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시민게시판

시민게시판

보안과 관련되어, 홈페이지에 접속하신 후 화면 이동 없이 30분이 경과되면 자동으로 로그아웃되오니 작업시간에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게시판 글쓰기를 하실 때, 세션 종료로 작성하신 글이 모두 삭제될 수 있으니 반드시 다른 곳에서 먼저 글을 작성하신 후 복사하여 붙여넣기 해서 글쓰기를 완료하시기 바랍니다.

  • 이 게시판은 자유롭게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며, 자율과 책임이 공존하는 사이버 문화 정착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통합민원신청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 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개인정보 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유출은 법적 문제로 확대될 수 있으며, 불법 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벌칙(징역 또는 벌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개혁의 주체세력은 공직자( 2-2)

내용

< 식품안전도 개혁이라면 개혁의 주체세력은 공직자들이다 >


작성자 : 안정은 ( 제안자)

제 목 : 윤석천 구청장, 재임 중 왜 물러났나 ?



윤석천 금정구청장은 제안자와 같은 고향의 공직자로 정년 퇴직후

민선1기 첫 금정구청장이 되었다. 그래서 한일도 많았다.


그런데 왜 재임 중 중도하차 하였나 ? 바로 돈거래의 건이다.

본인이 금정구청에서 세외수입계장을 맡을 당시 (1997년) 당구청의 직원들과 언론기관으로 부터

들은 소식이었다.

내용인즉 당시 관내 토지가 잘 정리되지 않은 곳에 아파트 건축허가 신축의 민원이 들어왔다.

그 곳은 산자락 아래이나 부산 제1의 국립대학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건축업자(대표 : 박**)가 허가를 낸 모양인데 허가 조건에서 어려움이 있었던지 구청장이 심사숙고를

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다. 그리고 허가가 난듯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방송에 의하면 금정구청장이 이로써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아파트 건축 허가를 내 준후 업자가 3차례에 걸쳐서

구청장에게 직접 금전을 주었다는 것이다. 모두 2,000만원 이하인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은 그 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밝혀졌다는 것인데

이로써 윤석천 금정구청장은 재임에서 중도하차 하게 된 것이다.



" 윤석천 금정구청장은 바보 구청장이다 " ..........

김영삼 정부에서 (처음으로) 1993년 5월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하도록 하였고

아후 1993년 8월경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였다.

그런데도 공직자(민선구청장도 공직자이다) 가 아파트 건축물의 허가 후에 2천만원도 안되는 돈을 받고 물러나다니....

당시가 1997년경이라면....

그것도 이전 (퇴직전) 금정구청 촘무과장을 하면서 당시 박재춘(여성) 가정복지과장이

금전문제로(1989년 초경, 금정구청 개청식날 식장에 꽃꽂이를 한 관내 여성에게 과장과 안다는 사유로 꽃꽂이 대금 30만원을

지급하지 않고 가로채고, 매달 미성년 세대주에게 전해달라는 불우이웃돕기의 결연금을 전하지 않고, 그리고

관내 봉사단체장에게 공공기관에 여름 선풍기 3대를 기부할 것을 강제하는 등) 부산시청으로 부터 직위해제가 된 바 있다.

당시가 안상영 부산시장이 재임할 당시였는데 금전 부조리로 시끄러울 당시 유방암이 발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박재춘 가정복지과장은 부하의 계장(두 여계장)에게 " 건강이 ?찮다" 고 하고 계속 수술을 아니하자

금전부조리 건으로 신고를 받은 부산시청의 기획감사길에서 박재춘 과장을 직위 해제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과장은 수술을 않고 복직하여 근무를 계속하다가

사망 후에야 유방암으로 죽었음이 본인과 금정구청 공직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이다.

건축 허가 후 뇌물을 받고 물러난 윤석천 금정구청장은 바보 구청장이 아닌가 ? 맞는가 ?


-- 2013. 12. 16(월) --

.
.
.
.
.
.
.
.
.
.
.
.
.
.
.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안서 :
한국전통식품 및 전통양념 제조와 유통에 따른 정부 규제에 관한 고찰과
그 발전방향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1999년 10월 20일- 김대중 정부)

제안자 : 소속 및 직명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감사실,
지방행정 주사 (6급) 안정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서 문 ( 제안서 )


우주 공간에는 위성들이 뜨고 인간도 복제할 수 있다고 떠들어 대는 오늘날에도
60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이웃들이 쓰러질 때마다 그들은 나를 슬프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남은 우리들이 또 다시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다짐을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 중학교 때, 음악 수업 시간 때의 일이다.
얼굴이 웬지 하얀 음악 선생님(故, 김봉진 선생님, 男)께서 우리들이 손톱을 깎고 다니는지,
손수건을 갖고 다니는지, 음악 시간마다 검사하였다. 우리는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한참 후였다. 각암(다리 사이에 혹이 생기는 병이라고 함)으로
돌아 가셨다는 것이었다. 미혼의 선생님이었는데 결혼을 약속했던 애인이 있었던지 애인이
무척 많이 울더라고 같이 전하였다. 한반에서 같이 공부하던 부잣집 외동딸인 봉귀가 갑자기 개명(改名)을 할 때도
우리는 전연 눈치채지 못하였다. 학생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숨긴 것 같았다. 그 당시 우리들을 가르치던
한 유능한 국어 선생님이 갑자기 다른 학교로 가버린다고 문을 잠그고, 울고 법석을 부리던 우리들에게 담임 선생님이
“ 선생님 자신이 스스로 원하여 우리들 곁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울고 말려서는 안된다 " 고 달래 주었던
사춘기의 여학생들이 아니었던가.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들어와서도 안타까운 죽음들을 또 많이 보아왔다.

