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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 컨꼬 미술 야아들은 미술평론가를 개 뒷구멍으로 알아요

내용
촌 컨꼬 미술 야아들은 미술평론가를 개 뒷구멍으로 알아요

출처:미래연구소 자료 3실
칼럼 : 연구소 소장 그리스 정

진짜 마패를 모르고 변 사또처럼 꼬대긴다.

미국 뉴욕거리에서 미술인의 1%를 제외하면 나머지 99%는 촌미술의 영역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프랑스 파리는 이태리 로마조각도 이제 촌+촌 = 미술인 즉 투촌미술이 되기가 너무 쉽다.
거기에서 95%정도는 촌+촌+촌= 쓰리이 촌 미술부류가 되고
서울에서의 미술도 1%를 제외하면 촌+촌+촌= 쓰리이 촌 미술이 되기 십상이다.
목구영이 포도청이다 보니 미술평론가의 97%는
좋은 게 좋다고 처남 좋고 매부 좋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실 미술세계란 아직도 밀림지대이고 늪지대가 될 수 있는 참 묘한 나라다.
장모 교수(영남대 미술대 한국화)의 ‘땅에서 놀자’ 전시 글을 쓴 같은 대학 출신의 모모 미술평론가의 글처럼 무슨 소설을 쓰고 있어. 정상적인 사고가 되려면 자신의 삶이 정당해야 한다.
소설은 앞과 뒤가 다른 동전의 양면으로 하나의 금화도 될 수 있지만 글은 미술평론 글은 허균의 ‘홍길동’ 소설 글이 되면 뛰어나고 좋은 글의 수준에서 밀려난다.
장모 교수(영남대 미술대 한국화)의 ‘땅에서 놀자’ 전시 글을 쓴 같은 대학 출신의 모모 미술평론가의 글을 보면 게오르그 짐멜 얘기가 왕청스럽게 인용되는데
차라리 100년 전에 스스로 죽은 고흐를 인용하지 그래. 인문학을 엄청 아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 수박 겉핥기로 알아서 미술평론 글을 써서 그렇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잘 통한다.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미술평론은 소설이 아니다. 기초경험이 바탕될 때 올바른 미술평론이 나온다.
한국에서 언어에 내가낸데하는 진중권(교수.미학자.서울대 미학과.미숲령론가)만 하더래도 자신의 미술지평에 대해 한계가 있음을 솔직히 고변한 적이 있다.
과성에게 미술평론의 길이 목구영이 포도청으로 하지 않는다.
과성은 Meta 미술비평가이다.
일반 미술평론가보다는 한 수 높다고함은 뭐한 일이지만 또 그렇지 않다는 것도 그렇지 않다.

미술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두더지가 땅을 파고 두 다리를 가지고 있는만치 새처럼 날아서 아름다운 것은 인문학의 숲에 유희하기 거의 99%가 힘들기 때문이다.
미술을 한다는 자체는 참 고상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의 이치와는 대부분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 즉 양면성이 M-0bius strip 띠처럼 힘들기 때문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이 미켈란젤로처럼 그 시대를 넘어서기는 거의 불가능이다.
현대사회는 신들도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대로 와 있다.
인생은 누구나 한 시절은 멸치의 운명에 처한다.
멸치는 네네 종류가 있다.
햇 멸치 묵은 멸치 잔 멸치 굵은 멸치다.
죽었다 살아나서 멍하니 한참 지나서 알 것 같다.
인생은 장난이 아니다를
인생은 꼬대기 일이 아니다.
왕유의 꿀의 동산에 철없던 시절은 벌처럼 살다 땅으로 내려온다면 몰라도
남의 제사에 감 나라 고구마 나라 할 시간이 없고 또 그럴 일도 아니다.

천상의 말이 미술작품이고 천상의 농담을 할 수 있는 자가 미술평론가라 함은 사실이지만 인간 모두에게 소통되는 건 아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 암컷은 연간 100만개 이상의 씨앗을 만들어 땅에 내리지만 그 중에서 한 알의 씨앗이 밀알이 썩어 밀이 되듯 하기 어렵다.
천상의 말이 미술작품이고 천상의 농담을 할 수 있는 자가 미술평론가라 함은 사실이지만 인간 모두에게 소통되는 건 아니다.

촌미술 야아들은 미술평론가를 개 뒷구멍으로 알아요.
원래 우수한 개는 짖는 것도 형편 봐가면서 짖는다는 말이 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The Road Not Taken’이 떠오른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멍하게 서서 오랫동안 한 길을 궁금해하며 그 끝을 보려했습니다.

그리고는 똑같은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그 길은 어설프지 않은 풀이 더 있고 사람의 자취가 적은 것 같아
길이 더 길 것같은 예감이었답니다.
그 길을 감으로해서 역시 비슷할 수 있겠지만

그 날 아침의 두 길에는
어디에도 낙엽을 밟은 발자욱 느낌이 없었습니다.
나는 다음날 가지 않은 길을 가리라 맘먹었습니다.
길은 그르하듯이 갈수록 끝이 없으므로
나실 사실 다시 돌아온다는 불가능을 믿으며

인생은 그러하지요. 훗날 아주 먼 노인의 날에
그때를 말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여 예까지 왔다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나이고
나에겐 또 다른 나의 꿈은 있었다고.

