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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데 30년의 길을 해멧다. 숨 두번만 쉬지 않으면 망하는데

내용
■ 160인 비주얼 디자인관련 대학교수의 평가 작업이 끝났다. 미술연구소 이스탄불 소장 그리스 정

대전엑스포 (1993년) 기념 / 우주혼일상원전/ 미술연구소 이스탄불 소장 그리스 정

그리스 정의 아득한 시절의 올총망총의 글을 옮기다.


***참조상황 : 솔직히 이 글은 17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세월 ktx처럼 순간순간 빠르게 다가오고 멀어지는 세월.
강산이 강산으로 변한 시기라 고흐의 그림도 고전이 되는 시대다. 글의 두서가 부족할 수도 있고, 과공만 잘난체하는 필력이 될 수 있으니 보시는 분들이 너그럽게 이헤헤하시며 탐독하면 글로 필자는 감사히 고개를 숙임은 예라 사료된다.
사실 이따위 글이나 쓰고 있었느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다행히 죽음까지가는 망함에서 다시 돌아왔음은 다 하상의 너그러움을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미술멍멍의 짖음에 메아리로 줄 수 있음도 다 하상의 크나큰 은덕이다.
멍멍은 네 가지를 잘 한다.
짖고 즉 물어뜯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
닥치는 대로 물고
꼬리치고
핥고.
순딩이가 좋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짖는 게 없고 싸는 게 없어서다.
지식거식증에 걸려서 ‘내 나이가 얼만데 딱 사랑하기 좋은 나인데’하는 지식의 오만함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지 못하여 살이 많이 찐 것과 같다.
예술가인 특히 미술가로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지식거식증은 몸이 비대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는 사실 참 아름답고 훈훈하고 서로 배려가 따뜻한 사회다.
거리에서 ‘회장님’하고 부르면 열에 아홉은 혹시 나를 부르는가하고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본다는 세상.
자신의 작품과 말이 ‘작가’라는 탐스런 과일이 되어 쇼 윈도우를 장식하고 싶은 것도 삶의 욕망됨을 과성도 싫어하지 않는다.
과공이 천지내락의 생사를 모르고 자가용을 처음 몰던 이십대 중반의 1980년대는 자가용이 ktx열차만큼 드문드문 보이던 시절이다.
말 타면 종두고 싶다고. 사실 종 있으니 말 타고 싶어서일까? 요즘 흔히 회장님 비슷한 문인으로서 작가됨은 조선시대의 마패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시골에서 안동역의 엄청 큰 2층 건물을 보고 허덕 놀랐다는 동창생들의 추억담의 그 시절.
초등4학년에 때에 시인 조지훈의 여동생 조명원 미인처녀 선생님으로부터 글짓기를 전문교육 받아 글짓기 대회에 출전하고, 햇병아리 고교시절 1학년 때에 한국일보 장준하 사장상(시 부분)을 획득하고, ‘사랑의 수기’ 모집에 원고지 1000매로 글쓰기의 길을 열었던 과공이고 보면 교만하기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했을 성 싶다.
누구나 회장인 현대사회에서 현대의 회장, 삼성의 회장에 맞먹는다는 자만심은 아주 부드럽고 좋은 일일 수 있다.
생명의 싹이란 다 고귀하듯이, 인간의 창작의욕은 한없이 아름다운 건 사실이다. 반대급부가 더 좋을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 가령 달이 온통 밀립지대이고 온갖 파충류가 득실거린다면 지구인에게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여기서 개발의 방법론을 하늘에서 승인받을 수밖에 없다.
죽음의 방법론을 받아들인다면.
창작의 정신은 평등을 위하는 초석이 되어야지 교만의 씨앗이 되어서는 안 된다를 새삼 느낀다.
인류의 어둠속에서 감성과 이성에 영혼을 등불을 밝혀준 미술의 온도는 차마 말도 못하개ㅔ 고마운 일이다.




목차

■ 강병돈(홍익대 도안과 졸업. 용인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강명옥(호성여대 대학원 졸.효성여대 시디과 교수)
■ 광윤성(홍대 응미과 졸, 경기대 산디과 교수)
■고문창(홍익대 도안과 졸, 순천공전 산디과 교수)
■구환영(홍대 산디과 졸, 서울예전 시가디자인 교수)
■권기덕 ( 홍대 응미과 원 졸, 경북대 미대교수)
■권상구(신일전문대교수) ■권용태(홍대 도안과 졸, 상지전문대 산디과 교수) ■김금재(홍익대 산디과 졸, 유한전문대학 시디과 교수)
■김기한 계명대 교육대학원 졸 ,계명대 시디 교수) ■ 김덕자(홍익대 응미과 졸, 대유공전 교수)
■김병옥(원광대 응미과 졸. 홍대산디과 원 졸, 군산학교 산디과 교수)
■김상락 (중앙대 동아대원 졸업, 단국대 산미과 교수)
■김석봉(홍대 산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광주대학교 산디과 교수)
■김승렬/ 원광대 응미과 원 졸순천공전산디과 교수)
■김용우(홍익대 미대 졸, 대학원 졸. 서울 보건전문대 교수)
■김유택(경성대 응미과 및 동대학원 졸, 동의공전 공디과 겸임.)
■김윤수 (홍대미대 졸.계명대교육대학원 졸.부산대미술학과 교수)
■김은풍(서울대 응미과 한양대 응미과 졸. 청주여자사범대 교수 ) ■김인걸 (홍대 및 동 대항원 졸,원광대 미대교수) ■김일환(부산공업대학교 산디과 졸. 경성대 산디원 졸. 경남 전문대 강사)
■김재훈(홍대음미과 졸, 동대학 원수료. 홍익대 강사)
■김종호(홍대 공예학부 도안과 졸.호남대학교 산디과)
■김태중(홍대 미대 및 동 산미원 졸. 경성대 응미과 교수)
■김학성(홍익대 도안과 동 산미원 졸. 산업디자인전 대통령상 수상, 숙명여대 산디과 교수)
■김홍주(중앙대 공예과 졸. 동대학원 시각디자인과 졸. 기전여전산디과 교수)
■남금우 (계명대 미대 동 대학원 졸, 계대 응미과 교수)
■남용현(중아대 시디과 졸.동대학 신방과원 졸업. 강원대 산디과 교수)
■문수근( 홍익대 공예학부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 서울산업대학교 시디과 교수)
■문철(홍익대 미술대학 동대학원 졸, 경원대 시디과 교수)
■민병일 (홍대 미대 졸. 동대 산디원 졸)부산공전 산디과 교수)
■박선의(홍익대 미대학장 역임, 홍익대 미대교수)
■박숙희(홍대 미대 및 동광고디자인 대학원 졸. 안양 전문대 교수)
■박일재( 조선대 응미과 졸. 홍익대 원 졸업, 조선대 산디과 교수)
■박재갑(홍익대 산디과 졸. 부산 여대 산디과 교수) ■방재기 (홍대 응미과 졸. 단국대 산디과 교수)
■백철(중앙대 예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배제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봉상균(서울대학 응미과 졸. 미 시라큐스 산디원 수료, 효성여대 교수. 서울 산업대학교 시디과 교수
■서은주(부산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 양산전문대 산디과 교수)
■손영환(조선대학 음미과 졸.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 목포대학교 교수)
■송진희 (원광대 응미과 졸. 중앙대 신방과대학원 PR광고전공 졸업. 독 일 뮌스터 국립미술대학 졸업. 호남대학교 교수)
■심효섭(효대 시디 전공. 동 산미대학원 졸. 동서공과 대학교수)
■양학철(홍대 미대 및 동대학원 시디 전공. 원광대학교 교수)
■어양우(홍익대 졸. 서일전문대 교수)
■엄기완(홍익대 도안과 동 산미대학원 졸. 부산여자 대학교 산미과 교수)
■여훈구(홍익대 및 동 대학원 시디과 졸. 경남 전문대 산디과 교수)
■오근재(홍익대 광고디자인과 교수)
■오정길(홍익대 도안과 및 산업미술원 졸. 목원대학교 산미과 교수)
■류재국(서울대학교 응미과 졸, 중앙대 산디과 교수)
■육영란(Academy of Art College 졸업-일러스트레이션 전공. 미국센프란시스코 동대학원 석사졸업. 경인여전 교수)
■윤병규(홍익대 도안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광대 응미과 교수. 단국대 시디과 교수) ■ 윤수근(동래여전 교수)
■이관형(홍대 응미과 졸. 동대학원 시디 전공. 광주대학교 산디과 교수)
■이극(한양대 사범대 응미과 졸.계명대 교육대학원 졸. 경원전문대 상디 교수)
■ 이명호(홍익대 도안과 졸. 동 산미원 졸. 경주전문대 교수)
■이명호(강원대 미교과 졸. 홍익대 산미원 졸. 강원대 미교과 교수)
■이병천(홍익대 도안과 졸. 한양대 응미과원 졸. 한양여전 인테리어 교수)
■이봉섭(홍익대 동 산미원 졸업, 영남대 산디과 교수)
■이상복(여)이화여대 섬유예술과 졸업, 한양대 응미과 원 졸업. 단국대 시디과 교수)
■이인자( 홍익대 미대 및 동대학원 졸, 한양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경기대 산디과 교수)
■이재익(하양대 응미과 졸,서울대학교 환경디자인 졸. 한양대 이학박사,부천전문대 교수)
■이재희(홍익대 및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 공주대학교 미교과 교수)
■이정호(계명대 응미과 졸. 동국대 교육대학원 졸. 경원전문대 상대과 교수)
■이호명(홍익대 및 동 산디원졸, 인전전문대 공예과 교수) ■임경호(영남대 응미과 졸, 홍익대 산미원 졸. 영진전문대 산디과 교수)
■임창윤(홍대 도안과 및 동 산미원졸업. 서울예전 시디과 교수)
■임춘택(홍대 응미과 및 동 산미원 졸. 건국대 산디과 교수)
■장권봉(서울대학교 응미과 졸, 경희대학교 대학원 졸, 인천대학교 교수)
■장범순(홍익대 및 동 산미대학원 졸. 동명전문대 시디과 교수)
■장병석(홍익대 산디 졸. 효성여대 시디과 교수)
■정성환(홍익대 응미 졸 및 동 산미원 졸. 전북대 산디과 교수)
■정수아(서울대 산디과 졸 및 동대학원 졸. 오산전문대 산디과 교수)
■정신공(홍익대 미대 졸. 성균관대학교 산디과 교수)
■정호기 (계명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계명전문대 교수)
■정희종(한양대 응미과 및 동대학원 졸. 한양여전 산디과 교수)
■ 조무광(홍익대 시디 및 동 산미원 졸. 부산여전 산디 교수)
■조태병(서울대 미대 조소과 졸, 일본 쯔구바대학 종합조형원 졸. )
■주창현(홍익대 미대 동 대학원 시디과 졸, 안양전문대 시디과 교수)
■최경석(원광대 동 대학원 졸. 원광 보건대 강사)
■최동신(서울대 음미과, 홍익대 대학원 졸. 홍익대 시디과 교수)
■최병훈(홍일대 미대 졸, 단국대 대학원 졸. 숭의여전 교수)
■최영숙(효대 생미과 졸. 홍익대 원 졸업. 수원전문대시디과 교수)
■최용천(홍익대 응미과 및 산미원졸, 서울예전 시디과 교수)
■최우석(동아대 산디 및 동 대학원 졸. 성심외국어전문대 광고과 교수) ■최인수(개인전 2회. 포항 선린전문대 상디과 교수)
■최호천(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시디과 졸. 유한전문대 시디과 교수)
■한백진(홍익대 및 동대하원 졸. 단국대 산디과 교수)
■한욱현(홍대 미대 및 동 산업 미술원 졸. 숭의여전 교수)
■한창규(원광대 응미과 졸. 단국대 대학원 응미과 졸. 전북 산업대 산디과 교수)
■허진영(동아대 대학원 졸. 동명전문대 시디과 교수)

위의 작자(作者)들은 필자가 논한 현주소이다. 물론 전부가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고 더러는 박사과정을 수료하기도 하여 작금에 대학의 교수로 있으나 대전 엑스포 93년 우주혼일상원전에 원체 엉터리를 대부분 작품과 글을 낸 관계로 그에 대한 무지를 필자는 그들에게 묻는다.

대전엑스포 93기념전으로 / 우주혼일상원전/ 이 열리게 되었다.

일원상디자인초대전 103인, 일원상판화전초대 38인, 일원상조각 공예전 초대 39인으로 무려 180명의 내로라하는 착각미술인들이 참여하여 / 우주혼일상원전/ 을 개최하게 되었다. 원광대학교가 주축이 되었으니 그 제목이나 참여자들의 면면을 보아도 아하! 이건 예술이라고 보기보다는 예술에 대한 교만의 응석으로 자기 과시나 철없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볼만 하다. 미술에서 회화가 빠졌다는 것은 안고 없는 찐빵이 아닐 수 없다.

미술에서 회화가 빠졌다는 것은 안고 없는 찐빵이 아닐 수 없다.

장소는 대전시민회관이며 초대일시는 1993년 10월19일이니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무려 180명의 디자인과 공예인들이 우주를 논한다고 하니 얼마나 재미난 일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대학의 철밥통 교수들이니 무슨 말을 해도 된다는 사고를 가졌다본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180명의 별로 잘난 것도 없는 대학의 교수라는 자들이 머리에 ×만 가득한지는 몰라도 전부가 우주를 한마디씩 논한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원이 갖는 우주에 대한 신ㅇ비의 접근은 아주 순수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으나 일명 시각디자인에서 내가 낸데하는 자들의(여기서는 거의 90% 이상) 작태가 아주 신비스럽다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한국의 대학 디자인교수는 전부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던지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럼 대전세계박람회 조직위원장 오명의 / 환영사/ 를 한번 보자.

  과학과 예술의 조화를 이루고자 국내 유명예술가를 모시고 열리는...

모든 작가들이 우주의 진리를 상징하는 ‘원(圓)’을 주제로 형상화한 예술세계가 인류평화와 낙원공동체의 건설을 염원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예술대전을 통하여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이상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세계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원’상징이 내포하는 철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찾고자하는 영원한 이상세계의 표상이라 생각합니다. 

