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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연혁

강서지역은 낙동강 하류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지역으로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로는 범방동․북정조개더미의 문화층의 발견과 토기, 석기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낙동강 서안지역의 가장 하류에 분포하여 어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문화는 농경보급과 청동기의 생산으로 다양한 종류의 분묘와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강서지역은 금관가야 문화권으로, 김해는 선사시대 철생산 중심지로 여기서 채집된 사철을 재련하여 만들어진 철은 멀리 낙랑․왜․대방 까지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한․삼국시대 강서지역은 변한 12국의 하나인 구야국(狗耶國)으로 변한의 맹주국이었다. 중국의『後漢書』 건무(建武) 18년 기록에 보면, “가락국(駕洛國)을 세워 김수로왕이 시조가 되어 맹주국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 법흥왕조에 보면, 동왕 19년(532)에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으로 고쳐 태수가 다스리게 하였다. 문무왕 20년(680) 금관소경으로 개칭하여 낙동강 상류를 하주(下州), 하류를 상주(上州)라 하였다.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 개편 때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편되어 비로소 김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고려초기 태조 23년(940)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칭, 다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다가 다시 군으로 승격하였고, 성종 3년(1012)에는 금주방어사라 하였다. 충렬왕 19년(1293) 현이 되었다가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2년(1310) 김해부로 하고 그 속군을 의안군(義安郡, 창원시 일부), 함안군이 있었고, 속현으로 칠원현(漆原縣)․웅신현(熊神縣)․합포현(合浦縣)이 이었다.

조선시대 태종 3년(1413) 에 김해도호부가 되었고, 연산 5년(1499)에 경상도가 좌․우도로 나누고 우도에 김해진관을 설치하고 창원부, 함안군 및 거제․칠원․진해․고성․웅천의 5현이 소속되었다. 그후 고종 33년(1896)에 행정구역 개편 때 김해군으로 개칭, 양산군 대저면이 김해군으로 편입, 동왕 35년에는 녹산면, 명지면이 김해군의 일부가 되었다. 광무 10년(1906) 9월 지방제도 개편으로 김해군은 23면(좌부, 우부, 활천, 칠산, 하계, 상북, 중북, 하북, 생림, 상동, 하동, 명지, 가락, 덕도, 유하, 수남, 대야, 녹산, 율리, 진례, 주촌, 대저면)이 되었다.

일제 강점으로 1914년 3월 김해군의 23면은 14면으로 좌부, 활천을 좌부면, 우부 칠산을 우부면으로 합병하였다. 1918년 7월 읍․면통합 때 대저면․가락면․명지면․녹산면이 김해군 소속으로, 천가면이 창원군 소속이 되었다. 1947년 6월 25일 김해읍의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로 개칭하였다.

1973년 대저면이 대저읍으로 승격, 1978년 2월 15일 김해군 대저읍과 명지면 일부(신호리는 제외), 가락면 일부(북정․대사․상덕․제도리)가 부산시 북구에 편입되어 대저․강동․명지동이 되었다. 1983년 5월 1일 시직할 강서출장소 설치하고, 동년 12월 15일 대저2동 일부인 을숙도․일웅도 및 낙동강고수부지 일부가 사하구로 편입되었다.

1989년 1월 1일 김해군 가락면․녹산면과 의창군 천가면을 편입시켜 강서구로 승격하였다. 1995년 3월 1일 진해시 웅2동 일부가 편입되었다. 강서구의 관할 법정동으로는 강동동․구랑동․녹산동․눌차동․대저1동․대저2동․대항동․동선동․명지동․미음동․범방동․봉림동․생곡동․성북동․송정동․식만동․신호동․죽동․죽림동․지사동․천성동․화전동 등이 있다. 강서구는 행정동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음을 밝혀둔다.

