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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군

연혁

부산지역의 선사유적은 해운대 청사포와 신시가지인 좌동 일대에서 구석기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신석기유적은 동삼동․다대동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기장의 해안지역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으나 아직까지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청동기시대에는 사람이 점차 해안지대에서 내륙 구릉지대로 이동하여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 기장지역의 사회상은『삼국지』위지 동이전을 통해 볼 수 있다. 기장지역은 거칠산국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그 세력집단들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3세기 후반에 이르면 석탈해가 울산 동부지역을 거점으로 사로국(斯盧國)에서 정치적 입지를 차지함과 아울러 울산 서부지역의 우시산국(于尸山國)을 제압하고 이어 거칠산국을 정복하였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은 지증왕 6년(505) 거칠산국(居漆山國)의 갑화량곡(甲火良谷)에서 동래군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으로 개편되었고, 신문왕 때(685)에 9주 5소경의 군현제 개편시 삽양주에 편입되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장은 원래 갑화랑곡현(甲火良谷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12월 양주(良州)관내 동래군 기장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삼국시대 기장지역이 소속한 동래는 거칠산군으로 삼한시대 거칠산국에 속한 읍락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기장현을 양주(良州)에 소속시키고, 현종 9년(1018)에는 다시 울주에 이속되었다가 뒤에 감무(監務)가 두어지고 차성(車城)이라고도 불렀다. 공양왕 13년(1391) 3월에 기장현은 기장군으로 우왕 2년 12월 다시 기장현으로 칭하다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 기장군으로 승격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의하면, 기장현에는 고촌부곡(古村部曲), 결며부곡(結㫆部曲), 사량촌부곡(沙良村部曲), 사야부곡(沙也部曲) 등이 기장에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태조 3년(1397) 군사요충지인 동래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사가 동래현의 판현사를 겸임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첨절제사로 개칭하였고, 중종 14년(1591)에는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관찰사를 두었다. 따라서 기장은 동래와 더불어 경상좌도에 속했다.『여지도서』에 보면, 기장현은 경주진의 관할로서 6개면(읍내면․동면․상서면․하서면․남면․중북면)으로 영조대에 기장현에는 면리제의 행정체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조 32년(1599)에 기장현은 폐현되고 남쪽은 동래에 북쪽은 울산군에 합속되었다가 광해군 9년(1617) 기장현이 다시 설치되었다. 1895년 행정구역 통페합으로 동래부의 기장군으로 개명되고 8개면(읍내면․동면․남면․중북면․하서면․하북면․상서면․상북면)을 두었다.

일제침략기인 1910년 부산부가 설치되자 동래는 부산부의 지배를 받았다. 1914년 4월 군․면통합에 따라 동래부의 일부와 기장군(기장면․장안면․일광면․정관면․철마면)을 합하여 동래군(東萊郡)으로 편제되었다. 1949년 8월 부제가 시제로 바뀌었고, 1973년 7월 1일 동래군의 폐지로 양산군에 병합되고 1983년 2월 15일 서생은 울산에 병합되었다. 1985년 10월 1일 장안면이 장안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7월 1일 양산군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어 기장읍․장안읍․일광면․정관면․철마면의 5개 읍․면을 관할하였다.

1995년 3월 1일 양산 동부출장소가 부산광역시에 편입됨으로써 기장군(기장읍․장안읍․일광면․정관면․철마면)이 되었다. 현재 관할지역은 5개읍․면 62개 법정리와 125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기장군 지역은 읍․면의 유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법정리는 지면상 여기서는 다루지 않음을 양해 바랍니다.