-친일무리배같은 이들이 과연 철학이 무언가를 알며 ‘이들이 찾고자하는 영원한 이상세계의 표상’이라니 말도 되질 않는다. 과연 이들이 일제시대 때 같으면 반민족행위자로 친일무리배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디자인에서 103명은 온갖 언설을 다 하였는데 나는 이들의 말과 요상한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너무 잘 안다. 이들에게 민중이란 없다. 참으로 가소롭게도 이들의 정신은 부패할 대로 부패되지 않는다 말할 수 없다. 그 예로 그들의 하찮은 그림과 글을 읽어보면 잘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미술계를 ‘마의 미술계’라 부르고 싶다. 그만큼 미술계란 늪지대이거나 정글지대이다.

솔직히 시각다자인을 예술이라 하지 않는다. 반드시 ‘피상적인 예술’이라 말한다. 그래픽은 상업이다. 그래서 시각디자이너는 상업적인 정신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들만큼 세련되게 현대가 발을 맞추는 인간들이 또 있을까. 시각디자이너의 머리속에는 순수예술성을 1%라도 발견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이미 보석 중에서도 인조보석인 큐빅이 되어 있다. 그들에게서 진주나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수정 오팔을 찾는다는 건 모래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다. design은 요상하다. 보통미술교사들이 처음 중학을 들어온 학생들에게 미술시간에 칠판에 design을 써 놓고 읽어 보라고 한단다. 학생들은 누구나 데생으로 읽는다나. 누가 디자인으로 이해한단 말인가. 보통은 데생 같아서 데생으로 읽으면 점잖게 ‘디자인’하고 우아하게 읽는단다. 이것만 보더라도 시각디자인은 요상하다. 여기 디자인들이 모여서 하는 해우세가 무언지 알만하다. 그들은 우주를 너무 싶게 말한다. 우주가 그들의 희롱 속에서 어이없이 애들의 구슬치기 마블이 되고 탁구의 핑퐁이 되어 팔딱팔딱 거린다.

우주는 그게 아니다.

우주는 머리가 텅 빈 디자인과 교수들이 장식적으로 말하는 놀이가 아니다. 디자인 교수들이 논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무의식속에서 어찌 예술이 나고, 철학이 날까.

물론 예술의 껍질인 만치 예술의 속살이 다치지 않게하는 데는 한 몸 할지 모르지만 디자인과 예술은 별개의 문제다. 디자이너들이 이렇게 오만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무식하고 겁이 없어도 너무 없다. 감히 어디라고 우주를 논한다는 말인가. 차라리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마디 해서는 아니 되는 우주를 말이다.

우주의 온갖 좋은 말은 은근슬쩍 무식한체하면서 다 빼겨 먹은 시각디자이너 교수들.

정말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말을 하길 바란다. 남의 말을 교묘하게 자신의 깨달음이나 의식처럼 낚아채지 말아라.

디자인은 일상생활의 의식이지 철학은 아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디자인과나 장식과의 교수들이 작품에서 무엇을 느낀단 말인가. 그때그때 금방금방 써 먹을 작업만 하는 그 머리속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인류를 구할 사명의식이 정말로 있다는 말인가.

우주에 있어서 하찮은 디자이너 103이 일제시대 구국의 결단이라도 했는 양 여름밤의 개구리처럼 개골개골하면서 다 함께 우주를 논하고 달려드는 짓을 보니 하도 하찮아서 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야 시각디자이너들아! 너 자신을 알라

디자이너들이며 대학교수들인 너들의 한 행동이 얼마나 경솔하고 경망스러움을 아는가. 머리가 텅 빈 그대들이 교수가 되고 보니 세상 보이는 게 없느냐. 그대들이 언제부터 심오하게 우주를 논하고 원의 진리를 깨달아 왔는가.

내 정말 한심하다. 한마디로 웃기고 자빠졌다. 이 말씀이다.

등 뜨스고 배 부르니 정말 할 짓이 없는가. 이 땅은 민주화로 가는 길에 아직도 숫한 철책선이 쳐져 있는데 광신도처럼 하는 짓이 과관이다.

103명의 그래픽 출품자 중에 무려 97명이 대학의 교수로 있다. 다 철밥통을 부퉁켜 앉고 있으면 되었지 뭘 더 바라길래 그 따위 비겁하고 야만적인 행위들을 할까. 민초를 조금이나마 이해한다면 그 따위 장난은 하지 않으리라.

우주만물을 그렇게 잘 아는 무리들이 토굴의 도사나 되지 뭐하려 교수하는가.

이 탐욕의 덩어리들아! 이것도 욕심이 나고 저것도 욕심이 나고 이것도 갖고 싶고 저것도 갖고 싶어 안달인가.

한심한 교수들아! 당신들에 의해 12년이 지난 2005년의 지금 더욱 이기적인 사회가 되었다. 당신들의 제자들 중에 누가 나서서 우주를 논하기나 하는가.

디자이너들아. 당신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죽어야 정신을 차릴 지 모를 일이다. 아니 환갑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인생이 허무함을. 예술가로 착각하는 그 따위 환상은 그들의 그 꼬라지 작품들을 보면 중학생도 할 수 있는 장난의 작업이다. 솔직히 장난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수(手)작업이 몇 명 안 되고 전부가 교묘한 컴퓨터 그래픽 처리한 것을 예술이라 하느냐.

우주를 논하는데 어찌 그런 짓을 작업이라 할 수 있겠는가.103명의 그 정도의 작업을 다 합쳐봐야 뭉크의 절규 작품의 1/100을 따라 갈 수 있느냐. 한심해도 참으로 한심하고 맨자구래도 참으로 맨자구로다.

정말 한심한 것은 원(圓)만 동그라미로 그리면 마치 거대한 우주를 새로 만든 걸로 착각하는 103인의 교수들의 그 정도의 행동들과 언어들이다.

모르면 가만있어야 한다. 모르는 게 값을 떨면 과관이다. 어찌 그 정도로 작업이라 할 수 있겠는가.

대학은 다니고 석사 박사학위(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오르지 않은 학식의 짧음인지 몰라도 자로 시각 디자인은 미술박사수료는 있으되 진정한 미술박사는 보지 못한 것 같다)를 받고 교수가 되었기로서니, 전공이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무리 못 배우고 세상에 아는 것이 없기로서니 그래도 이름 있는 대학이나 대학원까지 졸업한 마당에 언행은 무식하기 그지없는가.

내 이를 물어 반드시 그 어리석은 죄를 논하고 그에 대한 벌이 있으리라.

그들이 갖고 있는 허구의 꿈을 무참히 짓밟아 줌으로 하여 사는 맛이 좀 안 나도록 할 것이며 어이 그리도 자신들이 무식했고 한심했었는지 만 천하에 다시 한 번 공표할 것이다.

스스로 무지의 부끄러움을 알아 어디 함부로 나서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시각디자이너들은 예술가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노라. 본인들이 너무 잘 알지 않는가.

상업적인 인간들이 예술을 교묘히 활용하려는 어리석은 죄를 논함으로 다시는 이런 예가 없도록 말이다.

솔직히 컴퓨터 그래픽처럼 그림을 그린다면 하루에 혼자서 천장은 충분히 그릴 수 있으리라, 이 따위 것을 보고 어찌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것에 매달린 작자들을 보고 아무리 대학의 교수일지라도 코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얼마나 머리가 텅텅 비었고, 아니면 뇌가 콩알만 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세의 짓을 할 리가 없다.

■ 원(圓)은 공간(空間) 공감(共感) 공각(空覺)-

■강병돈(홍익대 도안과 졸업. 용인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

디자인은 뻔 하게도 검고 붉은 바탕에 붉은 바탕에는 검은색을, 검은 바탕에는 붉은 색을 칠하여 도너스나 혹은 음반하나 같은 걸 그려 놓았다. 이게 무슨 공의 공감이고, 공의 공간이며, 공의 공각인가. 지 멋대로 우주가 있다 없다 하니 가소롭기 그지없다. 주사바늘이 찔러도 아파할 인간이 대승(大僧)처럼 얼분을 떨고 있다.

제목 자체도 건방스럽다.

자 그의 글을 보자.

  

크되 큼이 없고

작되 낱이 없으며

있고 있고 없고 없으며

있으면서 있고 없으면서 있다. 

■원(圓),장려한 대서사시

■ 강명옥(효성여대 대학원 졸, 효대교수)

흰종이 위에 역시 컴 그래픽디자인이다. 두 개의 구가 있고, 중심부에 다시 원이 빨간색과 푸른색으로 있다. 아마도 눈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주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좋은 디자인이다.

자 그의 글을 보자

   물질은 항상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예술은 정신을 담는 질그릇이다. 따라서 우주(宇宙)와 인간과의 장려한 대드라마를 무언가 시어로 구체화하고자 하였다.  

■원뭐과 조화(調和)의 우주적 이미지

■광윤성(홍대 응미과 졸, 경기대 산디과 교수)

컴컴한 바탕에 푸른색의 원을 하나 그려 두었다. 그리고 그 원을 중심으로 동그란 테들이 20개정도 있다. 테를 보니 생각나는 것이 공원에서 테를 던져서 병이나 물건에 걸리면 따 먹는 게임과 너무 같다. 제법 우주라고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우주가 과연 그리 쉬운 것일까. 우주에 비교한다면 인간도 미술이 아닌 미물이니 말이다.

■인간은 우주 우주는 원

■ 고문창(홍익대 도안과 졸, 순천공전 산디과 교수)

그림을 보니 옛날 문헌이나 홍익대 동양화과 대학원에서 하는 작업을 흉내 내었다. 과연 공 예과 도안 졸업생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목이 너무 거창하다. ‘인간은 우주, 우주는 원’ 솔직히 언제 한번이라도 우주가 원이라는 생각해 보았기나 했겠는가. 웃기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나는 솔직히 그 분야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그런지 우주가 원임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자 그의 얼분스런 글을 보자

   인간은 본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눈으로 보아 아름답게 표현하기도 하고 추하게 보아 추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이루어낸 대각의 경지처럼 아름다운 눈을 통해 세상을 그려내려고 노력한다. 즉 추와 미를 추월하거나 포용된 세계를 지선이라 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인간은 곧 우주요. 우주는 곧 원이다. 나의 작업에서 드러나는 인간과 원의 일치는 자연스러운 나의 내면세계의 발로라고 본다.  

■원, 일원상

■구환영(홍대 산디과 졸, 서울예전 시가디자인 교수)

무언가 조금은 아는 체 하고 싶어 안달이다. 그래 디자인은 깊이가 없다. 구환영 역시 무언가 우주의 신비를 밝힌다는 건 빨간 거짓말이다.

그림은 태양계를 그리고 그 위에 2/3정도가 덮히게 원을 하나 그렸다. 아직 예술되기는 멀었다. 디자인은 역시 디자인에 불과하다. 솔직히 지 까짓 것들이 원에 대하여 언제 한번 그리도 미쳐 보았다는 말인가.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에서

자 그의 글을 보자

원, 사각형, 삼각형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사인(sing) 시작과 끝이 없는 폐곡선으로 이루어져 무한, 영원, 완전함, 신선함을 상징한다. 동그랗게 때문에 태양, 우주, 지구, 행성 등을 상징하며 단순하기 때문에 순수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원은 인간 대 자연의 교섭을 포함하여 모든 각도에서 보는 영의 총체를 상징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원은 태양 숭배의 전통속에서 꿈이나 신화 속에서 티베트의 승려가 그리는 만다라에서 도시 계획의 기본적 모들에서 초기 천문학자의 우주 개념으로써 상징되어 졌으며. 이러한 모든 원의 상징은 예외 없이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궁극적인 완전성을 표상하고 있다.  

■ 생명 그리고 우주의 신비

■ 권기덕 ( 홍대 응미과 원 졸, 경북대 미대교수)

.글이 아주 솔직한 표현이다. 아는 것 만치 글이 이해되도록 하였다. 그림은 검은 색 바탕에 푸르고 보라색 계통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흔히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원이 몇 개 있다. 솔직함이 너무 좋다.

그의 글을 보자.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들. 어느 날 한 순간 인간의 원천으로 다가온 은혜로운 일체의 존재 

■ 청풍월상시 만상자연명

■ 권상구 (대구 신일전문대 교수)

회화적인 맛을 풍기려 하나 디자인은 절대 회화가 될 수 없다. 제법 그림 그리는 데 고생을 하였다. 소나무가 있고, 달 같은 것이 떠 있다. 그 옆으로 커다란 새 두 마리가 날고 있다.

■ 진통 속에 하나의 둥근 달을 낳았다.

■ 권용태(홍대 도안과 졸, 상지전문대 산디과 교수)

직사각형의 평면위에 위는 붉고 아래는 푸르게 표현했다. 아마도 태극기를 연상시키는 것 같다. 두 개의 원이 있고 원 속에는 무수히 많은 흰 색깔의 원이 차곡차곡 있다. 자신에게 솔직함이 너무 좋다. 인간성이 몹시 부드럽다 아니할 수 없다.

그의 글을 옮겨 보자

나에게 있어서 무엇을 그린다는 일은 항상 곤혹스러운 일이다. ‘원’이라는 대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이란 나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을 추적해나가는 것이다. 또한 삶의 진실 된 모습과 생성되어온 구체적 생명력의 근원을 파헤쳐 그 현상들을 규정짓는 작업들이다. 참으로 긴 시간들을 극기하고서야 이루어지는 당혹스러움은, 자신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쳐다보고 그 점들이 갖는 한계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수많은 원을 그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들이 갖는 무한성을 극복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빠져 들고 말았다. 원도 그냥 원이 아닌 생명력을 주는 이상향의 원, 그런 원은 무엇일까, 를 수없이 반복하는 어리석음으로 졸다가 어느 날 문득 진한 진통 속에 하나의 둥근 알을 낳았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인식에 대한 도전이요 출발이라는 의미를 새기며

■둥근 원이 그리는 세계.

■ 김광일 (중앙대 공예과 졸, 동의대학 산디과 교수)

디자인의 그림이란 게 뻔하다.

