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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에서 재현한 조선통신사 행렬/한·일 우호 민간외교 톡톡히 해

내용
시모노세키에서 재현한 조선통신사 행렬
- 한·일 우호 민간외교 톡톡히 해-

정 훈 교

도심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듯 조용한 이른 아침이다.
시작하는 이곳 첫 일과가 빠듯한 만큼 일찍이 잠자리를 털고 선상 갑판에 선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시모노세키항에서다.
이 항구에 당도한 선체는 출렁이는 바닷물을 어루만지면서 날이 훤히 밝기만을 기다린다.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찾은 바라다 보이는 일본 땅 시모노세키 도시의 느낌은 그때와는 전혀 달리 와 닿는다. 근래에 더욱 치달은 위안부 문제다 독도문제다 해서 첨예한 외교에 부닥쳐 있는 마당에 다름 아닌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이곳 시모노세키에서 닻을 올리려 무려 140여명이나 되는 부산 시민참가단이 곧 이 배에서 내려 한 걸음 한 걸음 일본 땅을 내디뎌야하는 그 때문인가.
하지만 이런 문화적 가치가 자기 나라에 소중했던 만큼 지난날 한국과 일본과의 수난에도 불구하고 결코 문화는 굴절되지 않고 공존해 왔다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할 것이다.
바로 우리는 여기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부산시와 시모노세키시와는 1976년 10월 공통된 항구도시로서 자매결연을 맺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산시가 참여하는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이 시모노세키에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우리가 참가하는 이번이 열한 번째이고 보면 두 자매도시가 예사로운 우정이 아니라고 본다.
때문에 한국을 대표하여 온 조선통신사 사절단 다시 말해 오늘의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참가단을 예부터 그렇게 맞이했듯 이곳 시 관리들이 곧 모습을 드러내 자기들의 말로 “오하요 고자이마스”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말을 건네올 것이다.
조선통신사란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사절이다. 여기의 통신이란 서로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이며 또한 부산시와 시모노세키시가 자매결연에 있다는 상식을 넓히는 계기가 된 데는 재현 행렬 명단에 들고서부터다.
갑판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는 동안 조선통신사가 일본 에도에 이르는 그 옛길을 탐방한 자료들을 근거로 지금의 나로서도 머리를 굴려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의 역사의 행적이자 한일문화교류의 장이었음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그때마다 대략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행렬로써 조선의 도읍지 한양에서 걸어서 부산항에 이르고 바다를 건너 첫 일본 땅 쓰시마를 밟아 시모노세키 시모가마기리 도모노우라 오사카 교토 오미하치만 히코네 오가키 나고야 아라이 시즈오카 하코네를 지나 도쿄에까지 장장 6개월이 걸린다니 요즘 사회에선 지구를 몇 수십 바퀴나 돌고도 남음이다.
철따라 수려한 산천을 벗 삼아 걷는 기쁨도 즐거움도 하루 이틀일 진데 하긴 쌓이는 고단함을 때때로 지나는 고장의 영주가 술과 노래로 덜어 줌으로써 달랠 수 있었다고 보아진다.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면 그게 곧 오늘의 일요일이자 휴일이었을 게다.
이 행렬엔 의술을 맡은 의원이 있었는데도 바다와 육지의 갈림 길, 돌아가려해도 갈 수 없는 절박함에 갇혀 오사카에서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중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맞았다는 그의 묘가 지금에도 오사카 지쿠린지에 남아있다고 하며 해상에서 배 침몰로 한꺼번에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불상사도 맞아야했다는 아픔에 내가 침울해지고 만다.
어디 이뿐인가 오가키에서 나고야로 가는 길에는 세 개의 큰 강을 건너야하는 장벽이, 아라이에는 건너려 해도 건널 수 없는 오이강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는 당시로써 어떤 슬기로 헤쳐 갔을까 궁금증을 더한다.
