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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와 강우량 관측

조선시대에 들어서 강우량의 관측이 시작된 것은 세계 기상관측사상 가장 획기적인 일이었다.

세종 5년(1423년)에 가물어서 비를 기다리는 기사가 4월과 5월에 많이 있다. 비를 기다리다가 5월 3일에 '이 날 비가 내렸는데 땅에 물이 한 치쯤 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우량관측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당시 우량의 정도를 땅에 물이 스며드는 깊이로 관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세종 7년(1425년) 4월 1일과 5월 3일에 '지금 가물어 각 도와 각 현에 명하여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정도를 조사하여 보고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두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측우기 발명 이전에는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여 그 수치를 각 도 감사가 집계하고 그것을 호조에 보고하면 호조에서는 정기적으로 집계, 기록하여 두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오늘날의 토습의 개념으로 강수량이 토양수분(soil moisture)을 결정하고 토양수분이 식물성장에 기여한다는 현대 기후학의 중요한 수분수지이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세종 23년 8월 18일에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 도 감사가 우량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이 있사오나 토성의 조습이 같지 아니하고, 흙 속으로 스며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 위에 올려놓고 비를 받아, 본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돌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고리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촌·분수를 기둥위에 세우고 본조낭청이 우수의 천심분수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 암석 위에 푯말을 세우고 척·촌·분수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든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 내용은 토습 측정의 어려움과 측우기의 재질, 구조 및 척수, 설치장소, 설치법, 측량법, 측정인과 전보 과정까지 경중(京中)과 지방을 구별하여 상세히 하였다. 또 수표도 만들었는데 수표의 재질과 구조, 척·촌·분수까지의 눈금의 정밀도, 설치장소, 측정인 및 전보의 절차까지도 상세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 24년 5월 8일에 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을 측정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합니다.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하여 기구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라 하니, 길이가 1척 5촌이고 직경이 7촌입니다. 주척을 사용하여 서운관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으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정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의 척·촌·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한 측우기와 주척매 1건을 각 도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항(上項)의 측우기의 체제에 의거하여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 주척으로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와 물 깊이의 척 촌 분의 수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典據)로 삼게 하소서' 하였다.

이 두 기록에 따르면 측우기 제조의 동기는 그 전에는 강우량을 땅에 물이 스며드는 양으로 보고를 했는데, 토성의 건습에 따라 흙 속으로 스며드는 양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과학적인 측정기기를 고안하게 된 것이다.

측우기는 세종 23년(1441년) 8월에 처음 만들어지고 그 다음해인 세종 24년(1442년) 5월 개량되어 이때 그 명칭을 측우기라 하였는데 그 크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즉 길이 2척, 직경 8촌에서 길이 1척 5촌, 직경 7촌으로 개조되었다.

측우기는 서울에서는 쇠로 주조했고 지방에서는 처음에는 자기, 혹은 와기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후에는 대나무나 혹은 나무로 만들어 서울 측우기의 규격에 맞게 통일을 기했다.

대(臺) 위에 측우기를 올려놓고 비를 받아 서운관원이 주척(周尺)으로 물의 양을 측정하도록 하였으며 그 강우량은 척·촌·분수까지 면밀하게 측정하게 하였다. 또한 강우량뿐만 아니라 강우 개시 일시와 그친 일시까지도 기록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세종의 우량 및 수위의 관측은 유럽보다는 약 200년, 일본보다는 280년을 앞선다. 독일인 헬만(G. Hellmann)이 1890년에 출판된 『Himmel und Erde』라는 잡지에 소개한 것을 보면 유럽에서 기기를 갖고 우량을 측정한 것은 1639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그해 6월 18일부 편지를 친구 갈릴레오(Galilei Galileo)에게 보낸 가운데 우수를 통에 받아 측정했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우리 나라에서는 측우기를 갖고 우량을 측정했고, 국내 각지의 우량분포를 계측한 것은 실로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유산은 그 동안의 전란, 사회적 불안정으로 원기(原器)라고 인정되는 것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세종 때의 측우기를 본떠서 영조 46년(1770년)에 제작된 측우기가 남아 있는 곳은 전국에 걸쳐 3군데가 있었는데 그 원위치를 보면 함경남도 관찰도(함흥), 경복궁 영추문내 원관상소(元觀象所), 대구 선화당 앞뜰이다. 이 측우기들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크기와 규격은 세종 24년(1442년)의 것과 동일하였다. 측우대는 높이 46cm, 폭 37cm로 직경 16cm, 깊이 4.3cm의 구멍이 파여져 있고 대석의 전면과 후면의 중앙에 각각 측우대라고 새겨 놓았다. 또 대석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정조 6년(1782년) 창덕궁 금문원 앞마당에 설치하고 비오기를 기다렸던 것인데 그 재료로 백색 대리석을 썼을 뿐 아니라 측우기 제작의 의의를 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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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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