또 동그란 도너스를 그리고 있는 게 전부다, 솔직히 이런 것도 그림이냐. 이게 우주라면 우주 아닌 것이 없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그래픽은 알아도 그림이 무언가는 모르는 것 같다.

그의 글이 너무 길어서 어지럽다. 무엇을 그리 말하고 싶은지 밤새 울어 된다. 아 정말 미치게 많은 글이다. 차라리 교과서를 써라 써. 여기에 내가 글을 옮기기가 어지럽다.

앞 줄의 그의 글을 옮겨보자.

   우리는 3차원의 공간속에서 살고 있으나 조형적 표현은 2차원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이 더 많은 편으로 이는 각기 다양한 형태를 제한된 공간에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 

■ 원- 완벽한 우주적 합일.

■ 김금재(홍익대 산디과 졸, 유한전문대학 시디과 교수)

검은 바탕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담배연기 비슷하게 여기저기 풀풀 날리게 되어 있다.

김기환(계명대 교육대학원 졸, 계명대 교수)

원은 자연의 근원-

19세기 세잔느는 모든 자연이 구, ....원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모가 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예로부터 완전과 영원함, 그리고 인간생활에서의 원만함을 상징한다.....

역시 도너스를 그렸다. 그의 글을 보고 그림을 보니 한심스러운 짓이다. 웃기는 소리한다. 이래서 전문대학교수 중에서는 믿을게 못되는 수준이 있다고 그런다. 하도 말이 말 같지 않아서 쓰기 귀찮아 앞부분만 쓴다. 정말 역겹다. 그리고 그림이란 것도 컴 그래픽인데 한심하다. 이런 장난은 정말 천 개라도 그리고 남겠다. 시각 디자인 중에는 멍청하면서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게 더러 있다. 원 하나 그렸다고 우주에 지진이 난 것처럼 글을 쓰고 있다. 참 한심하다.

그의 낭창한 글을 보자

   우주는 과거역사에서도 우리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였으며 현재도 그렇고 미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우주공간의 아주 미세한 일부를 점거했거나 사라져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게 때문에 무한한 신비의 우주를 표현하는 작업은 환상적일 것이리라.

완벽한 우주적 합일을 표현하는 것은 원의 형태뿐일 것이다. 원은 그 안에서 모든 존재가 움직여 변화하고 끝이 없는 속성을 지닌 무한성을 느끼게 한다.  

■ 원(圓)은 自然의 根源

■김기한 (계명대 교육대학원 졸 ,계명대 시디 교수)

그의 글을 보자.

19세기 세잔느는 모든 자연이 구, 원추(圓錐) ,원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조형요소는 모두 원을 내포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원이 자연의 근원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원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모가 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예로부터 완전과 영원함, 그리고 인간생활에서의 원만함을 상징한다. 원의 이러한 물성 때문에 자연을 좋아하는 나는 전시회가 원을 주제로 하는 것을 기꺼이 받아 들였고, 또 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이 때 말하는 자연이란 인간은 자연 법칙이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원의 독성과 그 맥을 같이하는 이유 때문이다.

■우주 속에 살아 숨 쉬는 삶의 노래

■김덕자(홍익대 응미과 졸, 대유공전 교수)

그림에 성의를 다 하였다. 백여 개의 동그라미로 그래픽을 하였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서 최고의 성의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칸딘스키의 글을 빌렸다는 게 아쉽다. 역시 한계는 어쩔수가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거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추상적인 사고나 상상 속에서 저이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작고 그런 것이다. 점은 사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작은 원이다.

“점은 내적으로 가장 간결한 형태이다” 점은 그 자신 속에 침참해 있다. 비록 외적으로 보아 모난 형태의 경우에서라도 점의 긴장은 경국 언제나 중심 집중적이다.-칸딘스키-

사라져가는 듯한 원의 형태 속에서 , 미세한 점의 모습 속에서도 긴장되고 응축된 에너지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커다란 우주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작은 소우주들의 아름다운 삶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만유의 한 체성(體性) 만법의 한 근원(根源)

■김병옥(원광대 응미과 졸. 홍대산디과 원 졸, 군산학교 산디과 교수)

여산 권갑석의 작품을 교묘히 흉내 내었다. 디자인의 본성이 들어난다. 회화나 조각 작품 같으면 난리가 날 수도 있다. 참으로 교묘하다. 그 책의 앞을 보면 그와 똑 같은 작업이 있다. 하긴 시각 디자인은 흉내니까 그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먹 선으로 둥근 원을 그린 것 같다. 그리고 아래는 산처럼 하였는데 산위에 법도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책표지를 장식한 것 같다. 이래저래 한심한 노릇이다. 시각디자인을 욕 먹이는 짓은 아닐는지.

■ 원, 만법귀일의 고향소식

■ 김상락 (중앙대 동아대원 졸업, 단국대 산미과 교수)

검은색 바탕에 중간에 커다란 시계 같은 것을 그렸고 안에는 보라색 바탕인데 붉은 색으로 북두칠성을 그려 놓았다. 사방에 이상한 별자리형태가 그려져 있다. 공이라 하기엔 너무 장난 같다. 그냥 제목이 고향소식이라 했으면 너무 좋을 뻔 했는데 원이라는 사족이 달려 버렸다.

■원(圓) 진리를 담는 그릇

■김석봉(홍대 산디과 및 동 대학원 졸업, 광주대학교 산디과 교수)

켄트지 한 장 정도에 반씩 구분하여 위는 흰색 아래는 검은 색으로 하고 중간에 역시 도너스를 하나 그렸다. 글자로 일원상이라 고고를 하였다. 예술이라 하기엔 장난이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 원은 완벽한 도형이다.

김■선화(성균관대학교 생활미술과 졸업, 독일 파시우 대학원 미교과 졸업,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학원 박사과정수료, 한양대학교 응미과 박과과정, 부산공전 산디과 교수)

그림이 약간 회화적인 냄새를 풍긴다. 둥근 원이 불경 같은 글자로 검은색 붉은색의 도장을 꾹꾹 찍어 놓고, 안에는 두 손 모아 부처가 기도하는 형태다. 디자인이지만 회화의 한부분이 어딘가 묻어 있다. 스승을 잘 만난다면 예술도 가능하다 본다.

그의 글을 보자

   완벽은 인간이 신이라 부르는 궁극적 완전성의 상징이다. 신은 온 인류의 집단 무의식속에 숨겨진 채 개개인의 상징 위에 세겨져 있는 신성이며, 우주의 유일원리를 지닌 온전한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해 그의 온 피조물을 감싸안듯 나를 감싼다.  

■ 해가 지면 밤이 오고

■ 김승렬/ 원광대 응미과 원 졸 순천공전산디과 교수)

실컨 읽다보니 천부경의 말씀이다. 그림은 켄트지에 밑바탕이 회색빛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도너스 같은 원이 되어 있는데 색깔이 뫼비우스의 띠 같다. 아래는 작대기 비슷한 것에 시간이 가는 색칠을 하여 놓았다. 회화가 되기에는 까마득하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그의 옮겨온 견부경의 글을 보자

우주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온 시작이 없는 하나이다.

우주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이름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온 끝이 없는 하나이다-천부경에서-

■ 시공(時空)

■ 김용우(홍익대 미대 졸, 대학원 졸. 서울 보건전문대 교수)

켄트지에 화회 탈과 반가사유상을 오려 붙여 놓았다. 이것으로 예술이라 하기엔 너무 멀다.글이 너무 길어서 쓸 수가 없다. 이 작품전이 무슨 철학서적은 아니질 않은가? 한마디로 개End을 밟듯이 온갖 말들로 치장을 해 놓았다. 글을 보고픈 자는 내게 연락하라. 복사본을 보내 줄테다.

■ 더불어 사는 삶

■김유택(경성대 응미과 및 동대학원 졸, 동의공전 공디과 겸임.)

캔트지 반 정도에 윗부분을 장식해 놓았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잿빛이 나는 쪽과 흰색바탕이 그대로 있는데 마치 달이 24시간 떠 있게 보이거나 혹은 럭비 볼이 퉁기는 순간 같다. 이건 예술이라 하기엔 아직도 멀었다.

그의 글을 옮겨보자

   본 작품은 각기 다른 모양의 작은 원들의 배열이 큰 타원을 형성하고 또한 든 원들의 방향이 화면 중앙을 향하게 함으로써 구심점을 이루게 한다. 현대인들은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기주의적인 사고 생활방식을 갖고 살게 마련이다. 본 작품의 의도와 같이 한민족이라는 공동의식을 항시 마음에 새겨 둥글게 더불어 사는 삶을 창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원(圓)

■김윤수 (홍대미대 졸. 계명대 교육대학원 졸.부산대미술학과 교수)

흰 도화지에 정중앙에 둥근 원을 그리고, 한의학에서 만든 인간상을 그대로 그렸다. 이게 무슨 우주이고 그림일까. 한심하다 못해 우습기 그지없다. 왕청스럽게도 원이 ‘하늘이며 자연이고 땅이며 우주이다.’ 별 짓 소리 다한다. 그래 원이나 열심히 그리다 하늘나라에 갈 것인가.

그의 글을 보자

  원은 하늘이며 자연이고 땅이며 우주이다. 모나지도 않고 순진함이 담겨 있는 허전하면서도 가득하고 완전하면서도 겸손하기에 우리네 인간들은 그를 닮으려 하고 있다. 

■ 원은 한국고유의 정서적 상징

■김은풍(서울대 응미과 한양대 응미과 졸. 청주여자사범대 교수 )

캔트지에 회화적인 냄새를 조금 풍겼다. 산과 파도 같은 곳에 연꽃이 하나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새가 표시되어 있다. 무언가 재미있는 작업을 할 아는 사람이라 본다. 스승을 잘 만나면 회화가 되리라. 좀 말 같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조금 알려고 한다.

그의 글을 옮겨 보자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은 국민이라 한다. 그 한을 원으로 확산 승화시켜 보자.

거기에는 새 시대의 이상향적인 깨달음이이 있게 된다. 이제 신화적인 그 한을 인류구원의 서원으로 돌린 세계를 바라보는 깨달음의 눈이다. 한국은 항상 깨어있는 나라다. 그 깨달음은 이 시대를 이끌어갈 예술의 극치요. 우주 혼이다.  

■ 둥그런 진리를 닮아 가고자

■김인걸 (홍대 및 동 대항원 졸,원광대 미대교수)

캔트지에 밤하늘의 푸르고 감청색의 색깔이 묻어 있다. 원을 그리고 원이 역단층이 되게 하였는데 작품이라 하기엔 멀었다.

말이야 번지르하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진리를 찾고자하는 원초적 의지로써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양하게 해석된 우주 진리를 둥그런 원으로 표현하여 봤다.” 그래 본인의 말처럼 원으로 표현해 보았다. 세상 바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혼자만 들 떠 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뭐가 된 양. 시각 디지인은 이래서 겉 다르고 속 다르다. 확실히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전공이 갈라지기 전에 이미 결판나는 것이다. 즉 입시생부터 이미 비예술과 예술이 구분하는 것이다. 즉 남성과 여성이 다른 것처럼 이미 구분되어져 버린다.

그의 글을 옮겨 보자

   “진리를 찾고자하는 원초적 의지로써 동서고금을 통하여 다양하게 해석된 우주 진리를 둥그런 원으로 표현하여 봤다. 모나는 마음을 둥글게 닦아 나갈 때 비로소 순수한 자연인으로 영원 회귀하게 될 것이다. 

■ 우주환타지

■김일환(부산공업대학교 산디과 졸. 경성대 산디원 졸. 경남 전문대 강사)

켄트지에 빨주노초파남보랄까, 원색이 여석색깔의 작대기를 그려 놓고 중간에는 구름이 뭉글뭉글 일어나듯 둥글게 하여 놓았다. 예술이기엔 아직 멀었다. 그래도 솔직함에 마음이 든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우리의 색은 역시 단아한 여인의 전통적인 복식이나 건축에서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항상 전통의 색을 접하면 편안해진다. 전통이 뿌리요 역사이기 때문일까. 이곳에서 나는 무한한 영겁의 색과 세월을 만나기도 한다. 색과 우주는 무한한 원의 궤적이다. 그 속에 나는 한낱 점에 불과하다. 

■ 원의 우주적 합일성

■김재훈(홍대음미과 졸, 동대학 원수료. 홍익대 강사)

켄트지에 원색이 아닌 색깔을 칠하고 정 중앙에 둥근 원을 그리고 도나tm 모양의 원 속에 무엇이 있는 양 하였다.

이것으로 우주를 말하기엔 너무 멀다. 지나친 의욕이다. 사람이 어딘가 모자라면 그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 한다. 말이 너무도 앞서 간다. 깨달음은 치우고 자신이 살 궁리나 하길 바란다,.

자 그의 멍청한 글을 보자.

   생물학적 생명관을 넘어서서 물소리, 바람소리,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 산과 바다 달과 해, 우주의 삼라만상이 돌고 도는 동그라미 속에서 인간의 생명이나 어느 특정한 한 생명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 모든 개별적 생명들이 우주적 생명에 합일함으로써 완전히 하나를 이루고 있다.

완전한 하나 됨으로 깨달음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시간대의 몸과 마음이 일치될 때 텅 빈 공간 속으로 겹겹이 쌓여오는 형상의 무한성. 결국에는 무상의 세계로 이어지는 나의 의식들의 연속성 영상을 원에 대한 이미지로 말하고자 한다.  

■ 그림을 그리는 뜻은

■ 김종호(홍대 공예학부 도안과 졸.호남대학교 산디과)

켄트지에 하늘색으로 그려 놓고 피아노의 건반처럼 작대기를 몇 개 구ㅡ려 놓았다. 왕청스레이 그 위에 파랑 주황 빨간 그리고 장미꽃이 하나 있다. 회화라 하기엔 머누 멀다. 매일 그림만 그린다는 데 의심스럽다.

본인은 그림을 그리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글로 쓰지만 디자인은 그림이 아니다. 상업적 그림이다. 순수성이 배제된 탁월한 도안에 불과하다. 착각 속에 사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자 그의 착각의 글을 보자

   사람으로 태어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영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느낌이나 사고를 바탕으로 자기의 작품세계를 추구해나가는 길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도 자는 시간 외에는 그림을 그린다 -그래 자는 시간 이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려라. 그러나 그런 그래픽이지 회화는 아니다.