반면 조선통신사에게 내려진 특권으로 이 고행을 덜어줬을 수도 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수많은 길 가운데 오미하치만에 이르면 다른 나라의 사신들은 여기에서 거개 좌초에 부딪히고 마는데 이 지방 영주는 조선통신사에겐 길을 터줬다고 한다. 아라이 관문과 하코네 관문에 이르면 에도 방위를 위해 들고나는 총포와 아녀자 인질을 막고자 역시 엄격한 통제가 되었으나 조선통신사에게는 무사통과였다고 하니 여기에서 시원한 느낌의 한숨이 내 목줄기를 타고 내린다.
시원스러움은 이 뿐 아니다.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 영접을 위해 나고야의 큰 강 세 개를 두 해만에 다리를 놓는가하면 시즈오카에 있는 험준한 샷타고개 중턱을 끊는 난공사를 20여년 넘게 걸리는 대장정에 걸쳐 길을 냈다는 얘기에 나의 생각을 이렇게 자아내게 한다. 아마도 조선통신사 행렬이 죽음을 무릅쓰고 당도했다는 이 험준한 길들을 에도 막부에 건네자 이런 불편을 없애 드리겠다는 약속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자연적 걸림돌과는 달리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도모노우라, 우리나라 낙산사에 비견할 만큼 해안에 자리한 절경의 시즈오카, 맑은 물의 온천에다 오늘날 국제적 관광휴양지가 된 하코네호를 함께 따르는 문장가가 그려내 읊은 시가 조선 조정의 사행록에 빠짐없이 기록됐다는 것이다.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흔적이 일본에 많이도 남아있다는 탐방가들의 기록을 새겨도 본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조건에 있고 예부터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쓰시마에선 매년 8월이면 아리랑축제가, 바로 옆 시모노세키에서는 일본 본토 최초의 기항지로 이를 기념하고자 아카마 신궁 맞은편에 비를 세웠다. 더욱 한일 두 나라가 참여한 가운데 매년 8월에 재현되는 조선통신사 행렬, 초후박물관에서 조선통신사 고증을 살피는 자료들, 시모노세키를 지나 시모카마기리에 이르면 통신사 행렬 모습을 10분1로 축소한 모형을 전시하고 있고, 교토에 이르면 기증받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미술공예 및 전시물을 고려미술관에다가 쇼코쿠지엔 통신사 유물을 소장하였다.
다시 히코네에 닿으면 통신사의 객관인 소안지에 조선고관상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오가키에서 매년 열리는 축제에 통신사의 숨결을 담은 조센야마 수레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통신사가 이 지역에 전한 선진문화를 자기계발의 계기로 삼은 전형이라 한다. 나고야 소가쿠지엔 통신사의 행렬을 그린 그림과 병풍에다 또 묘젠지엔 조선통신사 역사 400주년 기념지를 간직하고 있다.
시즈오카엔 통신사의 박물관이라 불리는 세이켄지가 있다. 이외에 도모노우라에 있는 우시마도항구를 한 눈에 조망하는 혼렌지, 오미하치만의 니시혼간지 하치만 별원과 오미하치만 시립자료관, 시즈오카에 빼어난 경관의 세이켄지가 에도에 이르기까지 통신사가 머문 대표적 객관이다.
이렇게 종착지 에도, 현재의 도쿄에 이르기까지 조선 문화를 일본 곳곳에 심었음은 조선통신사의 또 다른 괄목이라 하겠다.
이것으로 조선통신사가 에도 막부와 서로 국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목적을 모두 이룬다.
한편 막부의 수장으로부터 환대를 받으면서 일정 기간을 보냈을 것이다.
막부의 간곡한 당부에 닛코를 보지 않고는 일본을 봤다 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움의 길에 들게 하는 것도 이런 차원이었을 게다.
이번 재현 행렬에 함께한 한 대학교수가 열두 차례 행렬에서 죽어간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려지지 않은 새 학술자료들을 현지를 찾아 발굴하고 있다는데 대해 그 기대가 커진다.
