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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구

연혁

사하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다대포 해안 동쪽 끝부분 몰운대 입구에 있었던 다대동 조개무지 유적이나 괴정동 유적에서 출토된 유적과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 및 삼국시대 사하지역은 거칠산국의 영역 하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칠산국은 먼저『삼국사기』권44, 거도전에 의하면, “우사산국과 거칠산국을 병합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삼국사기』권34, 지리지에서는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국이었는데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고쳐 지금도 이를 따르고 있다. 영현이 둘이다”라고 하고 있다. 동래지역에 거칠산국이라는 소국이 존재하였고, 그 영역은 사하지역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고려사』권57, 지리2 울주조에 의하면, “속현이 둘이 있는데, 동래현과 헌양현이다”라고 있다. 그리고『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래는 고려 초기에 와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현으로 강등되었다. 그후 현령을 두었다고 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사하지역은 동래현에 속한 변두리지역 이었다.

조선시대 태조 6년(1397) 군사요충지로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 현(縣)의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세종 5년(1423) 병무사를 첨절제사로 개칭하였고, 세종대에는 다대진이 설치되었다. 그후 명종 2년(1547)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한편, 효종 6년(1655)에는 경상좌병영 관할 하의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진을 단독 진을 설치하여 양산과 기장현까지도 지휘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동래부 관할이었으며 일본과 대치하는 군사상 요충지로서 구본산성(다대포), 구덕산성 등의 성곽이 수축되었다.

사하지역의 행정체제를 보면,『동래부읍지(1832)』에 9면 체제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1832년 이전에 9면체제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동래부읍지(1899)』에는 8면 101동리로, 1904년 발행한『경상도동래군가호안』에는 12면(읍내면․북면․서상면․서하면․사상면․사중면․사하면․동평면․남하면․남상면․동하면․동상면) 154동리로 변화되고 있다. 일제시기에는 1910년 10년 1일 지방관제시행으로 부산부에 편입된 사하지역은 1914년 3월 1일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분리되면서 동래군에 속했다가, 1942년 10월 1일 행정구역 변경으로 부산부에 다시 편입되어 부산부 사하출장소에 속하게 되었다.

1947년 10월 1일 일제식 지명을 우리의 동명으로 개칭하였고, 1949년 8월 15일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1957년 1월 1일부로 구제실시로 서구직할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5년 10월 1일 시직할 사하출장소로 되었다가, 1983년 12월 15일 사하구로 승격되었다. 현재의 관할동은 감천동․구평동․괴정동․다대동․당리동․신평동․장림동․하단동 등이 있다.

감천동

감천동(甘川洞)의 옛 이름은 감내(甘內)로, 감(甘)은 "검"에서 온 것이며, 검은 "신(神)"이란 뜻이다. 천(川)은 "내"를 한자로 적은 것인데, 그 이전에는 "內"로 적혀 감내래리(甘內來里)이며, 지금도 지역의 노인들은 감천이라고 하지 않고, 감내(甘內 또는 甘來)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혹은 감천은 물이 좋아서 감천(甘泉) 또는 감천(甘川)이라 했고, 많은 선박들이 옛날에 이곳에 들어와서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검내"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내는 한자어로 "천(川)·양(壤)·내(內)·내(乃)·군(郡)" 등으로 적히며 마을을 뜻한다. 따라서 감천(甘川)이란 말의 뜻은 신읍(神邑)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갖는 지방에서는 대체적으로 지석묘(支石墓)가 발견되고 마제석기(磨製石器)를 볼 수 있으며, 소도(蘇塗)와 같은 신성시되는 곳이나 부족사회의 권력자가 살았던 것으로 짐작되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감천동에서는 검내의 마을 이름에 걸맞게 지석묘 6기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살았으며, 부족사회의 어떤 권력자가 이곳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감천(甘川)이라 하여 모든 선박들이 이곳에서 급수를 받았다고 전하기도 하나 이는 검내를 감천(甘川)이라 표기하고 천(川)을 천(泉)으로 잘못 표기한 것에 맞추어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감천에서 선박들이 급수한 사실은 후세에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들어 감천(甘泉)또는 감천설(甘川說)을 주장할 수 없다. 감천동은『동래부지(1740)』 방리조 서면(西面)에는 감천리라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감천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감천마을, 안골새마을, 태극도신앙촌이 있었다.