■ 고요한 자연의 형태와 환상적인 자연의 이미지를 찾아서

■ 김철영(조선대 응미과 졸. 세종대 대학원 졸. 조선대 산디과 교수)

캔트지에 바다냄새가 물씬 난다. 둥근 원을 그리고 해녀를 닭은 인물인 것 같다. 원의 곁으로 색종이를 네모나게 오려서 뿌린 느낌이다. 그래도 볼만하다. 제법 점수를 주고자 하는 편이다. 제목도 솔직하다. 스승으로써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제자들이 경망스럽지 않겠다.

■ 한마음 머무는 곳

■김태중(홍대 미대 및 동 산미원 졸. 경성대 응미과 교수)

누구의 시이다. 켄트지에 울창한 나무가 서 있다. 그 위에 우주 같은 공이 있는 것 같다. 별이지 싶다. 무언가를 아는 눈치다. 스승을 만나면 예술이 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그가 좋아하는 글을 보자

   별이 떨어진 곳 마음에 두었다.

다음날 가보려 벼르다 벼르다

이젠 다 자랐소. 

■ 인류의 행운을 담은 은혜의 그릇

■김학성(홍익대 도안과 동 산미원 졸. 산업디자인전 대통령상 수상, 숙명여대 산디 교수)

원불교의 원이지 싶다. 표지의 동그라미와 너무나 똑같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은 사진같은게 여러 장 붙어있다. 작품이라 하기엔 부끄럽다. 글이고 제목이 가소롭다.

■ 일체유심조)

■김홍주(중앙대공예과졸.동대학원시각디자인과졸. 기전여전산디과 교수)

그림은 켄트지위에 검은색과 푸른색을 입힌 다음 동그란 원을 수십 개 그리고 중앙에 피셔를 칠하여 원이라 글씨를 써 넣었다. 그리고 원을 따라 네모 세모가 여러 개 있다. 그림이라 하기엔 너무 멀다. 말이 너무 많다. 원에 대하여 자신도 소화시키지 못하면서 물End을 엄청 싼다.

자 그의 자신에게서 울어 나온 글이 아닌 어거지 글을 보자

   인류의 잠재의식 속의 모든 창조 이면에는 엄격한 질서와 원칙이 있으며 이는 천체의 운용과정과 계절의 순환에서 얻은 결과이다. 원은 보는 시각에 따라 인간의 내재된 의식의 표현이자 우주적 종교적 표현이다.

도형 3요소(원 삼각 사각)은 인간 기본내면의 표면이라 할 수 있다. 끌레의 말을 빌면 원: 정신세계 (감성 감동)삼각사각으로 다시 원으로 옮겨가는 순환은 공간의 결정 작용 물질에서 정신으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화면 전체에서 보여 지는 원은 구성은 우주의 원 ,마음의 원을 의미한다. 즉 형이상학적 의미의 원이라 할 우주와 심의 원은 일치한다.

일체유심조라, 마음으로부터 모든 사물이 이루어질 수 있음은 마음가짐에 따라 시각요소도 다변성을 가질 수 있음이라.

삼각 사각 요소도 마음의 눈에 따라 원에서 파생되어 원으로 귀속되는 도형으로 볼 수 있다. 

■ 예술가의 사명

■ 남금우 (계명대 미대 동 대학원 졸, 계대 응미과 교수)

흰색의 켄트지에 한 복판을 그냥 두고 바깥으로 검은 색 피셔를 뿌려 놓았다. 복판에 둥근 원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초 기둥같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아이들 장난이다.

그가 좋아하는 글을 보자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곳에 불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다-슈만- 

■ 원....

■ 남용현(중아대 시디과 졸. 동대학 신방과원 졸업. 강원대 산디과 교수)

캔트지에 검은색의 피셔를 칠하고 고무 타이어같은 원을 몇 개 그려 놓았다. 수십 개의 동그라미가 원 속에 있다. 온통 한자투성이의 제목이라서 필자도 잘 모르겠다. 좀 역겹다랄까. 먹은 음식을 다시 먹는 꼴불견이다.

■ 변산구곡로에...무무적무무요 비비적비비라.

■류철호(?대미대 졸동 산디원 졸,대전실전교수)

검은색 켄트지에 둥근 원을 도너스식으로 그리고 그 위에 바둑판처럼 흰색으로 그러 놓았다. 디자인의 가장 전형적인 예다. 좀 역겹다고나할까. 제목이 한자투성이다. 차라리 디지인 서생 말고 한문 선생하라. 전문대학교수는 이래서 싫다.

■ 예술은

■ 문수근( 홍익대 공예학부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 서울산업대학교 시디과 교수)

캔트지에 검은 색으로 동그라미와 동그라미를 꿰는 삼각형이 있다. 그리고 그 곁에 빨강색의 네모가 있고 갓 쓰고 도포자락이 날리는 학생이나 선비들이 고개를 들고 있는데 복사하여 여러 장을 붙인 것 같다. 남의 글을 사용하여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이게 사실 그림인가.

자 그가 백기주의 글을 빼긴 글을 보자

   예술은 우리의 인간생활에서 유추된 인록이 먼 추상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상으로서 바로 끊임없이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주변에서 우리의 마음속 깊이 스며들어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안겨주는 사랑스러운 벗이요, 모든 것의 주체자로서의 우리의 생을 충실하고 행복하고 윤택하게 해주는 실제요 현실로써 신비로운 힘을 가진 소중한 것이다. -백기주 저 / 미학/ 에서  

■ 모자람과 남음이 없는 원동태허

■ 문철(홍익대 미술대학 동대학원 졸, 경원대 시디과 교수)

캔트지에 피셔를 뿌려 놓았다. 희미하게 원인가 싶게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고 중간을 분활하여 양쪽에 눈처럼 하여 놓았다.

이게 예술이기엔 너무 허무맹랑하다.

■ 원

■ 민병일 (홍대 미대 졸. 동대 산디원 졸)부산공전 산디과 교수)

캔트지에 비온 뒤나 비오기 전의 하늘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두 개의 원이 아래와 위에 있는데 뭐 별 것은 없다. 그냥 장난 같다. 말도 싶다. “ 사는 이치는 이 속에 다 존재되어 있음에 모나지도 않고 뒤죽박죽도 아닌 것이 무한속의 상미다. 보면 볼수록 창조적 근원의 공륜이다. ”너무 얼분을 떨었다. 인간의 삶을 장난으로 아는 이런 자에 의해서 나라는 망한다. 그러나 이런 자를 천벌할 자들이 있으니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그의 무지하고 한심스런 글을 보자

   사는 이치는 이 속에 다 존재되어 있음에 모나지도 않고 뒤죽박죽도 아닌 것이 무한속의 상미다. 보면 볼수록 창조적 근원의 공륜이다.

아뿔사 수라속 세상사에 이 내 맘 영겁의 창공속에 희이휘이 날려 보낸다. 

■ 돌고 돌아 다시 태어나도 변하지 않는 원이니라.

■박선의(홍익대 미대학장 역임, 홍익대 미대교수)

캔트지에 피셔를 밑에는 푸른색 위는 검은색으로 밤을 연상시키고자 한 모양이다.아래는 지구처럼 생긴 둥그런 원이 하나 있고 위로는 북두칠성이 하나 있는데 8꽤와 떡살무니가 도용되어 있다. 우주라고 하기엔 너무 먼 그림이다. 하긴 이것도 그림이라면 그림 안 그릴 자가 없다. 언제 우주를 그리도 생각하였다고 온갖 푸닥거리를 언어로 다 해 놓았다. 혹시 종교가 불교인지 모르겠다. 스승이 이러니 제자들의 글이 그 모양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어느 곳으로도 기울지 않아 완벽한 도형. 그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이며 물질과 물질의 근원이리라.

기울지 않은 도도함은 우주본질의 절대적 원소

양과 음이 작용하니 세상 만물을 생성시키고 또한 유지시키며 소멸하니 그것은 끊임없는 운동이며 또한 영원한 정지이리라.

유동 이식을 추구하는 이것은 기이며 모든 철학의 시작이며 결론인 이것은 도요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 자연의 원리요 또한 변화하지 않는 근본이니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생이며 동정일여라.이것은 유요 또한 무이다.

색과 공은 대립이 아니라 .... 

■ 원은 만법 하위일 천지시대원

■ 박숙희 홍대 미대 및 동 광고디자인 대학원 졸. 안양 전문대 교수)

캔트지에 아래는 검게 위는 푸른색으로 피셔작업을 해 놓았다. 정중앙에 그들이 늘쌍 하듯이 도너스같은 동그라미에다 산 같은 걸 동글동글 하게 그리고 새가 한 마리 있는데 꽃잎을 떨어뜨리는 그림이다. 아주 평이한 디자인이다. 원에 대하여 아는 체를 너무 하였는 게 흠이다. 하긴 어느 디자이너치고 이렇게 얼분을 떨지 않은 디자이너들이 있었을까.

■ 우주(宇宙)는 원(圓)으로

■ 박일재( 조선대 응미과 졸. 홍익대 원 졸업, 조선대 산디과 교수)

제법 회화의 냄새를 풍긴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면 회화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자인은 어디까지나 디자인일 뿐이다. 제목이 너무 얼분스럽다. 이 바쁜 날들에서 언제 우주를 원으로 생각할 틈이나 있었던가.

자 그가 신으로 말한 글을 보자.

   파도가 일월상을 그린다. 바닷가조약돌에도 일월상이 아로 새겨져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일월으로 돌고 또 일월상을 닮아 간다.

우주는 우리의 마음의 고향이자 영원한 동경의 세계이다. 

■ 원은 하늘이자 우주

■ 박재갑(홍익대 산디과 졸. 부산 여대 산디과 교수)

그림이란 게 형편없다. 동그라미들 끼리 서로 작대기로 연결된 것이 그의 말처럼 되질 않는다. 이건 장난에 불과하다. 이 따위 그림으로 우주를 말 한다는 게 한심하다. 글은 거창하게 자신도 모르는 글을 얼분스럽게 써 놓았다. 뭐 “원이란 하늘이자 우주란다” 그래 당신의 눈꼽도 우주라면 우주고, 한 방울의 눈물도 우주라면 우주다. 너무 아는 체를 말아라.

자 그의 얼분스런 글을 보자.

  평소 그래픽 디자인은 무형의 의식세계를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되어왔던 우리나라 디자인계에서 나름대로의 소재들과 시도를 삶의 추상적 개념이나 본질적 문제를 순수하게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 오면서 원이라는 주제로 한국인의 핵을 시리즈로 발표하면서 고민하고 또 심취하기도 하였다.

원이란 하늘이자 우주이다. 이 우주에는 만물이 존재하며 모든 물질은 핵으로서 형성되며 핵은 원이기도 하다. 또한 무한한 창조 신비를 의미하고 있다. 원은 둥글고 모가 없어서 순함, 평화, 화합으로 상징한다. 원안에 또 하나의 원을 대비색으로 태극적 양성의 힘을 암시하고 그 운용으로 보아서 서로 연결하고 곡옥의 도상으로 원지향의 분해와 상호보완의 형상으로 단순명쾌함을 보여주고자 시도한 작업이다.  

■ 한국의 한을 세계혼으로 푸는 일월상 아리랑

한 큰 원이 돌매 천만원상이 도나니.

■방재기 (홍대 응미과 졸. 단국대 산디과 교수)

천채가 돌아가는 걸 잘 표현하였다. 중앙에 역시 동그라미 속에 한의과에서 사용하는 신체에 대한 그림이 들어있다. 고작 그 뿐이다. 스승을 잘 만나면 회화의 길이 보이리라.

■ 마음을 비우고 섭리를 깨닫고

■ 백금남(홍익대 도안과 졸. 동 대학원 졸. 경희대 교육 대학원 졸. 중앙대 신방과 원 졸, 성대 산디과 교수)

켄트지 한 장에 위에는 일원상 글자를 진하게 쓰고 중간에는 지구모양의 원을 그려 놓고 아래에는 바코들 그려 놓았다. 이때에 바코드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대단하였다. 그의 말을 거짓말투성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란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다.

그의 글을 보자

   신문만 보면 늘 어지러운 세상을 보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느지, 왜 살아야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고, 과학화되고 숫자화되고....이런 가운데 우리는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섭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원 조물주의 참 모습

■백철(중앙대 예술대학 및 대학원 졸업, 배제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검은색 바탕에 원이 빠르게 돌고 있음을 그렸다. 땅은 보도블록으로 넓게 깔린 것 같다. 스승을 잘 만나면 예술이 될 듯도 하다.

■ 한정공간과 무한정의 사고

■ 봉상균(서울대학 응미과 졸. 미 시라큐스 산디원 수료, 효성여대 교수. 서울 산업대학교 시디과 교수)

..

검정색 켄트지에 원을 그리고 아래에는 촉 트는 작물이 하나 있다. 이걸 예술이라 하기엔 너무 멀다. 글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디자인은 예술이 아님을 말하지만 사실 그러하다. 디자인을 갈등하여 작업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이지 화가는 아니다. 디자이너는 아무리 좋은 작업을 하여도 다만 상품을 만들 따름인데 그 자신이 회화가로 착각하는 것 같다.

그의 글이 길어서 다 싣지 못하면서 앞부분의 몇 자만 적는다.

   해를 거듭할수록 나는 창작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작품을 제작할수록 어려움만 느껴, 창작해위란 자기 사고대로 되지 않는 자기 스스로와의 갈등에 대한 극기인 것 같다. 적은 한정공간에 무한정의 사고와 의도적인 표현마저 하려니 더욱 힘들고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안간힘을 다 하여 한 작품이 나오면 그 작품의 평은 간단하고 보잘 것 없이 내려진다. 즉 한 작가가 그 작품을 어떤 조형 방식이나, 어떤 기법으로,무슨 재료를 작가 자신의 심상을 십분 표현하였는지를 성의껏 살펴보기도 전에 대충 훌터 보고 ...  

