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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자가 억측을 하고 있는가 ?

내용
-- 이 명박 정부에서 어느 통장( 부산대학교의 소재지인 부산 금정구 00 동의 김통장 )이
갑자기 폐암으로 죽었다. 당시 아들이 LG에 근무한다고 했다. LG의 회장은 구씨이고
아래의 글을 쓴 교수는 구교수이다. 제안자가 억측을 하고 있는가 ? --
.
.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하얼빈역의 총성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들은 것은 1909년 10월 중순이었다. 이토는 한국과 만주 몽골 지배를 놓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할 예정이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장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최재형의 딸 최올가 페트로브나는 당시를 이렇게 전한다.

“ 언젠가 민족 혁명가들 중 한명이 우리집에서 지냈다.
그를 안 인사(안중근)라고 불렀다. 그는 벽에 3명의 모습을 그려 놓고
저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현 러시아)에서 의병 전우 우덕순을
만나 “ 이토를 처단하자 ” 고 제안하자 우덕순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1909년 10. 21일 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이들은
22일 밤 하얼빈(현 중국)에 도착, 국민회 지부장 김성백의 집에 묵었다.
10. 23일 조도선을 합류시킨 안중근은 이발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어 대동공보 주필 이강(李剛)에게 거사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쓰고 즉석에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 때가 영웅을 짓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 천하를 굽어 봄에 어느 날에 대업을 마칠거나 / 동풍은 점점 차가워지나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

1909년 10. 24일 아침,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은 남행열차를 타고
지야이지스고(중국명 : 蔡家溝)역까지 갔다. 현장답사를 통해 이토의 동선을 확인한 안중근은 두사람을 그곳에 남겨두고 25일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열차가 먼저 도착하는 지야이지스고역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실패하면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거사한다는 2단계 작전이였다.
1909년 10.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예상대로 새벽 5시경 지야이지스고역에 정차했다. 수상한 한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러시아 헌병들이 우덕순 등이 묵고있는 구내매점을 봉쇄해 1차 거사는 실패했다. 안중근은 아침 7시경 추위로 얼어붙은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하얼빈역에는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검문은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대합실 찻집에서 작전을 구상했다. 9시경 열차가 도착했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자그마한 노인이 열차를 내려와 의장대를 사열하자 러시아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경례를 붙였다. 하얼빈 거주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 반자이(만세)”를 연호 했다.
‘ 저 놈이 이토다 ’ 안중근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움켜쥐고 도열한 러시아 병사들 뒤쪽에서 이토를 향해 걸어갔다. 두사람 거리는 불과 10여 보(步),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이토의 오른쪽 가슴을 겨냥해 세발을 쏘았다. 두 개의 총알은 가슴에 세 번째 총알은 복부에 박혔다. 이토의 허리가 꺽어지며 무너졌다.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안중근은 권총을 던지며 외쳤다.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한국 만세) ”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15분만에 절명했다.

구 태 훈 (성균관대 교수, 일본사 )

-- 2009. 10. 22(목), 조선일보, “ 제국의 황혼 ‘ 100년전 우리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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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듬해인 1910년 2. 14일 : 안중근 사형선고
* 1910년 3. 26일 : 안중근, 교수형으로 순국

* 이후 10년 후인 1919년. 1. 21,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죽음,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졌고 이는 곧 3. 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