大昌町)·고도정(高島町)·경부정(京釜町) 등으로 명명되었는데, 이중 좌등정과 고도정은 대한제국 정부에서 매립허가를 내준 일본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경부정은 경부선 철도의 시발지였다는 데서, 대창정은 부두에서 하역관계로 큰 창고가 있는 데서 각각 붙여진 명칭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이 일대는 주로 대창정이라는 지명으로 대표되었다. 광복 이후 부산역(지금의 본부세관 맞은편 소화물 취급소)을 가진 중앙부에 위치하여 있다는 뜻에서 1947년 동명개정 때 중앙동으로 개칭하였다. 법정동으로 중앙동1,2,3,4가가 있다. 1982년 5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대교1,2,3가를 중앙동 5,6,7가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선동

창선동(昌善洞)은 신창동과 마찬가지로 숙종 4년(1678) 두모포왜관에서 이건한 초량왜관이 고종 13년(1876)「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98년 동안이나 존속하였고, 그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계속 존속하였다. 초량왜관의 중요건물은 조선정부에서 지어준 동관과 서관으로 갈라져 있었으며, 동관은 광복동과 동광동 쪽이고, 서관은 신창동과 창선동 쪽이었다. 동관에는 관수왜가, 재판왜가 , 개시대청 등의 3대청이 있었고, 서관에는 동대청·중대청·서대청의 3대청이 이었고, 각 대청에는 동헌·서헌과 2개의 행랑이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강점이후 일본인 거류중심지가 되었고, 1914년 4월 부산부 관할구역에 보면, 신창동은 행정(幸町)으로 그 명칭이 이름지어 졌다. 이곳은 일본인들의 주택가와 상가가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1884년에는 부산전신국을 개설하여 업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인들이 철수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돗떼기, 깡통시장이라 하는 오늘날의 국제시장이 생겨 부산과 경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개정 때 행정을 창선동(昌善洞)으로 개칭하였다. 1956년 7월 시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창선동을 행정동인 광복동에 병합하여 행정관련 업무를 관장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정동으로 창신동1,2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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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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