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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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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동구지역은 배산임해의 지형으로서 평지가 적은 곳이다. 삼한시대는 변한에 소속되었다가 거칠산국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거칠산국이 신라에 정복되면서 거칠산군으로 편제되었다가, 대증현이 설치되면서 지역적인 위치로 보아 대증현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그 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하면, "대증현은 신라 경덕왕때 동평현으로 개명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동평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시 신라 말기에는 후백제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동평현의 영현이었던 동래군이 동래현으로 강등되면서 울주군에 영속되자, 동평현도 양주군(현 양산)의 지배를 받았다. 『고려사』권57, 지리2 동래현조에 의하면, "현종 9년에 본주(울주)에 소속시켰으며 후에 현령을 두었다. 이 현에는 온천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초기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속 현으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 7년(1407)에 부산포(현 좌천동 일대)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왜관이 설치되었는데, 동구 지역은 이때부터 국제화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 부산포왜관은 광해군 원년(1609)에 두모포(현 수정동)에 이건 되었고, 숙종 4년(1678) 초량(현 용두산 일대) 지역으로 이건 하기 이전까지 대일의 외교교섭 및 무역거래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던 곳이다. 조선중기 무렵 지금의 수정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왜관이 중구(초량 왜관)지역으로 이전되자 두모포, 개운포 등의 수군 진관이 이설되어서 국방요새가 되기도 하였다.
동구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영조 16년(1740) 편찬한 『동래부지』에 보면, 동래부를 7개 면으로 편제하였는데, 동구는 동평면의 일부였다. 그후 1910년 1월에는 오늘날의 동구는 사중면(沙中面)에 소속된 초량지역을 제외하고는 동래군에 소속되었다. 그러다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1910년 행정구역과 명칭을 개편하였는데, 기존 동래부를 동래군과 부산부로 분리하였다.
오늘날의 동구의 대부분은 부산부 부산면(범1,2, 좌천동, 수정동)에 소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지배와 대륙침략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경부선 철도의 가설로 매축이 시작되면서 지세가 확장되었다. 1942년 10월 1일 행정구역 확장으로 동래군 동래읍과 사하면, 남면, 북면일부를 편입하여 4개 출장소(부산진, 동래, 사하, 수영)가 설치되어 부산진출장소에 속하였다.
한편, 1947년 일본식 동명을 우리말로 개칭하였고, 1949년 8월 15일 부제가 시제로 바뀌면 서 부산부가 부산시로 개칭되었다. 1951년 초량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 구제가 실시 되면서 부산시청에서 볼 때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구라 하였다.

관할행정구역

초량제1동(草梁第1洞), 초량제2동(草梁第2洞), 초량제3동(草梁第3洞), 초량제6동(草梁第6洞), 수정제1동(水晶第1洞), 수정제2동(水晶第2洞), 수정제4동(水晶第4洞), 수정제5동(水晶第5洞), 좌천동(佐川洞), 범일제1동(凡一第1洞), 범일제2동(凡一第2洞), 범일제5동(凡一第5洞)

주소 및 전화번호
[48781] 부산광역시 동구 구청로 1 (Tel : 051-440-4000)

자료관리 담당자

자치분권과
김태영 (051-888-1808)
최근 업데이트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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