기장읍

기장의 옛 이름은 갑화량곡(甲火良谷)이고 별호(別號)는 차성(車城)으로 기장은 큰 벌이라 불렀고 큰마을의 뜻이다. 갑화량곡 이라는 옛 이름을 "가벌둔"이라고 하여 현대어로 "산에 둘린"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갓벌"이라 하여 "변두리 마을"이라고 해설하는 사람도 있다. 옛 지명에 갑(甲), 가는 갓(邊)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 발음하고 벌은 마을, 성을 뜻하므로 변두리 마을로서 변성(邊城)의 뜻이라고 한다. 모두 타당한 풀이로 생각되지만 갑화량곡은 "큰 마을"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옛 지명에 갑(甲)은 크다의 뜻이고, 화(火)는 "불" "벌"로서 곧 마을이나 성을 뜻한다. 기장이라는 지명은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옥녀직금설로 기장은 옥황상제의 옥녀가 이곳에 내려 와서 베틀을(織機) 차려서(張) 비단을 짜고 (織錦) 물레질(紡車)을 한 곳(城)이기 때문에 베틀 기(機)와 베풀 장(張)으로서 기장(機張)이라 하였고, 그 별호를 차성(車城)이라 하였다고 한다. 차성가도 이설에 의거하여, "읍기를 구어 보니 옥녀직금 분명하다"라고 하였고 수령산(繡嶺山), 성산(筬山) 수계교(繡溪橋), 직금루(織錦樓) 등의 이름이 있는 것은 모두 이 설에서 유래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기장의 고로들이나 선비들은 모두 이설을 절대적으로 따랐다고 한다. 둘째로 대읍성설(大邑城說)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장과 갑화량곡은 같은 뜻이라는 전제로 이를 대응시켜서 설명하는 것이다. 갑(甲)은 크다(大)이고, 기(機)도 크다(大)의 표기이다. 화량(火良)은 "활"의 표기로 이를 불, 부리, 벌, 펄로서 화(火), 벌(伐), 불(弗), 부리(夫里), 부리(富里)의 표기와 같다. 신라의 장보고(張保皐)를 궁복(弓福)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서라벌의 벌도 마을의 표기인 것이다. 따라서 갑화량은 큰벌, 기장도 큰벌로서 모두 "큰 마을"이다. 개화(皆火), 가불성(加弗城), 거발성(居拔城), 지벌지(只伐只), 부부리(夫夫里) 등의 옛 지명도 모두 "큰마을"이라는 표기이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경상남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장읍의 법정 마을로는 동부리·서부리·대라리·사라리·대변리·죽성리·연화리·시랑리·청강리· 내리·만화리·신천리·교리·석산리·당사리 등 15리로 구성되어 있다.

장안읍

장안(長安)은 성내(城內)라는 뜻으로 잣안이 장안으로 바뀌었다. 서울을 장안이라 하는데 장안은 잣안이고 잣은 城의 고어(古語)이고, 안은 안쪽 내(內)이다. 기장군 장안읍의 소재지가 되는 좌천리가 옛날의 성내이고 장안이다. 성을 뜻하는 고대어는 자, 잣, 재, 사로서 지금도 잣(城)이라 한다. 지명에 좌(佐), 자(自), 자(慈), 사(斯), 시(市)로 표현된 곳은 거의 성(城)이 있던 곳이다. 부산진성이 있는 곳을 좌천동이라 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좌천마을 서쪽 골짜기를 지금도 시리성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의 성촌(城村)은 저재, 저자라는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성촌을 좌안(佐內)이라 하였다. 좌천리는 옛날에 좌방(佐坊)이었는데 큰 마을이었기 때문에 동과 서로 구분하여 동쪽은 좌동(佐東)이고 서쪽은 좌서(佐西)라 하였으며, 좌서가 좌천(佐川)이 되었다. 옛날에는 북쪽의 화철령(火鐵嶺)을 경계로 하여 남쪽은 동래의 거칠산국이고, 북쪽은 울산의 우시산국으로서 좌천리는 국경지대에 있는 큰 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접경지대에 있는 명례리는 울례라 하였는데 이는 책촌(柵村)이라는 뜻의 진영이고, 월내리도 울내라 하였는데 울안이라는 말로서 역시 책내(柵內)라는 뜻의 진영이고, 임랑리는 임을 랑이라 하였는데 이는 임울안 이라는 말로서 주책내(主柵內)라는 뜻의 진영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좌천리는 북쪽의 명례리·월내리·임랑리에 있는 진영의 방비를 받고 있는 성내가 된 것이다. 이처럼 북쪽의 변두리에 여러 성책이 있었고, 좌천리는 그 후방이 되는 안쪽에 있었으니 안마을이 되었다. 또 좌천리는 시장마을이니 저자마을이다. 그래서 좌천리를 옛날에는 잣안이라 불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내를 장안이라 하였다는 예로서는 셔울을 잣안이라 하였던 것이다. 장안은 1914년 3월 군·면의 정비로 기장현 상북면을 장안면으로 개칭하였다. 예부터 장안이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장안사라는 절 이름이 있었고, 절 이름에 따라 장안리가 있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장안이라는 좌천리는 장안이라 하지 않고 좌촌이라 표기하였다. 지금도 좌천리라 하지 않고 자천리라 부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깊은 역사적인 연유가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경상남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안읍의 법정 마을로는 좌천리·좌동리·덕선리·용소리·기룡리· 장안리·명례리·반룡리·오리·고리·길천리·월내리·임랑리·호암리 등 14리로 구성되어 있다.

