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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와 수위 관측

표의 발명과 설치에 관한 첫 기사는 측우기와 같이 세종 23년(1441년) 8월 18일 기록에 나온다. 수표를 설치한 장소는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의 암석 위이다. 여기서 마전교는 수표교 자리이며, 수표가 서기 이전에는 세종때 우마시전이 있던 장통방 하천변 가까이 걸려 있던 관계로 이 다리를 마전교라 불렀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뒷날 마전교는 수표교라고 그 이름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수표는 수표교 서쪽 약 10간(약 18m)되는 곳에 있다. 기둥은 부정육면의 방추형이고, 길이는 밑바닥에서 3m, 폭은 약 20cm이다. 두부에는 연화형의 산석을 갖고 저부는 방주형이다. 주면에는 1척(주척)마다 직선을 긋고, 1척에서 10척에 이르는 문자를 각입하고 동측의 표면에는 3척, 6척, 9척, 3개소에는 작은 구멍이 파져 있다.

수표를 설치했던 또 하나의 지점은 한강변이었는데 그 위치는 제천정 남안으로 되어 있다. 이 제천정은 한강변 절경지에 세웠졌던 왕가의 별장이었고 그 위치는 한남동과 보광동 경계의 소구(小丘)이다. 이 제천정 남방 강안에 수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강의 수표 관측은 도승, 즉 한강 진영의 주무자가 맡아 수량을 보고토록 하였다. 이 한강변 수표석은 1920년경까지 그것과 비슷한 석주가 남아 있었으나 1925년 을축년 홍수 때 물 속에 잠겼거나 유실된 것으로 지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세종 때의 수표는 방목주를 세운 것으로 미루어 목재 수표였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 권3 교량조에는 수표는 석표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수표도 돌이므로 현재 석수표의 제작 연대의 상한은 동국여지승람 편찬 연대인 성종조 이전이 된다. 그리고 그 하한은 현존 수표 아래 부분에 새겨진 계사경준, 기사대준이라는 각기로 보아 영조 49년(1773년) 6월에 있었던 대준천공사(순조실록)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으로 보아 이 수표는 그 이전에 설립되어 있어야 하므로 그 정확한 하한은 영조 25년 기사(1749년)이거나 순조 9년 기사(1809년)가 된다. 그런데 영조 46년(1770년) 5월에 세종 때의 제도에 따라 측우기를 다시 만들어 전국적으로 강우량의 측정을 시행하게 되었을 때에도 수표는 계속 쓰이고 있었고 수표가 새로 세워졌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현존하는 수표는 적어도 영조 때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조 14년 4월 14일로부터 고종 26년(1889년)까지의 기우제와 함께 수표와 측우기의 보척 기록이 6책으로 상세히 남아 있다. 내용을 보면 예조가 한강 도승과 중부 수표직과 남부 수표직의 보척수본에 의하여 비가 온 일시와 수위의 척 촌 단위의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 내용은 세종 24년 5월 측우기에서 기록된 것과 일치됨을 볼 수 있다. 다만 그것과 다른 점은 호조 대신에 예조가 담당하였으며 측우기 보척 대신 수표 보척을 사용하였다는 것과 기우제 관계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보척의 절차는 수표직의 수본이 예조에 제출되면 예조는 그것에 의하여 초기를 한다. 그리하여 수표단자를 만들어 왕에게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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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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