■ 지구촌 이상향의 모델을 제시

■ 서은주(부산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 양산전문대 산디과 교수)

캔트지 한 장에 수백 개의 계란을 푸르게 그려 놓은 것 같다. 이것이 무슨 놈의 ‘지구촌 이상향의 모델을 제시’하였을까. 참 웃긴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좋은 디자인은 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게 한다”고 허버트 리이드는 말했다.

디자인의 창작기능에 의하여 탄생환 현대문물은 오히려 인간을 속박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우ㅏ 미래시대의 이상향 즉 낙원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상업주의에 편승했기 때문이다. 

■ 밤하늘에 별이 뜨고 또 진다

■선용수(조선대 응미과와 동 대학원 졸. 동신전문대 응미과 교수)

역시 캔트지에 희뿌연 피셔를 칠하고 정중앙에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넣었다. 솔직히 이런 것도 그림이라고 한심하다. 그러나 글이 마음에 든다. 어차피 컴 그래픽이란 거기서 거기가 아니던가. 오십보 백보라고. 잘해도 그만 못 해도 그만. 그 수준들이 어디 가겠어.

자 그의 멍청하지만 솔직한 글을 보자.

   오늘 이 세계의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의 힘과 과학기술의 힘을 만능시하는 사고에 젖어 있다.

그들은 의, 식, 주라는 물질적 충족과 사람의 감각적 만족으로 인간은 행복해진다고 믿는다. 나는 항상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만족의 상태가 있었는가?

태양과 달, 하늘과 별, 땅위의 모든 나무와 바위, 강과 샘물 이러한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뚫리고 찢기고 더렵혀진 인간의 무지와 과학이라는 허울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신봉하고 따르는 것은 아닌가?

밤하늘에 별이 뜨고 또 진다.

자연 앞에 겸허해지자.  

■ 시작도 알 수 없다. 끝도 알 수 없다.

■손영환(조선대학 음미과 졸. 홍익대 산미대학원 졸. 목포대학교 교수)

흰캔트지에 검은 색 피셔를 뿌려 놓았다. 그리고 중앙에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계속 확장되도록 그려 놓았다. 자신의 말처럼 시작도 알 수 없다. 끝도 알 수 없다, 가 본인의 솔직한 고백이라 마음에 든다.

■ 원은 완벽한 에너지의 근원

■송진희 (원광대 응미과 졸. 중앙대 신방과대학원 PR광고전공 졸업. 독일 뮌스터 국립미술대학 졸업. 호남대학교 교수)

캔트지에 시골집 문을 연상시키는 나무 형상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따가운 햇살이 들어오는 형태로 그렸다. 언제부터 원을 그리고 모시고 생각했는지 가소롭다. 아는 게 너무 많아 탈이다. 솔직히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체하는 것도 꼴불견이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원은 가능한 모든 형상을 그 안에 함유하고 있으며, 완전한 도형인 원은 이제까지 존재해 왔고 또 언제나 존재할 실제 즉 신을 의미한다. -폴라톤-

현자는 원은 신의 본성이라 하였다. 또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궁극적인 완전성을 표상한다고 하였다.

내게 있어서 원은 화합과 깨우침을 위한 자기희생의 상징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원의 전체성 속으로 표용되니 존재하는 든 갈등과 대립의 구조적 모순마저도 적어도 이 원 안에서는 더 나은 조화를 위한 전제로 다듬어진다.

디자인으로서의 원도 역시 모든 부분에 대하여 특별한 통일. 평등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원이 가지는 운동은 완벽한 에너지의 근원이기도 하다. 불완전 결점투성이의 우리는 완전한 이성, 완전한 양심 그리고 완전한 자유를 위해 이 원의 본질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고 오늘도 무한히 노력할 뿐이다. 

스승을 만나면 제법 회화가 될 듯도 하다. 자신의 말처럼 그림이 불확실하다.

■ 둥근 마음으로 모 없이 살자.

■신동태(계명대 미대 도동 대학원 졸, 계명전문대 교수)

그의 글을 보자.

  점 선 면으로 이어지는 공간들

이런 공간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원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원은 안락함과 포근함을 준다. 부드럽고 원만하다. 내외가 없이 두루하여 우주를 머금는다. 그런데 이 사회는 왜 이리 시끄러울까? 왜 이리 고달플까?

인간들이여 원같은 마음으로 모없이 살아가자. 원처럼 둥글둥글하게 덕으로 살아가자.  

■ 원, 우주 만다라

■심효섭(효대 시디 전공. 동 산미대학원 졸. 동서공과 대학교수)

캔트지에 푸르게 피셔 칠을 하여 놓고 중앙에 막대 형태로 원을 알록달록하게 그렸다. 솔직히 이것도 그림이니 집에 갖고 가는 게 어떨까. 어떻게 원이 만다라니 그것 참 말이 된다.

■ 원, 어느 큰 것이라도 감싸지 못함이 없다.

■ 양학철(홍대 미대 및 동대학원 시디 전공. 원광대학교 교수)

캠파스에 컴의 자판처럼 하여 놓고 그 위에 여려 글자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그 중앙에 역시 원이 그려져 있다.

야 이것도 그림이니. 참으로 한심한 지고. 그림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다.

그의 글을 보자.

   크다고 할까. 아니 어느 구석진 곳이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고

작다고 할까. 아니 어느 큰 것이라도 감싸지 못함이 없다. 있다할까. 아니 그 한결같은 모습이 텅 비어 있고 없다고 할까.

아니 만물이 다 이리로부터 나오네.  

■ 만다라

■ 어양우(홍익대 졸. 서일전문대 교수)

그림은 제법 성의 있게 그렸다. 붉은 색 도화지에 원이 알록달록 치장한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읽으니 제법 재미가 있다 그런데 끝을 보니 망할 어디 법문을 빼꼈는지 한심하다. 성장하기엔 멀었다. 글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이래서 전문대학 교수들 중에서는 머리가 텅 비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거야. 모르면 가만히 있을 것이지. 얼분 떠는 글을 보아라. “

중생들의 번뇌와 미감과 무지가 끝이 없는 우주의 세계에서 오늘도 고통과 시름하며 하루를 보내고 허공 속에 맴돌며 피를 말린다. 공허와 찌푸린 인상들-“

정말 하늘이 웃을 일이다. 무식하면 가만있을 일이지 온 천하를 다 아는 양 하는 꼴은 무엇인가?

그의 멍청한 글을 한번 보자.

   중생들의 번뇌와 미감과 무지가 끝이 없는 우주의 세계에서 오늘도 고통과 시름하며 하루를 보내고 허공 속에 맴돌며 피를 말린다. 공허와 찌푸린 인상들-

중생들의 살을 이어가는 숨소리는 하루의 양식으로 재가 되어 타버리며 만다라의 무한함이 중생들의 억겁을 자비로 베푸나니 생명력의 근원심을 건네지어다.

불쌍한 중생들이여, 오늘도 또 하루를 보내는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 우주의 광명 일원상

■엄기완(홍익대 도안과 동 산미대학원 졸. 부산여자 대학교 산미과 교수)

그림을 보니 솔직히 마음에 든다.

켄트지에 흰 부분과 그 위에 자청색의 부분이 있고 수백 개의 동그라미가 상징하는 하늘의 별들이 있는 반면 연꽃에서 불꽃이 타는 느낌이다.

스승을 잘 만나면 미술에 성공할 수도 있다.

■ 태극, 무극 그리고 도

■여훈구(홍익대 및 동 대학원 시디과 졸. 경남 전문대 산디과 교수)

역시 켄트지에 가로가 긴 방향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래는 푸른색 위는 붉은색 안에는 눈알처럼 하여 놓았는데 본인이 말하듯 눈알이란다. 이것으로 예술되기는 멀었다. 디자인은 이래서 한심하다. 그리고 글에서 얼분은 다 떨었다. 솔직히 대전 엑스포와 자신이 무슨 관계라도 되는 양 거창하게 말하였다. 그림도 그림이랄 것도 없다.

자 그의 글을 보자.

   대전 엑스포 93은 미래를 전망하는 지구촌의 축제로써, 미래를 위해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비젼과 저력을 과시하는 크나큰 이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늘의 세계는 산업사회로부터 후기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대 변혁기에 처해 있으므로 대전 엑스포 ‘93이 갖는 으미와 중요성에 대한 역할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전 엑스포 93은 / 새로운 도약에의 길/ 이란 주제처럼 우리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한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어야 하며, 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혜안이 필요되어지고 있다. 이에 본 작품은 자연사 람간을 조화를 중시하는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인 태극사상과 지구 이미지로서의 원형을 인간의 눈과 연결시켜 시각화하였다.

즉 음양이 발생하는 근원으로서의 태극과 시 공간의 모든 현실세계인 지구로써 형상시켜 표현하여 보았다.  

■ 가득차 있으면서 텅빈 세계

■오근재(홍익대 광고디자인과 교수)

캔트지에 커다란 원을 하나 그리고 원에서 황금빛이 뿜어져 나온다. 이것으로 번뇌를 다스리기엔 어림도 없지만 참 마음에 든다. 글도 자신의 한계 밖으로 나가지 않음에 놀랍다. 시각 디자이너라고 무조건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 점잖은 미술이다.

자 그의 솔직한 글을 보자

   일원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현상계에는 오욕과 팔고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들을 모조리 부처님에 바치고 마음을 텅 비게 만들었을 때, 즉 과학이라 불리우는 세상사의 모든 것들을 다시 우주의 참 진리인 불심의 세계로 다시 귀속시켰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참 평안으로 가득차게 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야 마로 일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번뇌도 바치고 고통도 맡겨버리는 것이다. 탐욕은 물론 사상으로서의 나 자신까지도  

■ 원, 천진난만한 동심. 석굴암 본존불의 영원한 미소.

■오정길(홍익대 도안과 및 산업미술원 졸. 목원대학교 산미과 교수)

흰색의 캔트지에 중간에 동그란 도너스를 그려 놓았다. 바깥쪽으로는 무언지 모를 혼자만의 호장칠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그려 놓았다. 이것도 한심하다.

갑자기 웬 ‘석굴암 본존불의 영원한 미소’인지

자다가 요강 들고 배구하는지 모를 일이다.

솔직히 그것도 그림이냐. 차라리 때려 치워라.

■ 자유로운 발상, 인간과 컴퓨터

■ 류관호(서울대 응미과 졸,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미교과 교수)

켄트지에 제법 그를듯하게 뭐 많이 넣었다. 용의 문양도 있고, 반가사유상도 있다. 무엇을 조금 아는 눈치다. 스승을 잘 만나면 회화가 될 수도 있겠다.

시각 디자이너를 작가라 하였는데 절대 작가가 아니다. 미술인은 화가이며 미술인이지 절대 작가일 수는 없다. 무식하게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아니 된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인간이 있고 컴퓨터가 있다. 컴퓨터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하는 힘이 인간에게 주어진 훌륭한 힘이다. 결코 컴퓨터가 대신할 수는 없다. 창조는 인간의 마음에서 샘솟는 것이다.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컴퓨터가 훌륭한 창조를 해주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이미지가 있고 도구로써 컴퓨터는 작동한다. 생각하는 것은 작가. 도구를 움직이는 것도 작가이다. 컴퓨터를 사용해 작품을 제작하기 이전부터 작가로써 활약하고 있던 사람은 컴퓨터에 휘둘리는 일없이 자유롭게 사용한다.

창조하는 마음은 돈으로는 살 수 없다. 훌륭한 컴퓨터는 돈을 내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 컴퓨터는 아무것도 창조해주지 않는다. ‘컴퓨텀만 있으면 이러한 일도 금방 일어난다’라고 가끔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착각이다. 시간으로 인간은 컴퓨터에 지고마는 때가 있다. 굉장한 컴퓨터라고 생각한 때야말로 컴퓨터에 진 때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컴퓨터에 더하면 좋고 컴퓨터에서 돌아오는 것은 너무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작품을 창조할 때 나라가 달라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더라도 창조되는 마음은 같다. 언어도 컴퓨터도 아니다. ‘작품의 스케치’ 이 것 하나를 눈앞에 두고 얼굴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원의 표상

■류재국(서울대학교 응미과 졸, 중앙대 산디과 교수)

그림에서 제법 원의 표상적 의미를 담았다 본다. 그래봐야 중생이 뭘 하겠나. 다만 그림에 성의가 돋보이고 그림에 얼마만큼 글이 뒷바침하는 것이 솔직해서 좋다. 무엇을 좀 안다고나 할까. 그림이 눈동자이고 눈동자에 비친 세상이 수백 개의 손으로 처리하여 놓았다. 캔트지에 둥그런 원을 눈알처럼 그린 것 같다. 그 눈알은 확대되어 수없는 손들이 중싱에서부터 나와있는 현상이다. 이걸 가지고 예술을 논하기엔 아직은 정말 이르다.

그의 글을 보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진리를 원으로 표현한 것은 고금을 통해서 원이 상징하고 있는 높고 근원적인 시사성 때문이다.

세상을 내다보는 창,

눈의 동자도 또한 원이다.

보살의 원력으로 바라보는 눈 속에는 세상을 구제하고자하는 천개의 손이 끝없이 움직인다.천 개의 눈은 하나의 눈 속에 있고 부처님이 설하신 오안 중에 천안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고 시공을 통 뭐

하늘과 땅의 기운 가운데 있어 인간의 모든 정기가 이 눈 속에 어려 있다.

뭐익중생의 대행원이 천개의 손을 통해 실현되었거니와 인간에게 부여된 작은 재능(장인정신)과 안명수결도 한 방편으로 이 예토를 풍요롭게 한다.

눈으로 보는 세계, 이 속에 우리도 얼마나 많은 손을 움직여야 하는가. 

■원의 이미지

■육영란(AcademyfArtCollege졸업-일러스트레이션공. 미국센프란시스코 동대학원 석사졸업. 경인여전교수)

건방스럽다. 언제 원을 그리도 생각하고 연구해 봤는지 코웃음이 나온다. 그리도 별로 볼 것이 없다. 이 정도는 대학 3학년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켄트지에 피셔작업이 아닌 타 물감으로 붉은색 계통의 표지에 흰색을 두루 섞었다. 중간에 역시 동그라미가 있고 종이작업으로 찍은 것 같은 얼굴이 세 명 있다. 스승을 잘 만나면 예술이 될 듯도 하다.

