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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수도 부산

한국전쟁과 피란수도 부산

한국전쟁은 미·소간의 냉전대립 속에서 발발한 최초의 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민족·이념전쟁이었다. 그리고 국제연합(UN)의 유엔안보리 결의안 82·83·84호에 따라 유엔사령부가 설치되고 미군을 시작으로 유엔군이 참전하고, 1950년 11월 중공군의 공세로 국제전으로 확전된 전쟁이었다.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대한민국은 전쟁 개시 며칠 만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내주고 남쪽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긴박한 전황으로 인해 정부는 전쟁발발 이틀 뒤에 대전(1950.6.27.~7.16.), 대구(1950.7.16~8.17.)를 거쳐 긴급회의 후 1950년 8월 18일 최종적으로 부산을 피란수도로 결정하게 되었다.

 

첫째는 ‘정부 기능과 국민 안전의 유지’였다. 바다를 접한 대한민국의 동남쪽이라는 부산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정부기능을 온전히 유지하고 전쟁 중 피란민들을 보호하는 등 정부 기능의 일관성과 국민의 심리적 안정이 필요했다.

 

둘째는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여러 국제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을 위한 최적지였다.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된 유엔한국위원회(UNCOK)가 부산에 위치하였으며, 유엔군사령부가 있는 일본과의 지리적 인접성을 고려하여 국제연합(UN)과 군사·외교 등을 협력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한국전쟁(6.25전쟁)기간 중 1,023일(1950.8.18.~10.26/1951.1.4.~1953.8.14.) 동안 피란수도 부산에서의 공공협력과 국제협력을 보여주는 총 8개소의 유산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공협력 유산”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정부와 국민, 국제연합이 함께 국가 운영이 가능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산으로 국가의 주요정책의 협의․결정이 이루어졌던 ‘경무대(임시수도 대통령관저)’, 국무회의소와 국무총리실, 의무부 등 8개 정부부처가 사용했던 ‘임시중앙청(임시수도 정부종합청사)’, 군사작전을 위한 기상정보와 어선들에게 해상정보를 제공했던 ‘국립중앙관상대(부산지방기상청)’가 있다.

 

국제협력 유산”은 전쟁의 위기에 직면하여 국가의 존립과 평화를 지원한 국제연합(UN)과 정부, 그리고 국민의 일치된 협력의 증거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유엔과 피라민간의 소통과 협력의 창구였던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대역사관)’, 유엔군 입항과 군수물자와 피란민 지원물품의 유입통로였던 ‘부산항 제1부두’, 유엔군 훈련소와 유엔한국위원회(UNCK)·유엔통일부흥위원회(UNCURK)가 자리 잡고 있었던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 주한유엔지상군사령부 역할을 담당했던 ‘워커하우스’, 그리고 한국전쟁에 참여한 21개국 유엔군 전사자의 안식처이자 국제연합이 인정한 세계유일의 묘지인 ‘유엔묘지(재한유엔기념공원)’가 있다.

※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 대하여 알려 드려요. 바로가기

자료관리 담당자

문화유산과
권덕근 (051-888-4211)
최근 업데이트
201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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