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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이문열 과린은 한 시절 한솥밥을 먹는 사이정도가 되었다.

내용
문호 이문열 과린은 한 시절 한솥밥을 먹는 사이정도가 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소설가 김주영과 이문열은 헬리콥터를 타고 함께 독도를 최근에 다녀옴으로 한국문화의 실세임을 tv와 메스컴을 등에 시골마다 일파만파로 전파되었었다.
대통령 이명박이 앞이냐? 소설가 이문열이 앞이냐? 라고 서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영역이 다르면서 대중의 뜨거운 조명을 받는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흔히 무식자나 골시님이 그러니 “남이 알아줘야 하지머”도 상당히 중요하다.
특수남이 알아줘도 대책이 없을 때가 많다.
한국 화단 아니 세계 화단도 장식해 들어가던 걸레스님으로 알려진 중광은 어쩌면 너무 힘들었지만 한국미술에서 한 획을 그은 건 사실이다.
며칠 전에 현대회랑에서 존배와 중광스님의 전시, 학고재에서 강요배의 전시를 참관한 적이 있었다.
대구화단이 자랑해온 구상미술은 이제 트릭미술이라 불러야 할 수준이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인간은 외모를 확실히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그 외모 속에는 내면의 세계인 가슴의 세계도 함께 자라나는 것이다.
망가짐도 진리임은 사실이다. 걸레스님으로 알려져 살아온 중광의 아픔을 보노라면 차라리 망가짐이 진리다하는 생각이 든다.
교만하는 고마 천하고 무식하기 이를 없게되는 미술인이 신문에 칼럼을 쓴다. 주위에서 온갖 사람들이 다 거들어주었다 해도 최근 전국적으로 가뜩이나 가짜 석사 박사 학위 노란으로 떠들썩한 가운데 옳고 그름은 명백하게 밝혀질 수밖에 없다.
세상 귀신도 모르게 한다하지만 그건 말도 되지 않은 게 현대과학의 발달이다.
비둘기호, 무궁화호.새마을호도 KTX가 청료열차처럼 나타남으로 하여 느림보 열차가 되고 말았는 시대다.
달팽이나 거북이의 삶을 토끼나 호랑이보다 더 좋은 게 볼 사람도 많다.
21C가 오면서 구상미술은 트릭미술이라고 해야 할 때가 왔다. 구상미술은 순수하게 보면 무지무지하게 순수할 수 있지만 이미 그건 고전미술 중에서도 골동골동품에 해당되는 일이다.
물론 현대미술을 한다하지만 거기도 교만하면 무지가 철철 넘쳐 폐수가 되기 장난인 곳이 미술이다.


이문열과 과린.
이문열은 자타는 물론 그 어디에도 속으로 내가 낸데 할 수 있는 소설가다. 한순간 너무 억울한 설움을 받은 것은 민족문학작가의 창립될 당시 처음에 작가이사로 선임되었다가 느닷없이 이문열의 이름은 제명시켜 버린 일이 있었다.
먼저 겪어보는 슬픔과 아픔은 후일에 기쁨으로 다가섬을 많은 불세출의 영웅에서 볼 수 있다.
이문열의 향리는 경북 고운 석보면 두들마을이라면, 과린은 역시 경북 고은 도에서 태어나 청년을 올 때까지 살았다 그래서 향리가 같으니 이문열이 과린을 키운 것으로 착각하는 예도 있다.
사실 ‘팔은 10리는 갈 수 있어도 5’리는 가지 못간다’처럼, 가까우면 선후배로 좋아지기 힘든 게 창작으로의 길이다.
과린은 1983년 타올라라 참문학 2인집과 1993년 문학의 황제 예술의 황제 단행본
2009년 꽃이 피는 나무와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사는 법
2009년 꽃이 피는 나무와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사는 법 단행본이 나올 때까지 이문호에게 시 한편, 단편소설 한편 올리고 감사를 받은 적이 없다.
과린도 참 재주가 있지. 단편소설 하나라도 상소나 알현하지 않고 한솥밥을 먹는 사이까지 간 것을 보면.
인생은 역시 비즈니스의 수준이 인격의 수준과 동일함이 거의다.

과린이 문호 이문열을 아는가? 이문열이 과린을 아는가?

두 개의 질문이면서 하나의 질문이다. 토끼는 입구가 세 개라는 말이 있다 즉 출구도 세 개라는 뜻이다.
모든 종교는 환생을 원칙으로 한다. 유교가 한생의 문을 내지 않아 종교가 아니라는 의견이 분분함도 그런 내력이 있다.
즉 내세와 외세가 구분된다. 동양문화의 한국은 불교문화가 버팀목으로 오래도록 작용하고 지금도 큰 힘으로 ‘수양산그늘이 강동 60 리를 간다’듯이 버팀목이 되고 있다.

소설가 이문열이 날고기든 시절에 과린도 혼자 날고 기었다. 다만 ‘남이 알아 줘야하지 머’에서 진정한 승자요 대중의 승자는 이문열이 너무 당연했다.
이문열이 한참이나 날고 기던 시절에 과린도 과학을 꿈꾸는 자들의 NASA같은 존재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금서를 살포하며, 한국대학지식인의 우상으로 있을 때이니 ‘남이 알아 줘야하지 머’에서 여기의 남은 아픔속의 살아가는 민초정도였으니 과린은 정말 잘난 시대였다.
서울대학교 등에서 ‘현장에 발을 디딘 지성인’으로 포장될 만큼 지식과 정의의 용기에 분기충전하는 대학지식층에 선각자였으니 사실 쪼가 미안하게도 이문열 선배와 또 다른 면모가 시골아닌 중심에 있었음이 사실이다.
80년대 중반에 소설가 이문열이 대구 대명동 계명대에 강연을 왔었다. 멀리서 처음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때에 참 순수한 아름다움이 풋풋했다.