배를 내리자 시모노세키시 환영인사들과 악수로써 반가이 맞으며 조선통신사 재현행렬이 유네스코등재유산으로 한일공동 등재해야 한다는 염원을 담은 티셔츠를 서로가 입혀주는 것으로 순식간에 조선통신사 재현행렬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의 자갈치시장과 같은 카라토시장을 출발하여 시청 앞까지 이르는 구간에다 시모노세키경찰서에서 유메광장에 이르는 또 하나의 구간에서 일본무사를 선두로 정사를 가마로 맨 조선통신사 뒤를 따라 예술단과 어린이통신사까지 길게 잇는 행렬이 유네스코등재유산이랄 만큼 내용적으로 소중하고도 규모면에서 출중할 정도로 장관이다.
이 행렬 수장격인 정사역은 이해동 부산시의회 의장으로 원래 장구인지라 기품이 듬직했다. 수장을 따르는 예하의 몸짓도 덩달아 기세가 더해진 듯하다.
시모노세키 시민들은 연도에 발 디딤 틈도 없는 열광으로 꽉 메워 한·일간의 우호를 연상케 하는 함성으로 답했다. 여기엔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뿜어내는 열기만으로 가득했다. 30°C가 넘는 무더위에 통신사 정장에 땀방울이 몸을 적셔 흐르는 조선통신사 행렬에 몸을 부닥치면서 마실 물을 건네고 그것도 모자랐던지 부채로 부쳐주면서 따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그 손길에 그만 감명의 눈시울이고 말았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가깝다, 아주 가까운 이웃이다. 행렬을 따르던 그 노인네와 우리들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의 마음이었을 게 분명하다.
자매도시공원으로 이름한 여기에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우뚝하다.
내용인즉 ‘이 기념비는 약 400년 전(1607년) 일본에 많은 문물을 전한 조선통신사가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것을 기념한 것으로 당시 실제 상륙했던 부두가 있었던 지점에 건립되었습니다’ 적고 있다.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은 이 기념비에 헌화를 시작으로 앞서 행한 행렬의식을 거쳐 유메광장에 당도하여 정사가 낭독한 부산광역시장 친서와 시모노세키시장의 친서를 즉, 평화공존 및 공동번영 골자를 서로 교환하는 것으로 첫 순서 재현 행렬은 마쳐졌다.
이어 씨몰 팔레스에서 갖는 기대가 컸던 시모노세키시장이 베푸는 조선통신사 참가단 환영만찬장의 분위기가 다른 느낌이 든다.
통상 정부의 경호원으로 보이듯 자그마한 물체를 귀에 꽂은 복장 차림의 남자들이 연회장 입구에 듬성듬성 서 있는 게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환영만찬을 알리는 멘트에 이어 시모노세키시장의 환영사가 따르고 바로 조선통신사 정사역 이해동 의장의 답사가 진행됐다.
이어 소개되는 일본 측 내빈에서 의외의 아베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가 이 자리에 참석했음을 알게 됐다.
그제서야 앞서 그 복장의 남자들이 일본 정부의 경호원이란 걸 짐작케 했다.
아베 아키에 총리 부인은 인사말에서 “가까운 이웃은 정치만이 아니라 스포츠나 문화, 민간교류를 통해 더욱 가까워 질 수 있다“는 전제와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통해 양 나라의 우호관계가 진전되길 기대한다“고 .이해동 정사가 앞서 ”한국과 일본이 조선통신사 문화교류를 통한 미래를 열자는“ 언급에 이같이 답했다.
일본 총리 부인이 한일 문화교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처음이며 이 뿐 아니라 조선통신사 재현 행렬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한일 공동으로 등재가 이뤄져야 한다는 직접 언급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
‘무더위도 넘은 조선통신사 한·일 관계 물꼬 기대’ 언론 반응이 즉각 나온 것도 주목되는 하나다.