구평동

구평동(舊平洞)의 본동은 속칭 "구서평(舊西平)"이다. 뒤에 "성개에 축성이 되고 이곳을 서평진" 이라고 부르면서 원래의 서평은 구서평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개는 구서평리에 속하는 곳이다. 진보(鎭堡)가 성개로 옮기기 전에는 구서평리에 있었는데 여기 토성지가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토성이 언제 쌓아지고 이곳에 진성(鎭城)이 언제부터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토성의 상태나 거기에서 출토되는 신라토기편으로 보아 아마 신라시대에 이미 이곳에 성이 있었던 것 같다. 서평진은 다대진과 더불어 해륙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구평동은『동래부지(1740)』에는 동래부 서면 하단으로 독지리(禿旨里)에 속한지역으로, 이곳 독지장(禿旨場)은 동래·부산·좌수영장과 함께 조선시대 유명한 장이었으나, 장이 있었던 장소와 행정범위 등을 잘 알 수 없다. 1910년에는 동래부에서 부산부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고,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서평마을이 있었다.

괴정동

괴정동(槐亭洞)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아온 곳이다. 괴정동의 뒷 줄기인 속칭 "아래머리" 구덕산을 "용호부리"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낙동강쪽으로 뻗어내린 줄기를 이렇게 부르며 풍수지리설에서 온 이름인 듯하다. 구덕산의 강안(江岸)에 뻗은 말맥(末脈)이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폭풍과 낙동강을 불어 내려온 강풍을 막아주고, 동쪽에는 시약산이 솟고, 남쪽에는 금티산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어 해풍을 막아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지금의 괴정동을 옛날에는 목장리라 했다. 괴정동 주위는 조선시대에는 국마(國馬)를 기르는 목장이었는데 이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크고 목장으로서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다대진 관하의 목장으로는 괴정동의 목장이 가장 규모가 컸던 모양이니 괴정동을 목장리라고 부르게까지 되었고, 지금의 희망촌 일대를 마꼴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때 다대포첨사가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이었는데 어느 감목관 때 감목행위가 너무 지나치게 가혹해서 마을사람들이 팔정자나무 아래서 그 감목관을 성토하다가 비참한 죽음을 입었다고 한다. 그 팔정자나무의 하나가 지금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된 회화나무인데 이 나무가 있는 정자를 괴정이라 했고, 이 괴정으로 괴정동이란 마을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1914년 대티동 일부를 편입하였으며, 그때 부산부에서 동래군 사하면으로 편입되었다.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으며, 1959년 괴정1,2동으로 1965년 시조례에 의해 괴정1동을 괴정1,3동으로 분동하였다. 1979년 8월 괴정1동이 괴정1,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분들마을, 괴정마을, 대티마을, 신촌, 양지마을, 희망촌이 있었다.

다대동

다대동(多大洞)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문헌자료인《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일본서기》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5년기의 다다라노쯔하 계체기(繼體記)에 나오는 다대라원(多大羅原), 그리고 추고기(推古記)에 나오는 다다라(多多羅) 등이 상고시대부터 다대진(多大鎭)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다대포와 일치되는 지명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낙동강 주류가 불아미(佛岩)·가락(駕洛)명호(鳴湖)로 흐르는 줄기였다고 보는데서 다대포에서 대저(大渚)에 이르는 일대를 다대진으로 표현했을지 모른다. 또 일설에는 다대진은 지금의 다대포가 장림포라고 하기도 하는데 모두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또『일본서기』계체(繼體) 23년조에는 이사부(異斯夫)가 군사 3천명을 이끌고 다다라원(多大浦)에 머물면서 웅촌(熊村) 등 4촌에 내주(來駐)한 왜병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다다라(多多羅)는 다대포의 원래 명칭이다라고 한다. 이 밖에도 다다라는『일본서기』민달 4년기와 추고 8년기에도 나오는 바 모두 다대포를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다대포는 역사시대 초기부터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일통상외교의 주요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다대동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의하면, "다대리는 부의 관문으로부터 5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조선후기 이후에와서는 군사적인 중요성으로 보아 상당히 큰 촌락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이었다가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92년 9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다대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낫개마을, 새모기마을, 윤씨내마을, 홍티마을이 있었다.

당리동

당리동(堂里洞)에는 제석골(帝釋谷)이라고 불리는 계곡이 있다. 이 계곡에 제석단을 쌓고 기우제를 드린데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또 일설에는 제석골에 사당을 짓고 여신을 모신데서 온 것이라는 속설도 있다. 지금도 이곳에는 제석사라는 절이 있고 기우제(祈雨祭)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 절 부근에서는 고려시대의 목엽문와편(木葉文瓦片)이 발견되었으며 그밖에는 별다른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된 바 없다. 그러나 누석단(壘石壇)도 있어 민속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이 마을 뒷산까지 조선시대 괴정동에 있었던 목마장이 뻗어 있는데 이 부근에서는 성이 잘 보존되고 있다. 제석이란 불교용어로 제석곡이란 이름이 붙은 곳도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이런 곳에는 대개 기우제단이 있다. 가까이에는 아치섬을 제석곡이라고 하며 여기에도 역시 기우소가 있었던 것이다. 그 제석곡에 사당이 있어 지난날에는 여신을 모셨다고 한다. 그래서 신주를 모신 당집의 곳이라 하여 당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리동은 1914년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행정구역 구역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7년 서구 사하출장소가 설치되었다가, 1983년 사하구의 승격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당리마을이 있었다.