일광면

일광(日光)의 명칭 유래는 일광산(日光山)에서 유래되었으며, 일광산이라는 매력적인 이름은 그 주봉되는 백두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산은 기장의 옛 읍성(邑城)이 있었던 곳의 진산이었던 것이다.『기장현(읍)지』의 산천조에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으며, 팔대명산에도 없다.〈차성가(車城歌)〉에는 삭출금부(削出金芙) 일광산은 만장봉(萬丈峰) 높았는데, …… 백두산 늙은 바우 지기석(支機石)되어 있고…라고 되어 있으니 약 2백년 전에도 일광산,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있은 것은 확실하다. 이보다 앞서 기장향교에 있는 남루상초문에 "일광산색탱천극(日光山色撑天極)" 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것은 인조 6년(1638)에 지은 상초문이므로 약350년 전이다. 그러므로 일광이라는 이름은 몇 백년 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주봉은 백토(白土)로서 토박하여 풀도 제대로 자생하지 못하여 백토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백색(白色)의 화강석만 널려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백설(白雪)이 덮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백두산(白頭山)이라 하였다. 그런데 옛날은 산이 흰빛으로 보이니 흰빛 뫼라 하였을 것이다. 흰빛 뫼를 이곳 방언으로 희빛 뫼→해빛 뫼로 불렀을 것이다. 햇빛 뫼를 그 뜻대로 해 일(日), 빛 광(光), 뫼 산(山)으로 일광산이라고 차훈표기를 하였다. 일광산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너무나 안이하고 통속적인 해설이 된다. 일광산이 옛 기장의 발상지이고 고성(古城)의 진산이라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전국각처에 있는 고성의 진산은 모두 나라사라 이름하였고 이는 나라 의성(義城)이라는 뜻으로 차훈하면 국성(國城)이 되는 것이다. 옛날의 고성이 있었던 곳으로 횡성군·보은군·산청군·공주시·하동군·상주시·예천군에 있는 주산은 무두 국사봉(國師峯)이라 표기되었고, 합천군 등은 국토봉(國土峯)으로, 진천군은 국사봉(國寺峯)이라 하였는데 모두 그 속명은 나라사라 부른다. 나라사는 나라(主)와 사(嶺)는 자, 재, 잣의 고대어는 사이므로 嶺, 城의 뜻이다. 이처럼 일광산은 나라사라 불렀고, 그 뜻은 나라의 성이 있는 산이라는 말로서 주산(主山), 국성산(國城山), 주성산(主城山)이 된다. 이는 전국각지에 있는 고성에 있었던 모든 산은 국성산(國城山)으로 해설되고 있으므로 일광산도 국성산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경상남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광면의 법정 마을로는 삼성리·학리·청광리·동백리·화전리·횡계리·용천리·문동리· 문중리·칠암리·신평리·원리 등 13리로 구성되어 있다.

정관면

정관면(鼎冠面)의 이름은 소두방재〔聳岩嶺〕에서 유래하였는데 소두방재를 정관령(鼎冠嶺)이라 하였다. 소두방재는 정관면 사람들이 동래로 내왕하는 유일한 관문이었기 때문에 1914년 3월 군·면의 행정구역 개정 때 정관면의 이름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소두방은 솥뚜껑의 방언이다. 이를 솥 정(鼎), 갓 관(冠)자로 아주 멋있는 작명을 하였다. 소두방재라고 한 것은 재(嶺) 근처에 있는 매바우가 꼭 소두방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매바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두방처럼 생기지 않고, 큰 바위가 산처럼 솟아 있을 뿐이다. 매바우를 옛사람들은 솟아 있는 바위(聳岩)라 하여 솟은 바위를 이곳 방언으로 솟은방우→ 솟은바우→ 소든방우, 소두방이라 한 것이다. 즉 이곳 방언으로 소두(聳), 방우(岩)인데 방우는 방으로 줄여서 소두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따라서 그 참뜻은 솟은 바위이지 솥뚜껑〔鼎冠〕은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소두방재가 있는 곳을 소산평(蘇山坪)이라 하였는데 이는 솟은(용), 뫼(산), 들(평), 즉 용산평(聳山坪)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소두방(聳岩)을 그 모양이 뫼처럼 생겼다 하여 뫼바위(山岩)라 한 것이다. 뫼바위(山岩)를 이곳 방언으로 매바우라 하기 때문에 한자로 매암(梅岩)이라 하였고, 그 아랫마을은 매곡(梅谷)이라 하였던 것이다. 옛날 매바우에 두루미가 살고 있었다하여 소학대(巢鶴臺)라는 멋진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백운산에 있었던 기장 제일의 대가람이었던 선여사(船餘寺)에 딸린 망일암(望日庵)이 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겨 이곳 관문은 이제 송림속에 길이 묻혀 내왕도 어렵게 되었다. 소두방재라는 본래의 이름은 용암령(聳岩嶺)이라는 뜻이 되니 정관면이라는 이름 역시 그 본래의 뜻대로 한자로 표기하면 용암면(聳岩面)이 되는 것이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경상남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관면의 법정 마을로는 예림리·달산리·방곡리·매학리·용수리·모전리·병산리·두명리·월평리· 임곡리 등 10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철마면