자 그의 교만스런 글을 보자. 원이 우주란다. 웃기고 자빠졌지 않은가.

   원이란 삶의 연속적인 심볼이며, 현재의 주기이고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에 대한 정신문화의 연속적인 심볼이다. 유아들의 무의식으로 그려내는 원으로부터 우주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그 무한함이 즉 원의 근원이 아닐까.  

■윤병규(홍익대 도안과 졸업. 동 대학원 졸업. 원광대 응미과 교수. 단국대 시디과 교수)

위의 글을 보면서 가소로움을 느낄 뿐이다. 그것도 글이고 생각이라고 적었는지 안 적음만 못하다 , 아니 디자인을 하는 무리들의 생각이 전부 이정도로 되먹지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림은 역시 위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마치 안경처럼 그려 놓았는데 솔직히 이 따위도 그림일까 한심하다.

자 그의 너무도 평범하면서 가소로운 글을 보자.

   원은 태양의 상뭐이며, 태양은 곧 광명이다.

인간에게 있어 광명은 눈동자의 존재를 확인함에서 비롯되며 눈동자는 뭐시하는 기능을 갖음으로써 그 가치가 추인된다.

현철한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뭐시’는 세상이 밝게 보일 것이며 우매한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뭐시는 탐욕과 허구만이 A보일 것이다.

밝게 보인다는 것은 광명이며 탐욕과 허구는 암흑이다. 원상뭐으로서의 두 눈동자는 광명이며 희망일 뿐이다. 

■ 자연사 람간의 조화

■윤수근(동래여전 교수)

역시 그래픽의 수준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캔트지에 물음표를 몇 개가 겹치게 그려 놓고 물음표에 해당하는 아래 점은 달걀로 표현하고 그 속에는 우주를 담았다. 제법 생각을 한 것을 칭찬하고 싶다. 하지만 이 정도의 장난은 누구나 칠 수 있다.

그의 글을 보자

   사회의식의 다양한 형태, 정신생활 및 인간 활동의 영역은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영역을 무한의 원과 유한의 원으로 시각화하여 우리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과거의 어려웠던 점을 무한으로 현재의 불확실성을 의문으로 미래는 밝은 사회, 건전한 의식 및 생활이 될 것이라는 유한으로 답하여 미래는 희망찬 사회가 될 것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 원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너무 많이 아는 체 한다.

불가시의 진리세계를 불상이나 십자가로 형상화하였으나 오늘에는 이 모두가 일월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이관형(홍대 응미과 졸. 동대학원 시디 전공. 광주대학교 산디과 재직)

검은색 캔트지에 무슨 글자를 누렇게 써 놓았다. 그리고 크레용색깔이 찍찍 그려져 있다. 제일 아래에 동그라미가 작게 하나 있다. 역시 성의가 너무 없다. 이것도 작품이라고 내었는지 한심하다. 제목이 거창하다. 그림도 그림 갖지 않는 걸 가지고 말이다. 한마디로 발광한다.

약간 돌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쓸 리 없다.

   불가시의 진리세계를 불상이나 십자가로 형상화하였으나 오늘에는 이 모두가 일월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평화와 진리, 완성

■이극(한양대 사범대 응미과 졸. 계명대 교육대학원 졸. 경원전문대 상디 교수)

왜 나비를 중간에 그렸을까. 나비 효과를 노리고 그랬을까. 색채가 알록달록 한 것이 성의는 대단하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그러나 말이 얼분스럽다. 나는 상징적으로 의미한다는 걸 싫어한다.

얼분이 가하면 반드시 또랑이가 되는 법이다.

   원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으면서도 원이 내포하는 의미는 다양하다.

원은 원형이 주는 형태의 완벽함으로 해서 평화와 진리, 완성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완성을 향한 일치 화합, 조화, 통일을 위한 다양한 것들이 서로 조화되어 평화와 진리를 추구하는 원 상징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역시 디자인에서 한 발자욱도 넘지 못하고 있다.  

■ 오묘한 조화가 모두 다 진리

■이명호(홍익대 도안과 졸. 동 산미원 졸. 경주전문대 교수)

그래도 좋은 그림이다. 울릉도에서 바라본 밤바다와 둥근 달이라는데 그럴듯하다. 회화는 될 수 없지만 키우면 좋은 작품이 나리라. 그러나 말이 많다. 씩씩은 원을 그리고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마치 원불교의 뭐나 되는 척 하는 게 좀 보기 싫다. 사족을 너무 달았다랄까.

그의 맹꽁이 글을 보자. 자기의 직분이 있음에도 철학자를 능가하는 척 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차라리 시를 써라 시를 써.

자 그의 글을 한번 보자.

   내가 이 땅에 태어나고 자라나서 이런 저런 일들로 얽혀 살다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것이 어쩌면 짧은 여행의 한 부분같이도 생각된다. 더욱이 대자연 앞에서 때로는 생명력의 무기력함을 느끼고 자칫 오만했던 날들을 후회하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는 그 오만한 조화가 모두다 진리이다. 그러기에 나는 그 속에서 생의 활력과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산책길에 바라보는 노을. 날아가는 새잎이 다 떨어져버린 나무. 그 위에 모습을 들어 낸 새집, 작은 풀들의 엷은 움직임, 솔숲을 지나가는 바람소리...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러한 자연현상들을 그래픽으로 ,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또는 다른 형태의 작품으로 표현하면서 세상 살아가는 멋과 겸허한 마음을 터특한다.

얼마 전 울릉도 여행 중 밤바다와 둥근 달을 보았다. 달은 달무리와 함께 동심원으로 흐르고 물결위에 달빛은 찬란히 흔들리고 날아다니는 별빛을 오징어의 혼으로 느끼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마무리 지었다.  

■ 환상과 창조의 샘

■이명호(강원대 미교과 졸. 홍익대 산미원 졸. 강원대 미교과 교수)

검은색 캔트지에 제일 아래는 우리 고유의 태극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는 디스켓이 있고 수많은 둥근 원들이 확산되었다. 예술이라 하기엔 아직도 너무 멀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 하지 않음이 마음에 든다.

■ 원(圓)

■이몽룡(광주대 산디과 졸. 조선대 대학원 응미과 졸. 동신전문대 응미과 교수)

하얀 캔트지에 중앙은 둥글게 도너스를 하나 그리고 사방으로 비상탈출구 무늬를 그렸으며, 도로변의 표지판을 연상시키는 게 하나 서 있다. 그림이라 글 것도 없다. 디자인은 이래서 한심하다. 그러나 글 쓰는 솔직함은 인정할만하다. 왜냐하면 스스로 무지를 인정하였으니까 말이다.

하긴 우주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수밖에

   자연스럽게 원을 하나 그렸다. 하얀 종이 위에 한동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더 이상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원불교를 상징하는 것이냐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얼 의미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대신에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벽면에 걸린 원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키운다.  -원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키운다니. 관두라. 웃기는 잡소리 말고.

■ 원-신성한 영역의 특미

■이병천(홍익대 도안과 졸. 한양대 응미과원 졸. 한양여전 인테리어 교수)

캔튼지에 1993 우주일원상전 원광대학교 원미술연구회라 세로로 쓰고 막대처럼 세로로 즐을 긋고 그 안에 여러 원을 그렸다. 이것을 우주라 하긴 정말 한심스럽다. 또한 남의 글을 옮겨 놓는 거는 억수로 좋아한다.

남의 글을 옮겨온 그 뻔뻔함을 보자.

   원은 언제나 영원을 나타내왔으며 특히 만다라적인 입장에서는 전체를 상징하는 근본적인 형태로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신성한 영역을 구획 짓는 의미로, 또한 고착과 정신집중을 의해 해왔다. -W. 튜거-

원형이 지닌 운동감과 완벽함. 이것을 시지각적입장에서는 원이 여타의 도형에 비해 가장 강력한 시선 흡인력을 갖는 것이라 설명한다. 즉 자극이 지각에 어떤 둥근 특질에 대한 단서를 주게 되면 지각은 언제나 둥근 특질을 포착하려 한다는 것이다. - 루돌프 아른하임- 

모르면 가만있을 것이지 남의 말을 빌려 마치 자신의 말처럼 하는 행위는 참으로 비겁하다. 그림 역시 컴 그래픽인데 아주 비겁하게 그린 것 같다.

■ 천진난만한 방자함과 무지의 소치

■ 이봉섭(홍익대 동 산미원 졸업, 영남대 산디과 교수)

연초록 바탕색에 불랙홀같이 깜깜하게 원을 그리고 원 안에 빨간 달 같읕게 있다. 또한 아래는 희미하게 달무늬를 그려 넣었다. 무엇을 조금 안다. 말이 솔직하고 자신이 우주의 어디쯤인가를 잘 알고 있다. 사람이 배워서 그런지 솔직 단백하다. 솔직히 우주가 어떠니 하는 디자인 교수들이 우주를 뭘 알기나 하겠는가.

이봉섭의 언어에 찬사를 보낸다. 천 마리 닭이 있으면 한 마리 봉이 있다고

그의 글을 보자.

  원과 말과 글로 이야기 해보려하니 시작도 끝도 어림짐작도 안 간다. 그저 머리엔 굉음만 이어지고 깊고 새카만 작은 흑점이 칡흑같은 어두움에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 잡혔다.

그 안에 빨간 세월이 있고 그 주위를 검고 차가운 영혼이 떠돈다. 원을 그린다는 행위는 인간의 천진난만한 방자함과 무지의 소치가 아닌가? 

■ 여름밤 하늘의 환상

■이상복(여)이화여대 섬유예술과 졸업, 한양대 응미과 원 졸업. 단국대 시디과 교수)

  원은 인간의 마음을 편안한 곳으로 유도한다.

또한 인간은 모든 편안함과 안락함을 원에 비유한다. 한여름 복잡하고 답답하고 소음으로 가득찬 이 대지 위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밤하늘을 수놓은 장관이 펼쳐지는 먼 우주의 세계로....

여름 밤하늘을 향해 무지개를 바라보며 멀리 달려가는 편안한 마음을 CG를 이용해 표현해 보았다.  -잘 먹고 잘 살면서 “이 대지 위를 떠나고 싶다‘니 가소로운 일이로다. 마치 자신이 뭐가 된 줄 착각하고 있다. 나는 이래서 디자이너가 싫다.

정말 배부른 소리한다. 말도 말 같지 않은 소리이니 우습다 그리고 가소롭다. 대지 위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뭐 밤하늘을 수놓은 장관이 펼쳐지는 먼 우주의 세계로

정말 가소롭다. 그림이란 것도 볼 것이 없다. 감청색 바탕에 무지개가 하나 있다, 끝없이 펼쳐진 그물에 복판이 내려앉는다. 블랙홀의 세계를 연상시키려 한 것 같다.

■ 원과의 만남은

■이인자( 홍익대 미대 및 동대학원 졸, 한양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경기대 산디과 교수)

검은 바탕에 무수한 불등이 날아오르고 스님 한사람이 외친다. 그러나 그림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의 글을 보자

  우주적 진리 속에 나를 던져 나와 우주가 하나같이 둥글다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로서 내가 나일 수밖에 없음을 시인하는 일이며

우주의 모습과 꼭 닮은 내가 일상적 삶의 고통을 다시 기쁨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기본적 조건이 되는 새로운 자각-즉 너와 내가 미록 모습과 생활예식은 서로 다를지라도 알고 ?면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불러 일으켜 주는 자아성찰의 장에서는 우주적 합일이 이루어진다. 

■ 원은 순수하고 무한한 것

■이재익(하양대 응미과 졸, 서울대학교 환경디자인 졸. 한양대 이학박사, 부천전문대 교수)

디자이너들이여 이글은 필히 읽으라.

놀라운 일이다. 디자이너 중에서 이런 천재가 있다니, 부디 대성하길 바란다.

인물이 들어간 그림이 아마도 처음 보는 느낌이다.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다. 원에 대해 거창하게 지 까짓것들이 신이나 되는 양 얼분을 떠는 80여명의 디자이너와는 그 수준이 다르다. 역시 서울대학교란 무서운가보다. 물러남과 나아감을 참 잘 안다고나 할까. 원불교에 희롱당하지 않는 자기 방식이 돋보인다.

그의 글을 너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정말 고맙기까지 하다. 이 미치광이 디자이너 교수들이 하는 해우세와 그 수준이 월등히 다르는 것이 기상천외다. 그의 글에서 재미있는 주장은 디자이너는 절대로 화가나 작가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데 있다. 사실 디자이너들은 꼬대기고 있다. 여기 103명의 디자이너 중에 우주를 논하는 멍청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의 솔직한 글을 보자

   디자인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공감과 공유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디자이너 그 자체로 만족해야지 결코 작가나 화가가 될 수는 없다. 항시 대중을 의식하고 시대를 인식하고 주변상황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순수함의 상징이자 무한함의 표상인 원의 세계는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져가는 것 같은 안타까움으로 서글픔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더구나 처자식들에 시달릴 때면(?) 그 강도가 정도가 더 진하게....

그러나 나는 자위해본다. 원의 순수함과 무한함이란 그렇게 단순한 일면성의 개념은 아니지 않은가?

순수함도 무한함도 그 이면의 한 귀퉁이에는 그와 반대의, 다른 방향의 다른 측면의 성질들이 살아 숨 쉬지 않을까? 이것과 저것, 그 양면성의 개념은 아닐까? 물론 정답은 없으며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모든 사물과 현상을 양면성인 입장에서 보고 느끼고 해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대학의 시각 디자이너 교수들은 열 번 더 읽고 감동받길 바란다. 이 멍청한 촌자(者)들아

■ 미완성의 작품

■이재희(홍익대 및 동 산업미술대학원 졸, 공주대학교 미교과 교수)

미색도화지에 화면을 꽉 채운 둥근 원이 있다. 아래는 검게 처리하고 슬라이더 필림같은 걸 그려 그 안에 원이 보이도록 하였다. 무언가 맛이 조금 있는 게 특징이다. k인치고는 제법 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을 본 순간 아하! 이 사람도 착각하고 있구나. 자신이 화가인 줄 아는구나. 그러나 시각 디자이너는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화가일 수는 없다. 왜냐고, 그대들은 약았으니까. 꼴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다. 하긴 시각디자이너가 화가라는 착각 속에 있으니까 행복할 수밖에.