여기서 나로선 국가적 관례를 잘 모르지만 이 자리에서 느낀 점은 국가 원수의 영부인이라 해서 그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모습을 조금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뭇 우리와 다르지 않느냐고 입술을 자근자근해본다.
시모노세키 8월을 이틀간이나 더욱 달구는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과 동시에 펼치는 바칸마츠리 구경으로 사흘째를 맞는다.
낮 2시가 지나면 팔지 않아 맛볼 수 없다는 카라토시장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부산의 자갈치시장과 흡사한 인상은 “어서오이소” 노점 아지매가 뱉는 듯 그 의미의 말이 어찌 부산 아지매 말씨와 같을 수 있을까에 젖어 이리저리 구경삼아 돌다 맞닥뜨린 일행과 복어를 섬세하게 썰어서 얹은 부채모양 복어 한 저름씩을 시원한 아사히맥주와 번갈아 입안에 들이키고 보니 그 순간은 천하의 행복을 다 안은 듯했다. 왜냐면 옹기종기 장의자에 엉덩이를 틀고 앉은 모습이 그리 평온하기 이를 데 없어 보여서다.
칸몬대교를 옆으로 스쳐 높이 268미터나 되는 히로야마 전망대를 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망대가 안개에 휩싸여 그냥 걸음이고 말았다.
늦은 오후에 바칸마츠리의 하나인 헤이케소오도리 대회가 메인 도로를 완전 차단한 체 열리는 시각이 다가오자 길거리 인파가 파도물결을 능가할 만큼 빼곡했다.
이 대회는 바칸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대표적 행사이다. 시모노세키 공공기관과 여러 기업체 등 50여 단체와 6,000여 명의 인원이 각양각색의 의상으로 선을 보이는 장면 하나하나를 스마트폰에 담는데 여념이 없는 모두들이었다.
바칸 축제 명칭의 유래는 처음 축제 때 시민공모로써 정해졌고 ‘바칸’ 이름은 시모노세키의 옛 이름이었다한다.
여기에서 헤이케 오도리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안토쿠 천황이 8세이던 1185년에 권력 다툼에서 패전이 임박하자 황후는 적장에게 죽기보다 천황을 안고 물속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를 따르던 수많은 시종과 시녀가 함께 물속으로 빠져 들었다는 것이다.
이 물속에서 허우적거려야했던 아픔을 시모노세키 시민이 함께 나눈다는 뜻으로 바칸 축제 헤이케소오도리 대회에서 두 발짝 나아가고 한 발짝 물러서는 손과 발의 동작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번에 짬짬이 시모노세키 시가를 걷고 일본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자 코쿠라로 향했다.
일본 열도가 거미줄 철도로 이뤄진 실제를 감상도 하거니와 열차 창밖으로 스치는 자연을 벗 삼고자 함이었다. 코쿠라역은 JR보통열차와 신칸센열차가 교차하는 역이었다. 도보로 뒷골목을 먼저 살폈다. 우리나라와 요모조모 비교해 보면서 얻어지는 것도 많았다.
이제 우리는 부산으로 돌아갈 날이 되고 나흘째 오후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밤잠을 배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부산항에 이르는 선박에 올랐다.
146명 참가단 가운데 한 버스를 타고 움직이는 동안 벌써 친구가 된 우리만의 30명이 낸 아이디어는 이러했다. 일본에서 쓰고 남은 엔화 동전은 부산에 갖고 가봐야 절반의 가치에 불과하므로 그 돈을 다 모아 한 자리에 모여 송별연을 갖자고 한 것이 송별연에 그친 게 아니라 우리는 이번에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의 한 일원을 넘어 언론에서 짚었듯 무더위도 넘은 조선통신사 한·일 관계 물꼬 기대를 일궈낸 민간외교를 톡톡히 했다는 한 목소리가 밤 잠에 숙성 돼 앞으로도 끊임없는 돈독한 친구로서의 큰 교두보를 형성했다는 하나의 말이 부산항에 메아리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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