미술을 함은 천상의 언어를 배우는 길이다.
파인아트의 언어는 미술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The Road Not Taken처럼 시각디자인 제품디자인 공예디자인 인테리어 중에서 과성처럼 Meta언어의 수순이다.
사칙연산(+ - . .)한다고 수학 다 한 줄 아나?
“선배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왜 결혼 안했어요?” 물을 때 그 답변을 얻는 수 있다.
파인아트의 언어는 미술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The Road Not Taken처럼 시각디자인 제품디자인 공예디자인 인테리어 중에서 과성처럼 Meta언어의 수순이다.
그래서 미술에 입구를 넘어 엄청 갔다고 생각해도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 되기 십상이다.
과성의 동네에 호롱불이 전기불로 왔던 그 시대보다 문화는 300년인 세배는 더 앞서서 등대 불처럼 찬란한 야경을 화려하게 표현하였던 고흐.
인생은 양면성을 가져야 한다.
잘난 것과 현실은 조금 차이날 수 있는 동전의 양면이다.

천상의 말이 미술작품이고 천상의 농담을 할 수 있는 자가 미술평론가라 한다.

촌미술 야아들은 미술평론가를 개 뒷구멍으로 알아요.
흔히 개는 게와 개로 구분한다.
휴게실 할 때에 계를 쓰지 않고 게를 쓰는 이유는 계획을 잡지 말라는 거다.
게걸음이라고. 게는 옆으로 갈 수 있어서 아름답다. 멍멍의 짖음은 늘 네 가지 속에 존재한다.
짖고 물고 꼬리치고 핥는 그 생각속에서다.
멍멍의 시각은 나쁘다.
휴식은 휴식이다. 휴식시간에 교활한 수작은 천하다는 것이다.
사람을 보는 순간 계획이 앞서는 인간은 멍멍을 벗어날 수가 없다.
아무리 눈이 좋은 개라도 33m보다 가까이는 흐리게 보인단다. 그래서 바로 눈앞의 장난감을 못 찾아 주인은 생각지도 못한 개의 행동에 너무 재미있어 배꼽잡는 말이 있질 않는가.천상의 소리라서 그렇다. 천상의 향으로 착각되면 마약견처럼 하나도 재미없다. 공은 공 사는 사이기 때문이다.
시각 다자인 적 사고를 Fine art로 옮겨 심거나 접을 하고 종 번식을 하여 우수한 인간영혼을 만들려면 짖고 물고 꼬리치고 핥는 그 생각을 버릴 줄 아는 당당함이 무엇보다 필요충분조건이다.
진주가 아닌 거의 전부의 보석은 다듬어야 빛과 영혼이 깃들어서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잠을자듯이 Fine art의 세계는 천상의 말이 되는 수가 있다. 그리고 천상의 농담을 할 수 있는 자가 미술평론가로 가끔 탄생이 된다.
다이아몬드 원석은 80%를 흠집내어 갈아서 없애야 보석이 되듯이
미술의 본질은 천상의 언어다.

흔히 개는 게와 개로 구분한다.
휴게실 할 때에 계를 쓰지 않고 게를 쓰는 이유는 계획을 잡지 말라는 거다.
게걸음이라고. 게는 옆으로 갈 수 있어서 아름답다. 멍멍의 짖음은 늘 네 가지 속에 존재한다.
짖고 물고 꼬리치고 핥는 그 생각 속에서다.
과성은 오랫동안 게걸음으로 살아서 한 시절에 날고 기어서 출세할 줄로 알고 믿었던 주위에 아프게 했다.
망하려고 망한 건 아니지만 그 잘난 석가님께서 호의호식을 버리고 무전여행의 길이 육년이듯이 그저 과공만 잘 나서 30평생을 망하는데 투자한 것 같다.
숨 두 번만 쉬지 않으면 망하는데 비틀비틀 망하는데 30년 걸렸으니 역시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들어 준 천륜이라는 것은 너무 고맙다.

소인은 돼지띠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별명은 청개구리였다. 동네 아이들이 너무 호의호식하는 천수(天壽-아명)가 밉기는 밉고 별명을 지을 게 없어 천을 청으로 했다.
상전이 배부르면 종 배고픈 줄 모른다 듯이 상당히 현명하면서 많이 현실에 뒤쳐졌다.
나는 개의 뛰어난 현실성을 갖고 싶은데 늘 돼지 같은 사고에 빠지는 것 같다. 그런데 때로는 나도 모르게 멧돼지 같은 민첩성도 있다. 어릴 적에는 벽을 타고 다닌다 할 정도로 운동신경이 무척 발달하였음이 사실이다.
인간은 눈의 시대에서 힘의 시대로 오고 가슴의 시대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학이 너무 아름답고 숭고하고 향기나게 절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