신평동

신평동(新平洞)은 신평동(新坪洞)이라고 기록된 적도 있으며 북쪽에 강한 강바람을 막아주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지고 앞에는 낙동강이 만입(灣入) 되었던 곳에 간척지가 전개되어 있는 밝고 따뜻한 마을이다. 신평동은 망후촌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 유래는 하나는 조선중기 임경업 장군의 조카가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살았다는 구전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이 영의정 김자점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9촌까지 몰살당했을 때 그의 조카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중생이 의주에서 신평까지 피난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올까 보아 뒤로 돌아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망후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한다. 다른 하나는 신평동의 지리적 위치에 따라 마우란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 위치로 보아 다대진(多大鎭)의 후망소(侯望所)였던 까닭에 망후촌(望後村)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곳은 원래 모래 등이 많아 어패류가 많이 잡힌 곳이나, 1939년 이곳에서 장림까지 제방을 쌓아 강의 만입부(灣入部)가 농지로 변했다. 신평은 "새로운 평지"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으로 새마을, 신촌, 새벌, 새마 등과 통하는 지명으로 파악된다. 신평동은『동래부지(1740)』에는 보이지 않고,『경상도동래군가호안(1904)』에 신평동이란 행정지명이 처음으로 기록이 보인다. 1992년 9월 시조례에 의해 신평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동매마을, 망후마을, 모래구찌마을, 배고개마을, 새마을, 신평마을이 있었다.

장림동

장림동(長林洞)이란 숲이 우거진 곳이라기 보다는 지형적으로 아미산 둘레에 길게 늘어선 동네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보인다. 장림이란 지명은『동래부지(1740)』에 사천면 하단에 장림리로 다대진(多大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고다대(古多大)라 전해지기도 하였다. "장림리는 관문으로부터 45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후기 촌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림에는 안장림(安長林)·바깥장림(外長林)·보덕포(補德浦 ; 부득포 또는 비득포)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깥장림은 농업을, 안장림은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형태를 갖추고 반농반어의 취락형태를 이룬 조용한 마을이었다. 지금은 안과 밖 장림이 주택으로 이어졌으나, 원래는 안장림이 옛날의 장림이며 바깥장림은 부산과 다대간의 도로개설 이후 도로변에 새로 집들이 들어서서 생긴 마을이다. 보득포는 안장림에서 두송산 줄기가 북쪽으로 끝나는 능선을 넘어 낙동강 강가에 가면 응봉봉수대의 북쪽 기슭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1914년 동래군 사하면 장림동이었다가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83년 10월 급격한 인구의 증가로 시 조례에 의해 장림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바깥장림마을, 보덕포마을, 새마을, 성화원마을, 안장림마을이 있었다.

하단동

하단동(下端洞)의 옛 마을 이름은 평림리(平林里)라고 불린 일이 있으며 하단리라고 불리기도 했다.『동래부지(1740)』에 의하면, 동래군 사천면을 다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는데 상단을 사상지역, 하단은 사하지역으로 당리·괴정리·감천리·구평리·신평리·장림리·다대리를 모두 사천면 즉 하단이라 하였다. 동명의 유래에 대하여서는 구덕산이 용호몰리(용호머리)이고 거기에서 강을 향하여 괴정 뒷산줄기를 이루어 뻗은 곳이 아래몰리(아래머리)이니 아래몰리의 끝이 아래치로 불려졌다는 설이다. 또는 낙동강류의 맨 아래쪽이라는 뜻에서 아래치 혹은 끝치라는데서 하단이라는 이름이 생겨날 수도 있었다고 보아진다. 또 한가지는 사천면(沙川面) 하단(下端)중에서 인구가 가장 번창하는 대표적인 지역이라 사천면 하단의 지명이 이곳에 붙게 되었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동래부지(1740)』에 기록된 구초량을 하단을 이른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구초량리는 관문에서 32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른 하단지역들이 관아와의 거리가 "40리" 이상인 점을 고려할 때 거리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1914년 하단동이라 하여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다가 1942년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 되었다. 1975년 사하출장소에 1983년 사하구에 속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하단1,2동으로 분동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본동마을, 시천마을, 신내마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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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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