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풍속과 풍향의 관측

농산물에 미치는 기상의 영향 중에서 강우량 다음으로 중요시된 것은 풍속과 풍향이었다. 이에 대하여 강희맹(1424∼1483)은 금양잡록에서 농가의 환으로 수해 다음으로 풍해가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나라는 지세로 보아 바다를 지나서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여 운우(雲雨)를 만들고 산을 거쳐오는 바람은 차서 농작물을 손상하며 풍해 중에서는 동풍에 의한 것이 많다고 했다.

바람이 바다를 거쳐 불어오는 것은 따뜻해서 쉽게 구름과 비가 되어 식물을 자라게 한다.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는 것은 차다. 그러므로 그것은 식물에 해를 끼친다. 영동 사람들이 농사철에 동풍이 불기를 바라고, 호서, 경기, 호남 사람들은 동풍을 싫어하고 서풍이 불기를 바란다. 이렇게 호악(好惡)을 서로 달리하는 까닭은 그 바람이 산을 넘어 불어오는 까닭이다.

비록 내용은 간결하지만 푄엔 현상을 파악하고 세운 이론으로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후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한 것으로 농업기상의 선구적인 이론의 하나라고 하겠다.

농작물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선의 기상학들은 풍향을 특히 정확하게 관측했는데 그것을 위하여 풍기죽, 즉 풍향계가 설치되었다. 풍향의 관측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종 때부터는 풍기죽을 풍기대에 꽂아놓고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써 풍향을 관측했다. 풍기대는 영조 46년(1770년)에 석대로 개량되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각각 설치되었고 그 유물들은 현존하고 있어 그러한 사실을 실증적으로 말하여 준다.

풍향은 방향으로 측정되어 24향으로써 표시되었다. 또 풍속은 그 강약에 따라 몇 단계로 구분되었는데 아마도 강우량의 경우처럼 8단계로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무가 뽑힐 정도의 바람은 대풍이라 불렀고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갈 정도의 바람은 가장 강한 것으로 폭풍이라 하고 대풍과 폭풍은 풍이(風異)로서 특히 기록되었다.

그러한 풍이의 관측기록은 신라에 24회, 고구려에 4회, 백제에 4회로 합계32회였고, 고려에는 '태조 15년(932) 5월 갑신 서경에 대풍이 불어 관사가 무너지고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공양왕 3년(1391년) 8월 병진 '전라 양광도에 대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는 기록에 이르기까지 359년간에 135회에 달하는 관측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은 조선에 이르러 오히려 격감되었는데 그것은 '태종 12년(1412년) 대풍이 있어 나무가 뽑혔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영조 15년(1739년) 6월 대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아갔는데, 바람은 충청도에서 일어나서 서변에 이르러 극심하였다'는 기록에 이르기까지 21회에 불과하다. 이 기록들을 분석하여 보면 고려의 것은 월일까지 날짜가 명기되어 있는데 비해서 조선의 것은 날짜가 명기되지 않은 것이 많고 기록 횟수가 적어 고려 때보다 풍속에 대하여 철저한 관측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자료관리 담당자

재난대응과
하민기 (051-888-2967)
최근 업데이트
2018-03-09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새창열림 아이콘"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