가락동

가락동(駕洛洞)은 행정동으로 김해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서낙동강의 서안(西岸)에 아담하게 솟아 있는 죽도(竹島, 대섬)를 거점으로 500여년 전까지도 무인도였던 이곳에 사람이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계속 김해에 속해 있다가 1895년 관제개혁에 따라 김해군 가락면이 되었고 1989년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강서구 가락동이 되었다. 가락동에는 식만동·죽림동·죽동·봉림동의 4개의 법정동이 있다. 식만동은 밥만개라 하여 땅이 길고 기름져서 쌀이 많이 나고 먹을 것이 많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죽동는 옛날 대나무가 무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죽림동은 댓섬이라 하여 홍수 때 이 섬이 마치 바닷물속에 떠있는 댓섬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봉림동은 오봉산 남쪽 기슭에 있어 1914년 죽림동과 덕도면 제도리 일부를 합해 생긴 이름이다. 1918년 읍·면 통합에 따라 가락면은 김해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 죽도 기슭에 있는 3층 바위는 김수로왕이 이곳을 찾아와 낚시를 즐겼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는 왜적의 침입을 척후어행(斥候御行)인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지리지(1496)』에 보면, 죽도는 주위가 바다로 논밭과 가옥도 없는 무인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란 이후에는 왜침을 방지하기 위해 대변청 (待變廳)을 설치하는 등 국방의 요충이기도 했다.

강동동

강동동(江東洞)은 행정동으로 낙동강 삼각주 서쪽에 위치한 대사동·상덕동·북정동·제도동 등 4개의 법정동과 19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뻗은 평강천(平江川)과 서낙동강에 둘러 싸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남 김해군 덕도면에 속하였고, 1914년 김해군 가락면에 병합되었다가 1978년 2월 김해군 대저읍과 명지면 일부, 가락면 일부가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강동동이 되었다. 1989년 강서구 강동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동동에 처음 사람이 살게된 것은 삼각주가 있는 하구지역으로 어패류가 풍성하였고, 삼각주안에 제법 큰 동산인 하나의 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 북정리 조개무지에서 출토된 유적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의 강동동을 비롯한 삼각주 일대는 아득한 옛날에는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김해 또는 김해소경(金海小京)이라 하여 바다 해(海)자를 붙인 것과 고려시대 이곳을 임해현(臨海縣) 또는 임해군(臨海郡)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도 짐작이 간다. 강동동은 농업을 주업으로 살아온 곳이며, 이곳은 특히 갈밭이 많아 한때는 갈자리와 갈대꽃을 뽑아서 만드는 청소용 빗자루가 강동의 명산물로 널리 알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강동동의 명칭은 낙동강의 본류인 선암강(仙岩江)의 동안(東岸)에 위치한다 하여 강동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자연마을로는 대부동마을, 대사1구마을, 대사2구마을, 대사3구마을, 덕계마을, 덕포마을, 득천마을, 북정마을, 상곡마을, 상덕마을, 송백도마을, 수봉도마을, 신덕마을, 전양마을, 중곡마을, 중덕마을, 천자도마을, 평위도마을이 있다.

녹산동

녹산동(菉山洞)은 행정동으로 북쪽으로는 굴암산에서 흘러내려 옥녀봉과 금병산, 범방대로 이어진 산맥을 경계로 김해시 장유면 율하리와 수하리에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은 진해시 가주동과 경계를 남쪽은 가덕도동(가덕도)과 마주하고 있다. 녹산동은『여지도서(1760)』에는 녹산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지도에는 녹도(菉島)의 기록은 보인다.『경상도읍지(1832)』김해부 방리조에 "녹산리는 부에서 50리에 있다"고 하여 비로소 녹산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1914년 녹산과 태야 두 면(面)을 합하여 녹산면이 되었다가 1918년 읍·면 통합으로 김해군 녹산면에 속하였다. 1989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부산시로 편입되면서 강서구가 신설되어 녹산동이 되었다. 녹산동에는 법정동인 녹산동·송정동·화전동·생곡동·구랑동·범방동·지사동·미음동· 신호등 등 10개의 법정동과 31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녹산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처음에는 녹산(鹿山)인데 녹산(菉山)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풍수지리설로 봉화산의 동쪽은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 기록주야형(飢鹿走野形)의 명당이기 때문에 녹산(鹿山)이라 하였다 한다.