자 그의 허구적인 글을 보자.

   인간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이며 어느 시간인가?

화가가 완성을 앞둔 작품의 마지막 마무리에 혼신을 쏟을 때, 이 미완성의 작품이 작가자신과 관객에게 보여줄 어떤 기대감으로 떨릴 시간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며 시간이라고 누구말했던가.-

작품의 구상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긴 장마의 지루함과 불편함보다 더한 살을 오려내고 뼈를 깎는 아픔과 나는 싸워야 한다. 오늘도 이 완성을 앞둔 어떤 기대 때문에 작업은 이어지고 있다.  

■생각하면 그리움에 가슴 아픈 -

■ 이정호(계명대 응미과 졸. 동국대 교육대학원 졸. 경원전문대 상대과 교수)

그의 글을 보니 솔직함이 참 마음에 든다. 기본적 인간이 된 사람이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검은색이 칠해 있고 중간에 원 모양이 있다. 

그래도 우주적인 냄새가 풍기도록 그렸다. 성의가 대단하다. 뭔가 인생을 조금 아는 눈치다.

솔직한 그의 글을 보자

  도대체 가슴으로부터 일어나는 알지 못할 이 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소리의 떨림이 손끝으로 전달되어 누군가에게 말하고픈 완성된 시각 언어로 만들어지기까지 못내 부족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건 아직도 내 삶의 경험이 풍족치 못해서 인가. 아니면 내내 가슴이 텅 비어 공허한 소리의 울림밖에 없어서 인가.

우주를 본다. 내 가슴에 있는 더 넓은 우주다. 그곳에 그리움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그 곳에 있다. 느낌만으로 나는 꽉 찬 가슴으로 산다. 생각하면 그리움에 가슴 아픈-그리움을 충돌질주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밤이 새도록. 내 삶이 다하도록-. 

■ 하얀 화지를 대하며

■이호명(홍익대 및 동 산디원졸, 인전전문대 공예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제법 머리를 썼다. 우주에 대해 엄청 말을 한다. 좋은 일이다.

그의 글을 보자.

  항상 작업 전 펴 놓은 종이는 온갖 세계의 형태를 온 몸에 그득히 담고 있는 듯 보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가 아니라 느낌으로, 냄새로 내 주변을, 나를 휘감아버린다. 펼쳐질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또 한 번 나의 배설물(?)이 쏟아질 위치들을 잡아간다. 스스로 자리 매김을 하고 그 작은 화면은 금방 나와 한 몸이 된다. 고된 몸놀림이 몹시 나를 지치게 하지만 잠시 후에 벌어질 하얀빛의 율동이 나를 진정시미고....

이제 조금은 일그러지고 싶다. 작은 몸놀림을 더하고 싶다. 작은 세계지만 아름답고 예쁘게 순하게 되어야지. 작고 하얀 원점에서 또 내일의 출발을 기약하면서  

■ 모든 시대정신의 총체인 원 상징의 의미

■임경호(영남대 응미과 졸, 홍익대 산미원 졸. 영진전문대 산디과 교수)

원에서부터 자연생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지 모를 일이다. 검정색 캔트지에 중간에 역시 원을 몇 개 그려 놓았다. 새와 사람과 짐승과 물고기 형상을 그려 놓았지만 우주 혼은 다 웃기는 짓이다. 솔직히 이 짓도 오래하면 도사가 안 되겠나.

그의 글을 읽어 보자.

   원 상징에 대한 테마를 고민하다 보니 원은 살아 숨 쉬는 우주의 숨결임을 깨닫게 되었고, 원이 함축하는 의미는 도형이 아닌 생명체로써 인간성 회복과 더불어 자연에로 복귀하는 의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원은 우리 인간의 정신이자 현현하는 우주혼의 질서이다. -

얼마나 가소로운 말인가. ‘원은 살아 숨 쉬는 우주의 숨결‘이란다. 견(犬)소리 작작했으면 싶다.

■ 천지말분전-염말생전 소식

■임창윤(홍대 도안과 및 동 산미원졸업. 서울예전 시디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검은 색 바탕에 한의학에서 잘 표현하는 인간을 그려 놓고 원을 크게 그렸다. 이것이 무슨 짓이니 스스로에게 반문해보라. 얼마나 맹랑한가를. 그래도 성의 하나는 대단하다. 스승을 잘 만나면 그림도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통일과 화합 그리고 단결

■임춘택(홍대 응미과 및 동 산미원 졸. 건국대 산디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웃기는 견(犬)소리 한다. 회색빛 캔트지에 사면이 빨강 초록 파랑 검정으로 나누어지고 그 위에 원을 크게 그렸다. 원둘레에는 온갖 삼각형이 수도 없이 많다. 뭘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야 이것도 그림이냐. 뭐 “원은 온 세계를 포용하며 통일과 화합 그리고 단결을 상징한다. 인류는 하나 지구도 하나 우주도 하나이다.”웃기는 소리한다. 무슨 종교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그게 우습다. 그 수많은 교수 중에서 일개 교수가 할 말이 그리도 없는가.

그의 글을 보자.

  원은 모든 형태를 하나로 모은다.

원은 온 세계를 포용하며 통일과 화합 그리고 단결을 상징한다. 인류는 하나 지구도 하나 우주도 하나이다.

오늘 날 지나치게 흐트러져가는 우리 사회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의 모음을 바라는 뜻에서 오늘도 ‘원’을 생각한다.  

■ 자뭐(옥편찾기 귀찮아서)

■장권봉(서울대학교 응미과 졸, 경희대학교 대학원 졸, 인천대학교 교수)

컴퓨터 그래픽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정도 성의를 다해 그렸다. 위는 달 모양의 노란 선과 속은 검게 되어 있고, 아래에는 화병이 쏟아지고 테이블 모형이 있다. 솔직하긴 솔직하다. 그래도 서울대 미대가 좀 다르기는 다르다. 모르는 걸 아는 체 하지 않은 게 마음에 든다.

그의 글을 보자.

   나의 그림의 테마는 입(어가리)로 정했다. 항상 나의 그림에는 달이 있다. 달은 원이나 우주를 가르킨다. 또 진리도 뜻한다. 밝은 달빛 아래에서 자기의 소신을 다하고 참다운 누리에서 살고 싶다. 없는 자에게 먹과 같이 검은 물체가 가리어 어둡게 하지만 그 가리움이 일식처럼 금뭐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돌고 도는 원리

■장범순(홍익대 및 동 산미대학원 졸. 동명전문대 시디과 교수)

중앙에 도너스 모양의 커다란 원을 그리고 나비와 번데기와 꽃을 그려 놓았다. 컴퓨터 그래픽은 아니다. 미술에 성의를 다하였는데 그의 글이 그림보다 너무 얼분스럽다.

그의 글을 보자.

  법칙천지란 말도 있듯이 우주의 자연법칙과 생물의 생존법칙 및 인간의 삶의 괘도는 스스로 순환의 원리를 지키고 따른다.

작은 순환에서 큰 순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흐름과 법칙은 일원상을 갖춘다. 이런 원리를 지키고 따를 때 모든 것이 평화롭고 순환하며 ,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사고의 배경을 가지고 우주의 법칙 생물의 순환법칙을 형상화해 보았다.  -본인의 말처럼 우주의 법칙을 형상회본 것이지 우주를 깨닫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일원상진리불

■장병석(홍익대 산디 졸. 효성여대 시디과 교수)

컴 그래픽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이 은은하다. 솔직하게 무언가를 얘기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 산다는 게 하나의 꿈

■장순석(중앙대 학부생활과 대학원 졸. 동덕여대 산디과 교수)

나 자신으로 하여금 산다는 게 하나의 꿈이다. 그 꿈 자체가 크고 작음에는 관계하지 않고 다만 나의 예술세계는 다시 깨어나는 새로움으로 꿈같이 창조하는 이상일 뿐이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수많은 원 모양의 흰색이 화면을 꽉 채운다. 그리고 그 중간으로 작은 원들이 있다.

그래 그 말은 옳다. ''산다는 게 하나의 꿈‘은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예술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습다. 이런 걸로 자신의 예술세계가 과연될까.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다.

그의 글을 보자.

   나 자신으로 하여금 산다는 게 하나의 꿈이다. 그 꿈 자체가 크고 작음에는 관계하지 않고 다만 나의 예술세계는 다시 깨어나는 새로움으로 꿈같이 창조하는 이상일 뿐이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수많은 원 모양의 흰색이 화면을 꽉 채운다. 그리고 그 중간으로 작은 원들이 있다.  

■ 현대의 비극

■정성환(홍익대 응미 졸 및 동 산미원 졸. 전북대 산디과 교수)

한심한 사람이다. 귀신 나오게 혼란하게 하여 두었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화면이 꽉 차도록 원형태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자신이 이 따위 것에 무슨 생명이라도 건 것 같다.

그의 글을 보자.

   ‘예술가(기술자)’는 만드는 방법 뿐 아니라, 사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플라톤-

현대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싹 뜨기 시작했다. 도덕적 통제 없는 무절제한 상업주의에 의하여 지구촌은 파괴되고 있다. 이제 물질을 신용하는 정신문화를 확산시킴으로써 현대병을 치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우주혼 일월상전’은 대전 엑스포의 의미를 물질과 정신이 조화된 참 문명 세계를 구체화하는 열람전이라 생각한다. -의미도 없는 그림을 그리고 대단한 의미를 주려 한다.

우습기 그지없다.

■ 예술가와 철학자

■정수아(서울대학교 산디과 졸 및 동대학원 졸. 오산전문대 산디과 교수)

검은색 테두리가 있고 달팽이의 원처럼 동글동글하게 원을 그렸다. 원 속에서 수없는 영영 알파벳들이 있다. 컴 그래픽이다.

그는 조용하게 말한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아래 그의 글사 람용의 글을 보자.

  예술가는 아름다움의 표현에 관심을 모으지만, 철학자는 진리의 해부에 관심을 모은다.-I Edman-

그러나 미와 진리는 별개의 세계가 아닌 하나의 세계다.  

■ 무심코 그리는 것이다.

■정신공(홍익대 미대 졸. 성균관대학교 산디과 교수)

컴 그래픽이다. 무언가 신비감이 감돌도록 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무수한 점들의 둥근 원 속에 암석이 하나 있다. 아마도 운석이지 싶다. 그래도 인간적이다.

그의 솔직한 답변의 글을 보자.

  작품세계에 있어 소재는 자연 현상 뿐만 아니라 우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다만 작가의 시각과 느낌이 판이한 현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웅변을 필요하지 않는다. 무심코 그리는 것이다.  

■ 간결한 형태에 강한 이미지를

■정호기 (계명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계명전문대 교수)

야 이것도 그림이니, 니 꼬라지를 알라. 역시 컴 그래픽이다. 가로가 세로보다 길게 되었는데 중간에 원이 하나있다. 그리고 바깥쪽으로 토막 난 선이 있다. 동그라미 안에는 회충같은 게 4마리나 있다. 이건 완전 코미디다. 이런 정신으로 미술하면 뻔 하지 않을까.

자, 그의 글을 보자.

   자연의 무수한 질서 속에서 선택한 단순하고 순수한 부분들을 간결하게 추구하며 주어진 공간 내에서 변화를 만들려고 늘 시도하지만, 그것은 항상 아쉬움과 부족함으로 귀결되고 만다.

형태의 간결함이 강한 이미지를 주는 연유는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생활 패턴들이 더욱 단순화되고 스피드화된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실체화시키는 조형의 내용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또한 감각적 요소가 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런 조형의 내용과 감각적 요소들을 색과 형태로써 간결한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있다. 이것은 시각적 사고의 변신과 창작을 위한 것인 바, 새로운 조형의 세계는 항상 변화를 위해 존재하며 조형의 변화는 창작에 의해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 인간이 분리(分離)되어 가는 외로운 우주

■정희종(한양대 응미과 및 동대학원 졸. 한양여전 산디과 교수)

그림은 설명하여 무언가 꿰어 맞추려면 안 된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그의 말대로 7개의 원이 있다. 그게 어쩐다는 말인가.

자 그의 글을 보자.

  오늘날 인간들의 정신적, 물질적 소유욕은 끝없는 문화생활에 편승하여 균형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바 모든 것이 포화상태로만 팽창되어가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기본적 욕구는 급기야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무서운 이해관계 속에서 점차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현실로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전 세계적 현실을 지구전체의 인간들의 문제로 보고 주제설정을 ‘인간과 분리되어가는 외로운 우주’라는 내용으로 표현양식을 시도하였다. 화면에 나타나는 일곱 개의 원은 태양과 행성을 의미하며 하단부분에 묘사된 추상적 mono-type은 자구와 인간들의 복합적인 이해관계를 melancholy하게 묘사하였다. 특히 상단부분의 이미지는 우주만물의 특성을 의미하는 평온하며 지속적인 우주의 신비를 표현한 것이다.  

■ 원 철학의 추구

■조무광(홍익대 시디 및 동 산미원 졸. 부산여전 산디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되지도 않은 작품에 억시기 고생이 많았다. 한심하다. 땅콩볼 같은 게 가로 5개, 세로 8개가 있다. 우리가 흔히 먹는 땅콩과자를 너무 닮았다. 솔직히 이런 것도 그림이니, 그리고 원 철학의 추구라니.

아는 것도 없으면서 얼분을 떤다.

자 그의 글을 보자.

   우주, 지구, 땅, 패얼, 붓자욱 이 모두가 원(圓)이라는 공간개념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평소 나의 작업에서 찾을 수 있는 조형 요소 중 원이 찾이하는 비중이 가장 두드러지고 강력하다.

원은 무난하면서도 아침의 태양같이 강열하고 정렬적이다. 간혹 따가운 햇빛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원망보다는 귀중하고 소중함을 느낄 때가 더욱 많다.

어떤 형태로든 창작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시각은 원에 대한 추구가 돋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에 따르는 표현기법은 개인의 성향에 의해서 변형되거나 다양한 색깔로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모체로 환한 세상을 그리려는 몸짓, 작품 하나에 배여 있는 웃음과 활기찬 모습을...