철마(鐵馬)라는 지명은 철마산(鐵馬山)에서 유래 되었다. 철마산은 쇠말산, 샛말, 소멀미 등 비슷한 속명이 있다. 옛날 이곳은 큰 홍수와 해일로 인하여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었는데, 미역 바위의 용굴에서 동해 용왕의 명을 받은 용마(龍馬)가 나와서 물을 다스리고 나서부터는 물이 없어 용마는 환궁하지 못한 채 햇볕에 말려져 점차 굳어져서 작은 쇠말이 되어 최근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쇠로 된 말이 있는 산이라 하여 쇠(鐵), 말(馬), 뫼로 철마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철마산의 쇠(鐵)는 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쇠는 새 샛과 소리인데 東風을 샛바람이라 하고 있다. 鐵原郡 本 高句麗 鐵原郡 景德王改名今東州에서 鐵 = 東의 뜻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新)도 역시 東의 뜻이다. 신라는 새벌로 읽고 새는 새벽 해의 효(曉)뜻이고, 광명(光明), 신성(神聖)의 뜻을 취한 성지이며 동방(東方)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말(馬)은 지명에 흔히 쓰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크다(大)의 뜻으로 해석되는데 말의 뜻으로 해석 될 때도 있다. 철마의 마는 산령(山嶺)의 뜻이 되는 마루〔嶺〕의 뜻으로 해석된다. 산마루 마라(宗), 말(棟), 머리(頭)는 동계어(同系語)이다. 그러므로 말은 짐승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마루의 뜻으로 嶺이 되는 것이다. 소멀미는 흔히 우두산(牛頭山), 우령(牛嶺), 우도(牛島), 우봉(牛峯) 등으로 표시되고 있다. 소는 솟음 즉 용의 뜻이고, 멀은 머리가 아니라 마루 즉 嶺의 뜻이고, 미는 뫼로서 산의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소멀미는 우뚝 솟은 산을 말하는 솟은 마루산으로서 용령산(聳嶺山)으로 해석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는 쇠, 새와 같은 말로서 역시 동의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래서 철마산을 소멀미라 속칭하는 것도 동령산(東嶺山)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말(馬)이 크다(大)의 뜻으로 해석되는 예로서 韓山郡 本 百濟 馬山縣에서 보듯이 韓 = 馬로서 한은 대의 뜻이니 馬 = 大가 된다. 그리고 소, 쇠는 수리(首)의 뜻으로 해석하고 지명에 있는 소(蘇), 서(徐), 사(斯), 정(鼎) 철(鐵)은 上, 高의 뜻으로 풀이하여 철마산은 상대산(上大山), 고대산(高大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철마산은 쇠(鐵), 말(馬), 뫼(山)으로 쇠말산 이라 하며, 쇠는 소, 새와 같은 말로 東風을 샛바람이라 하듯 동쪽의 뜻이고, 말은 마라(宗), 말(棟), 머리(頭)와 동계어로서 마루라는 말로서 산마루 嶺으로 산등성이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쇠말산은 쇠(鐵)로 된 말(馬)이 아니라 이는 동쪽 산등성이라는 뜻으로 동령산(東嶺山)이 되는 것이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1973년 7월 경상남도 양산군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양산군 동부출장소에 속했다가, 1995년 3월 부산광역시 기장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마면의 법정 마을은 고촌리·구칠리·백길리·송정리·안평리· 연구리·와여리·웅천리·이곡리·임기리·장전리 등 11개리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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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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