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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오페라 <다대첨사 윤흥신공> 작품명 공모 안내

첨부파일
내용

창작오페라 <다대첨사 윤흥신공> 작품명 공모 안내

  사하구 다대포 윤공단의 주인공 <다대첨사 윤흥신공>과 관련된 창작오페라의 

작품명을 아래와 같이 공모합니다. 우리지역의 역사적 인물인 윤흥신공의 업적을 

기리고 우리지역 주민들의 애향심 증대를 위하여 제작하는 본 오페라는 2017년 7월 을숙도문화회관 대공연장에서 공연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공모방법

  ▷ 접수기간 : 2016. 11. 10. ~ 11. 15

  ▷ 접 수 처 : 이메일 접수 (mile586@korea.kr)

                ①이름 ②연락처 ③제목 ④제목 선정 사유 

     ※ 오페라 윤흥신, 다대첨사 윤흥신, 윤흥신공, 윤흥신 이야기 등은 제외합니다.

 

 시놉시스 

  부산 사하구 윤공단에 놀러온 청춘남녀는 윤공단에 대해 궁금해하고 다대포 토박이 청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조선시대 권력의 정점 윤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을사사화로 노비가 된 윤흥신은 신분이 회복되자 다대첨사를 자원한다. 강직한 성품의 윤흥신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고 왜구의 첫 공격은 물리쳤으나 임진왜란으로 번진 다음날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알려지지 않은 첨사 윤흥신의 이러한 공적은 그 후 부임한 

다대부사 조엄의 3대에 걸친 노력 끝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응모자에게는

   - 응모자 중 60명을 추첨하여 

     을숙도문화회관의 12월 기획공연 공연 초대권 증정(1인2매)

     ※ 발표 : 11월 20일한 (개별 문자)  

윤흥신(尹興信)[?~1592] 

1582년(선조 15)는 진천 현감에 부임하였으나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1592년(선조 25)에 다대진 첨절제사로 임명되었고,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이튿날 다대진성을 공격하였다. 윤흥신은 동생 윤흥제(尹興梯)와 함께 민·관·군을 독려하며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윤흥신의 순절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윤흥신은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宣祖) 때 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이 지은 『조망록(繰亡錄)』의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다. “왜적이 성을 포위하자 힘껏 싸운 끝에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많은 수의 왜적이 쳐들어오자 군졸은 모두 도망쳤고, 윤흥신은 홀로 남아 온종일 활을 쏘다가 성이 함락되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조(仁祖) 때의 학자 신령(申靈)이 쓴 『재조 번방지(再造藩邦志)』에는 “도적이 병사를 나누어서 서평포·다대포를 함락시켰다.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껏 싸웠으나 피살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6월 25일 공포된 선무공신 녹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 1등 공신으로 올려졌다. 1765년(영조 41) 다대포진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다대포 객사 동쪽[현 부산유아교육진흥원]에 윤공단(尹公壇)을 조성하여 해마다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올렸다. 지금은 다대동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제향하고 있다. 1766년(영조 42) 송공단(宋公壇)에서, 1772년(영조 48)부터는 동래구 안락동에 있는 충렬사에서 제향하고 있다.

 

<출처:부산향토문화백과>

 

 

오페라 <윤흥신> 시놉시스

 

< 프롤로그 >

2017년 청년 다대와 여자 친구 사하가 어느 봄날 사하구의 윤공단으로 데이트를 왔다. 

윤공단이 무엇이냐는 사하에게 다대는 윤흥신 장군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하며 윤흥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1막 >

때는 조선시대!     

윤임은 을사사화에 얽혀 역적으로 몰리면서 일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어린 아들 흥신과 흥제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관노비가 된다. 운명의 잔인함을 원망하며 청년이 된 윤흥신은

우연히 양반가의 아가씨 신씨를 사모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아가씨 또한 윤흥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윤흥신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의도적으로 아가씨를 멀리하려 한다. 

그러던 중 집안의 억울함이 풀려 다시 양반의 지위를 찾게 되고 꿈에도 소원하던 신씨 아씨와 혼례를 올리고 진천군수가 되어 관직에 오르는 행운을 맞이한다. 

 

< 2막 >

하지만 청년시절을 노비로 보낸 윤흥신은 글을 몰라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유성룡의 도움으로 부산 다대진을 지키는 첨사가 되어 부산으로 가게 된 윤흥신은 온 힘을 다해 군사를 조련하고 성을 보수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왜구의 침범을 대비한다. 그러던 어느날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부산진의 성들을 함락시키며 다대진으로 함락시키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몰려온다.  

다대진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부산진이 함락되고 많은 장군들과 병사들이 순절했다는 소식에 동요하게 되고, 왜군의 기세를 도저히 당할 수 없으니 윤흥신 장군에게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고 말한다. 하지만 윤흥신은 “나에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라며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다대진을 끝까지 사수하다 전사할 것을 다짐한다. 이를 본 다대진의 군사들 또한 윤흥신, 윤흥제 형제와 함께 목숨을 걸고 다대진을 지킬 것을 결의한다. 

다음날 드디어 끝이 보이지 않는 대군을 이끌고 왜군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자, 윤흥신 장군은 끝까지 왜군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동생 윤흥제와 함께 장렬히 전사한다. 

 

 

< 에필로그 >

시간은 다시 현재 

그 후 다대부사 조엄과 조진관, 조인영 3대에 걸쳐 윤흥신을 기리기 위한 노력까지 들은 사하는 윤흥신 장군의 충절과 그 일을 기억하려는 후손의 노력에 감동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