보는 이들이여 희망과 기쁨을 가지자. 

■ 전자화면 92-4

■조태병(서울대 미대 조소과 졸, 일본 쯔구바대학 종합조형원 졸. )

역시 컴 그래픽이다. 8개의 작은 TV가 아무런 의미 없이 놓여 있다.

꼴값 떤다. 그게 솔직히 작업이니.

웬 수다는 그리 많고 작품도 아닌 것에 설명이 그리 길구나. 역시 컴 그래픽이다. 무엇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글과 그림이 합일이 되질 않는다. 서울대학 조소과가 아깝다. 하긴 전공을 달리하니 생각도 따라서 꼬랑지에 매달릴 수밖에.

그의 글을 한번 보자.

  우리에게 TV는 밀접한 환경인 동시에 시신경계가 되어 현시점에서 현대 문명의 시신경계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는 TV는 인간정신과 생활자체까지도 변화 시켜 왔다.

본 작품은 이러한 TV가 가지는 정보매체라는 특성을 인간과 유기적인 관계로 유지시키고, 자연의 순환적인 현상에 핀트를 맞추었다.

자연의 순환적인 형태를 상직적으로 나타내는 원은 시작과 끝을 동시에 내포하면서, TV와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으로서의 TV(만들어진 자연)를 연결 지워지는 유기적 관계로 표현하고, 전자적인 창을 통하여 미래 환경인 전자매체를 자연의 테두리 안으로 끌여 들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말만 늘었고 실력은 뻥이다.

■ 일원은 절대적 우주혼

■주창현(홍익대 미대 동 대학원 시디과 졸, 안양전문대 시디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감청색 하늘에서 정자가 막 쏟아지는 것 같다. 밑에는 색깔있는 노랑 빨강 푸른색의 철사동그라미에 정자가 쏟아지는 현상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역겨움이 더해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대단히 떠벌리며 본인이 무엇이 된 양 하는 꼴이 가소롭다. 그러니까 전문대학 교수지 아니면 서울대 교수로 갔을텐데. 불쌍하다. 이 따위의 코묻은 그림을 그리고도 할 말이 그렇게 많았던가.

자 그의 글을 보자.

  우주공간의 원 상징 즉 새 세계의 정신개벽의 진리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속으로 투영됨으로써 육체와 분리된 그 생명체들의 영혼들이 일원을 통하여 절대적인 우주혼, 다시 말해 이상적인 낙원으로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시켰다. 우리 인류가 지향해 가야할 바람직한 세계로 향하는 절대적인 절규이며, 이 일원이 상징하는 인류평화의 이상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본능적인 염원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였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인 혼, 우주, 인간애, 번뇌 등을 존재와 의미로서의 가치로 동시에 나타내고자 하였다. 일원이 포옹하고 있는 지구촌 전 인류의 평화가 바로 우리의 절실한 바램이리라.  

■ 한 생각의 표현 정말 어렵다

■최경석(원광대 동 대학원 졸. 원광 보건대 강사)

혼자서 끙끙 노력을 많이 했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컴 그래픽은 예술에서 10점 만점에 1점을 넘기가 어렵다.

그의 글을 보자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는 그 한 생각을 담아 보고자 붓을 들었다. 그러나 생각과 같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이라면..... 뜻대로 표현할 수 없는 조그마한 마음속의 이 하나가 나를 괴롭게 한다. 하루가 가고 다시 날이 밝아오면 또 다시 이 고통과 함께하는 것이다. 미지의 영원한 이상향을 찾을 때까지...  

■ 지구촌 낙원 공동체는 문화공동체 형성으로부터

■최동신(서울대 음미과, 홍익대 대학원 졸. 홍익대 시디과 교수)

그림은 그래도 성의가 있다. 아니 머리가 있다. 이제껏 작업 중에서 두드러진다 아니할 수 없다. 원에 대한 의미를 잘 담고 있다. 회화적 냄새를 잘 풍기는데 스승을 asks나면 예술이 될 수 있겠다.

본인의 글을 보자.

  원을 통한 평화의지와 그 진뭐의 미를 함께하고 있는 지구촌시대의 낙원 공동체를 이룩하기 위해 다냥한 지혜(智慧)를 지닌 세계의 작가들이 모여 먼저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이 전시회의 작품들은 새 시대를 여는데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대적 뭐표(表)가 되리라 믿는다. 

■ 원으로 표현한 인간의 꿈과 이상

■최병훈(홍익대 미대 졸, 단국대 대학원 졸. 숭의여전 교수)

컴 그래픽이다. 캔트지를 양분하여 커다란 원을 두 개 그려 놓았다. 한원은 검게 한 원은 희게 그렸다. 꼭 어린아이 장난 같다. 솔직히 이게 뭘 말 하겠니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

본인의 말이 거창하다.

   인간의 꿈과 이상을 대변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의 표출을 원이라는 본질적 형상을 통해엿볼 수 있다.  

■ 영원히 홀로 남는 것은

■최성규(홍익대 및 동대항원 졸. 경남대 산디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공상만화 비슷하게 그렸다. 이걸 그림이라 하기엔 낮 부끄럽다.

그의 글을 보자.

  

파도가 스쳐간 자리에....

조약돌이 맞닿은 자리에

아기자기한 소리가 들린다.

늘어진 낙랑장송의

푸르름이

긴 시간을 타고

우주 속에 존재하는 신비의

소식을 듣는다.

그 속에 존재하는

우주의 나이지만

영원히 홀로 남는 것은 둥그런 자태일 뿐이다. 

■인화와 천재지변

■최영숙(효성여대 생미과 졸. 홍익대 원 졸업. 수원전문대 시디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중간에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으며 꼭 시골에서 보뎐 나팔꽃 모양이다.

무엇을 느끼기엔 아직도 멀었다.

나는 그의 말을 부정한다.

  예술가의 창작은 신의 창조와 버금간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 

디자인이 마치 창작인양 하는데 절대 창작이 아니다. 그녀는 무엇을 말하는지 나 자신은 알 수가 없다. 앞과 뒤가 맞지 않아서다.

주인공이 없이는 무슨 적이라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이 개구리에 돌을 던진다.

개구리는 “애들아 너희들은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에 지장이 있단다”라고 말하였다.

같은 말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끼치는 해독은 인재이고, 자연에 의해서 해를 입는 것은 천재지변이다. 개구리에 돌을 던지 아이들은 장난이지만 해일, 홍수, 지진,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은 우주적 입장에서 보면 새 질서의 재창조가 아닌가?  

우주에 대한 재 창조를 어설프게 애기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예술은 시대를 구원한다.

■최용천(홍익대 응미과 및 산미원졸, 서울예전 시디과 교수)

·역시 컴퓨터 그래픽이다. 수많은 점들이 찍힌 것 같은 현상이다. 아마도 60억의 인간을 표현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시각디자이너는 예술가라 하기에는 너무 약았다.

그의 글을 보자

  어떻게 보면 이럴수록 예술가의 정신적 가치가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천마의 말씀 시각디자이너의 정신적 가치는 없다. 그들은 오직 앞만보며 갈 따름이다. 무엇에 재대로 알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확실서의 현대지만 시각 디자이너들 보다는 모든 사람들의 우국충정이 깊지 않을까. 그의 글이 어설프지만 그래도 현대를 이해하려는 구석은 봐 줄만하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을 자기 스스로가 수정하지 않는다면 산다는 의미는 여기에서 끝장이 난다. 질식할 것 같은 불확실성의 현대, 실제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사회연상은 치존 할 수 없는 지경의 무방비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럴수록 예술가의 정신적 가치가 요구되는 것은 아닐까? 

■ 태극의 아름다움

■최우석(동아대 산디 및 동 대학원 졸. 성심외국어전문대 광고과 교수)

그의 말을 빌리면 그림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중간에 원을 그리고 구름문양이 들어감으로 무한한 우주를 비쳐준다. 그리고 태그의 문양이 중간에 있고 아래위로 세 개씩 있다. 그의 글이 솔직히 마음에 와 닿는다.

더 이상의 좋은 글은 없다.

   원의 미적 구상-그 가운데서 음양의 이치를 보여주는 태극의 아름다운 형태만큼 조화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디자인이라고 하는 예술세계는 아마도 인간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그 범주 안에서 시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태극의 변천과정을 인간의 눈으로 재조명하여 한국적인 요소가 지닌 아름다움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기본적으로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다.

■ 원은 합일(合一)

■최인수(개인전 2회. 포항 선린전문대 상디과 교수)

역시 컴 그래픽이다. 이해하기 힘든 그림이지만 물질과 영혼이 한곳에 있음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의 말처럼

  우주 진리와 인간심성의 원리는 하나이다. 그들은 원래 둘이 아닌 합일의 모습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림과 글의 내용이 상당히 어울린다. 기본을 갖추었다.

■ 원-자연에의 복귀-

■최호천(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시디과 졸. 유한전문대 시디과 교수)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자가 뭔데 온갖 얼분을 다 떨고 있는지 뭐 할려고 전문대학 교수하는지. 서울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지. 최호천이란 이 작자 앞에 모든 철학자들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지 않겠나. 차라리 원불교의 교주를 해라. 그림이라는 것도 바다의 조개와 소라 작은 돌멩이가 되어진 곳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놓았다.

역시 컴 그래픽이다.

제법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을려고 하는데 아직은 멀었다. 그의 글을 타이핑하여 실어야 함에도 싣지 않음은 타이핑할 시간이 아까워서다.

그의 글이 보고픈 자는 일월상전 238쪽을 보면 된다.

■예술은 항상 새로움과 아름다눈 미를 추구한다.

■한백진(홍익대 및 동대하원 졸. 단국대 산디과 교수)

제범 예술의 흉내를 내었다. 무언가 원근감을 알고 한때는 회화를 하고픈 꿈이 아니 있었겠나 싶다. 역시 컴퓨터 그래픽이다.

재색빛 나는 종이위에 끝없는 공간이 있고 위쪽으로 원형이 두 개 포개어진 듯 그려져 있다. 아래로는 원반형태가 구른다.

그의 글을 보니 너무 솔직해서 마음에 든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 둘 것은 컴퓨터 그래픽은 예술이 아니다. 스승을 만나면 예술이 얼추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의 아래 글을 보자

  우리의 깊은 내면세계어서 미를 추구하는 본능적 의지를 확산시켜 우리시대를 늘 새롭게 하고 신바람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본래 사명인 것이다. 그런 즉 진리를 체받아 사는 것이 바로 예술가 자신인 것이다.  

■ 한욱현(홍대 미대 및 동 산업 미술원 졸. 숭의여전 교수)

역시 컴퓨터 그래픽이다. 흰색 바탕에 중간에 노란색 원을 그렸다. 그리고 정사각형 같은 마름모를 그리고 이래저래 몇 개의 원의 암시를 넣고 정 중앙에 또 원을 넣었다. 꼭 도로표지판 같다. 어린아이의 그림치고는 아주 재밌다. 그대가 무슨 철학자니? 부적이라면 제법 재미가 있다.

   원 그것은 시작, 과정이며 종결을 의미한다.

그것은 질서이며 인생 역정이다.

그것은 완벽함이다.

인간은 항상 그것에 접근하려 한다.

화려한 날은 가고 인생을 마감하게 될 때 하나의 원이 남게 될 것이다. -시를 써라 시를 써

■ 꿈과 신념

■한창규(원광대 응미과 졸. 단국대 대학원 응미과 졸. 전북 산업대 산디과 교수)

역시 컴퓨터 그래픽이다. 엷은 흰색의 바탕에 사방에 ㄱ ㄹ ㅋ ㅎ 이 씌여 있고 중앙에 정말 도너스 같은 게 하나 있다. 그리고 한글 자음이 ㄴ에서 ㅍ까지 써 놓았다.

   너의 생각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틀리다하여 네 의견을 고치는 것은 좋지 않다. 다수의 의견이라도 무조건 따른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기 때문에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S. 슈츠-  

당신이 솔직해서 좋다. 우주의 신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그대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최고다. 인간이 좀 되었다랄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스승이 누군지 몰라도 좋은 것 같다.

■시작은 끝 부분은 곧 전체

■허진영(동아대 대학원 졸. 동명전문대 시디과 교수)

컴퓨터 그래픽이다.

화면을 꽉 차는 푸른 원 속에 다섯 개의 원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고 그 큰 원 안에 수많은 동그라미가 색색으로 곽 있다. 어쩌면 아이들이 비누방울 놀이처럼 재미있는데 작자는 엄청 고생하였다. 그러나 글을 읽으면서 이 작자의 한심한 사고를 읊을 수 있었다.

야, 솔직히 이게 뭐니? 아이들 장난하니? 말이 얼분스럽다.

  작은 것이 모여 단순히 큰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 듯 그 작은 것 또한 부분의 집합체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절대 작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절대 큰 것 또한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원의 본질이 윤회와 무한이라는 보편적인 시각으로 볼 때, 부분과 전체의 의미 또한 처음 시작의 작은 것과 끝의 큰 것이 사로 잇닿아 원의 보편적 본질과 부응한다는 의미에서 각양각색의 작은 원은 독립된 전체의 원임과 동시에 전체 원의 부분이며, 그 전체 원 또한 독립된 부분 원임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 그래 본인은 원을 그린 것이지 윤회니 무한이니 하는 글을 써서는 아니 된다. 부끄럽지도 않은가. 우주의 티끌인 주제에 원을 가지고 한참이나 자위답게 떠드느냐 말이다.

후기

103인에 대한 시각디자이너의 평가 작업이 끝났다.

1993년에 이 사건이 있었으니 2000년 지금 와서 돌이며 보니 아득한 세월이다. 어느새 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103인의 시각디자이너 중에서 예술을 하는 자가 단 한명이라도 존재되어 있으면 좋으리라. 103인중에 대학의 교수가 무려 97인에 달하지만 그들 자신의 고뇌를 풀 방법은 없었으리라.

시각 디자이너에 대한 너무 엄격한 심판이 아니었나 하고 조금 미안한 감도 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7년이 지난 지금 이왕 분석하고 비판하는 거

내가 그들의 간지러운 등을 끌어주는 등글개나 목욕탕의 때밀이가 되어서는 아니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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