소설가 이문열이 아니라면 알리도 없겠지만, 2000년에 들어 대구에서 ‘보리회’ 총회 겸 모임이 있었다. 연사로 들린 이문열과 처음 대화 몇 마디를 하게 되었고, “창비에서 문화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되는 그 계기로 이문호를 만날 수가 있었다.
이문호가 과린의 만남에 펑크를 내지 않은 것은 과린에게 ‘창비’라는 얼추 마패가 제법 위용이 있었던 것 같다.
창비과 과린은 주종관계도 정주 관계도 전혀 아니다. 또 창비가 그러한 데가 아니다.
과린이 창비와 문학작품으로 줄을 댄 것도 아니다.
1980년대의 그 시대는 민족운동의 시대였다. 오늘의 한국이 세계속에 우뚝 선 이유도 과린은 1980년대의 문화적 위용의 단단함과 충만함이라 해석한다.
미술인회의에서 좀 모자란 인간이 “이문열과 고향이 같아서 아는 것 같다”했는데 물론 그러할 수도 있다.
‘군중 속에 고독’이란 말이 있듯이, 문학을 한다면 이문호는 더더욱 가까이 마주치기 싫은 게 동향에서 서푼어치 문학한다고 알려고 할 때 가장 난감할 것은 뻔하다.
얼굴 안다고 돈 빌려달라는 것과 같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그러하다.
과거에 신문을 보다가 이런 기사를 읽었다.
시골의 한 사내가 사업에 성공하여 엄청 부자가 되었던 모양이다. 고향 후배가 연락을 몇 번하게 되고 술도 한 잔씩 나누다가 어느 날 집으로 초대를 했던 모양이야. 그런 어느 날 돈이 궁한 후배는 고향 선배의 집으로 들어가 돈을 훔치다가 깨어나 반항하는 선배를 그만 넥스넥스한 일이 신문에 났었다.
안다는 거! 웃기지 마.
고향 때문에 안다는 거. 문학이 무슨 꿀꿀이 죽이고 멍멍이 짖는 거쯤으로 아는거니.
말도 되질 않아.
이문호가 무슨 코흘리개니?
한국역사에서 내로라하는 소설가야.
한 시절에 심지어 정당에서 서울 국회의원 후보공천을 주겠다하고, 시울시장 출마에도 밀어주겠다할 수준정도야.

과린은 이문호와 만남을 넘어, 알현도 되는데 단 한 번도 글 한줄 봐 달라고 한 적이 없을 만큼 문학으로 만나 뵐 수 있는 위치는 전혀 아니었어.

문학의 황제 예술의 황제-제 1권 그 꿈꾸는 슬픔을 출판하고 염무웅 교수를 영남대에 찾아뵈었고 책을 바쳤어.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찾아뵈었어.
“옹이가 너무 많아” 그 말은 문학의 황제 예술의 황제 에 대한 아주 짤막한 소감이었어. 그 속에 모든 게 담겼으니까.
보통 현대사회에서 평범한 시집이나 미술인의 팜프렛을 ‘찌라시’라 하는 것은 그 말 속에 모든 게 다 포함되어 있다는 거야.
어딘데. 한국문학의 살아있는 대부인 염무웅(영남대 교명:염홍경)이 과린의 책을 20년 전이나 시간에 읽었다는 것은 그리고 반대편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다.
지도 교수가 아니라면 어디 감히인데.

조선시대에는 흔히 여러 왕자들의 형제 중에서 한 분이 용상에 오르게 되면 흔히 중이 되어 몸을 피했어. 즉 살 길을 찾아 피란할 수밖에 없는 게 때로 인생일 수 있어.
산다는 거 쉬운 게 아니니까.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나, 임금에 까지 오르나 방안에 갇혀 불기운에 죽은 단종의 역사처럼 그리고 중국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너무 아픈 삶의 처절한 인생처럼 산다는 거 정말 말도 못해.

과린은 셰일가스 수준 정도로 별로 경제적 가치의 효용성이 부족하였고 폐수와 멸치 투성이속에서 목숨난 제대로 부지하고 가고자 한 길을 간 것만 해도 너무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셰일가스는 오래도록 각광받지 못했다.
세일가스는 오랜 세월을 두고 모래와 진흙에 쌓여 단단하게 굳은 탄화수소다. 퇴적암(셰일) 층에 매장된 것으로 채굴기술의 발달로 지난해부터 생산량이 늘고 있다.

국내업체들은 세일가스 도입에 매우 신중하다. 미국 중국 등이 셰일가스를 대량으로 수출하게 되면 중동의 석유수출기구(opec)는 유가를 내리고 되고 국내는 솔직히 긍적적 효과도 있지만, 원유를 들여와 수출하는 국내 업체들은 참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싸게 들여와 싸게 판매되니 정제마진이 너무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LPG연료를 쓰는 자동차가 셰일가스로 대처하면 휘발유 차는 자연 수요가 줄 수밖에 없다.
셰일가스 생산이 본격화되면 나프타분해센터는 위축되겠지만 대신 글로 생산되는 프로필린계, 부타디엔계, 방향족 석유화학제품 등의 경쟁력을 커질 것이다.

과린은 대중들에게 ‘셰일가스’처럼 하등 쓸모없는 사고로 매장될 뻔도 했지.

(여기 글들은 자료 글을 정리해가는 글이니 초기단계로 보면 좋겠다. 과일로 말하면 풋풋하게 열린 시기 정도로 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