대저동

대저동(大著洞)은 행정동으로 삼국시대 김해근교의 일부 삼각주로 농경이 시작되고 약간의 인가들이 들어섰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저동(大渚洞)은 대부분 갈밭이었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문헌자료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이제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노전(蘆田)을 비롯한 전답에 관한 것뿐이다. 낙동강변에 대홍수를 막기위해 언제인가 제방을 쌓았는데 온 동민이 징을 울리며 밤잠을 못자고 감시했으며, 제방에 문제가 발견되면 즉시 "보수하는 등 전전긍긍하는 형편이었다. 이 제방이 터지면 마을사람들이 피신할 사이도 없이 대저도가 물바다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 구제방(舊堤防) 안의 다소 지면이 솟은 강 언덕에 덕두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이 대저도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었다. 섬 이름은 "큰 모래톱"이라 하여 "대저도"라고 불렀지만 중심되는 마을은 덕두리였다. 이 당시의 강폭은 현재보다 매우 좁았으므로(약 50m로 추정) 덕두리에서 사상(沙上)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으며 대저도의 크기는 현재보다 훨씬 넓은 섬이었다. 대저동 자리는 아주 오랜 옛날은 바다였다. 그 바다로 낙동강 물길에 실려온 토사가 쌓여서 삼각주의 섬이 되어 대저도가 되었다가 행정구역으로 대저동이 되었다. 큰 대(大) 물가 저(渚)의 대저는 큰 물가란 뜻이다. 대저동은 대저1, 2동의 법정동이 있으며, 출두리·사덕리·대지리·평강리·사두리· 소덕리·율만리·덕두리·도도리·맥도리 등 10개의 법정리와 4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해군에 속했다가, 1918년 8월 읍·면통합으로 김해군 대저면에 속하였다. 1973년 대저면이 대저읍으로 승격하였다가 1978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산시 북구로 편입되면서 대저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9년 강서구의 신설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지동

명지동(鳴旨洞)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이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지도의 어느 곳에서도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명지도(鳴旨島)에 대한 기록인『신증동국여지승람(1530)』김해부조의 명지(鳴旨)에 대한 내용을 보면, 명지도의 위치와 크기를 말한 뒤 "큰비나 큰 가뭄 또는 큰바람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섬이 천둥소리나 북소리 혹은 종소리 같은 소리를 내면서 우는데 섬에서 들어보면 그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으나 어디서 울려오는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명지도의 또 한 이름은 명호(鳴湖)이다. 이곳의 주민들은 현재도 "명지" 보다는 "명호"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욱 많은 것 같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명호" 라는 지명을 더욱 많이 사용한다. 명지도는 농지로 사용되기 전에는 온 섬이 갈대밭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농토가 아닌 곳에는 온통 갈대가 무성하다. 바닷바람 소리와 해면에 가까운 갈대 섬의 바람소리가 울리는 소리를 이런 어귀로 전하고 또 기록했을 것이다. 명지도 또는 명지동이란 이름의 울 명(鳴) 뜻 지(旨)는 울음소리에 연유한 것이다. 명지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김해군에 속했다가 1918년 7월 읍·면통합 때 김해군 명지면이 되었다. 1978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신호리를 제외한 명지면이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명지동이 되었다가, 1989년 신설 강서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동마을 등 16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가덕도동

가덕도동(加德島洞)은 행정동으로 낙동강물이 남해로 흘러드는 강 하구의 남쪽에 위치한 가덕도(加德島)와 눌차도(訥次島)의 2개 유인도와 11개의 무인도를 포함한 1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부산시에서 제일 큰 섬으로 영도의 1.6배로 해안은 동쪽과 남쪽이 단조로운 반면 서쪽은 소규모의 곶(串)과 만(灣)으로 이어져 있고, 북쪽은 가파른 해식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조선 중종 39년(1544)에 가덕진과 천성진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859년(철종 10) 두 진이 폐지된 이후에도 가덕도는 군사적인 요충지로써 1905년 5월 러시아함대와의 외양포해전에서 승리 이후 진해에 해군사령부를 진해로 옮기고, 외양포에 1개연대를 주둔시켰다가 마산을 점령한후 연대를 마산으로 옮겼다. 광복전까지 1개포대만 주둔하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외양포는 포진지는 진해 해군사령부로 통합되었다. 가덕도동은 1906년 웅천군 천성면과 가덕면이었다가, 1908년 웅천군 천가면으로 합하여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창원군 천가면(눌차·동선·성북·천성·대창리)가 되었다가, 198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의창군 천가면이 되었다. 1989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부산시에 편입되면서 강서구의 승격으로 강서구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2014년 가덕도동으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가대교 개통 이전에는 진해 용원선착장에서 가덕도의 5개 선착장으로 연결하는 정기적인 도선을 이용하였다. 현재는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가덕도동은 눌차동·대항동·동선동·성북동·천성동 5개의 법정동과 17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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