부산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들어와서 여직원들에게도 잘 대해주던 고(故), 이종열씨 ,
그는 내가 북면출장소 근무할 때, 산하 (아래) 관할동의 하나인 두구동사무소에 한 때 근무하였는데
그 지역은 개발제한구역과 수원 보호 구역으로 묶이어 있는 지역으로서 포도와 당근 등의 특수 작물을
많이 재배하는 동(洞)이였다. 늦 여름 포도가 질 때 쯤, 같이 근무하는 여직원과 함께 포도를 사 먹으러
두구동의 포도 밭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날 우리를 안내해 주어, 달고 단 늦 여름 포도를 실컷 먹었는데
그 계산을 그 직원이 몽땅 하였다. 머리도 명석하고 유머도 있으며 인간관계도 좋아 그 집안도 좋다는 말도 들렸는데
그가 결혼 후 어린 딸 하나를 두고서 죽었단다 (1980년 겨울, 동래구 서 4동 사무소).


부산광역시 동래구청에서 근무할 때, 10명도 안되는 정규 여직원이 계를 만들었다.
달달이 일정한 돈을 모아 부산의 산악회에 끼어 같이 놀러도 가고 또 결혼하면 곗돈으로 선물도 하자고.
또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결혼하면 시부모와 자식, 남편에 묶이는 법이어서 세상 구경이 어렵기 때문이라고.
그 여직원 중에서 나보다 더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던 남숙(여, 故, 김 남숙 - 송도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 )이가
같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사람과 결혼을 하여, 그녀는 남편과 행복하고, 나는 고독이 싫어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젊음을 잊고 공부하는가 했더니 어느 해(1984년 3월) 유방암으로 수술을 하고 나서 3개월 쉬다가 공직에 사표를 냈다는 것이었다.
암은 5년 동안 재발 않으면 산다더니 1989년경 그 남편이 당시 내가 근무했던 금정구청의 기획감사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지방행정 주사 : 6급), 그녀가 유방암이 재발하였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녀의 남편은 나를 그녀 의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나았다고 생각한 유방암이 다시 재발하였음을
그녀가 나를 통하여 알게 된다면 절망하리라는 우려 때문 이였을까? 그 남자의 아내이기에 병든 그녀에게 가 보지도 못하고
그녀는 병이 재발한 지 3,4 년 후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빈소에 갈 때는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1987년 내가 근무하던 동래구 장전1동사무소에서 당시의 사무장으 로 신장염이란 병으로 인공 투석을 하며
죽음과 투쟁하다가 돌아가신 고(故), 우점구씨 (1987년 12월, 6급, 장전1동 사무장, 신장염)


1989년 밤 늦게 구청장님을 댁으로 모셔다 주고 구청으로 돌아 오던 구청장차가 접촉사고가 있어 한 밤중에 그 수습을 위하여
금정 경찰서에 들어서다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고(故), 한만진씨 (1989년 2월, 6급, 금정구청 기획 감사실, 감사계장, 뇌졸중 )


동래구청에서 같이 근무해온 선배 공무원으로 인성이 좋기로 유명하였는데 동래구가 분구(分區)되어 금정구로 넘어 와 금정구 관내 동인
구서2동 사무소에서 사무장으로 근무하다 1990년 12월 위암으로 돌아가신 고(故), 김영삼씨 (1990년 12월, 6급, 구서2동 사무장, 위암).


1992년, 금정구청 민원봉사실에서 많지도 않은 연세에 흰머리를 하고서
구민과 직원을 따뜻하게 대해 주던 고(故), 이 재식씨(1992년 6월, 7급, 금정구청 민원봉사실, 간암).


한 때, 나와 같이 북면출장소에서 근무하면서 직원들을 잘 대해 주고,
또 말을 더듬던 고(故), 이일화씨 (1995년 4월, 6급, 금정구 선동 사무장, 위암)


이 즐거운 세상을 결혼도 하지 않고 왜 혼자 사느냐고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던 정숙희도
1996년 5월 그렇게 즐겁다던 이 세상을 남겨 두고 거짓말처럼 죽었다.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여, 1996년, 7급, 금정구청 지역교통과, 혈액암).


1988년 금정구청이 동래구에서 분구되고부터 계속 금정구청의 통신 기사로서 일해오면서 같은 구청의 여직원과 결혼 후,
딸 하나를 두고서 어느날 부곡동 가까이에 쓰러져 병원에 옮겨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사망한 하태정씨(1996, 5, 7일 사망, 금정구청 통신 기사)


동래구청에 함께 근무할 때 인사 부서의 인사 주무였으며 그 당시 고우 스톱과 술로써 나와 여자중학교 때 한 반을 했던
그의 처를 많이 속상하게 했던 고(故), 박종두씨 (1998년, 5급, 금정구청 민원봉사실장, 간암 ).




오늘까지 살아남은 논자(論者) 본인은 이나마 문명의 은혜에 감사하고 197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의 경제부흥과 자유시장 경제에서 오는
물질적 풍요를 맘껏 누리면서 우리 인간과 또 우리 국민이 보다 더 풍요롭게 살아 갈 수 있는 한편의 논문을 써야 할 지,
아니면 이러한 틈바구니 속에서도 60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쓰러진 고인(故人)들을 되새기며 논문을 써야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이제 더 이상 때 묻을 수 없는 고인들을 생각하며 이 논문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지켜 본 그들 대부분이 천상(天上)으로 가는데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면 결국 남게 될 이 삶의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십년 전 쯤, “성실한 사람이 잘사는 사회를 이룩하자” 는 문화방송국이 내건 슬로건은 경제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였을 것이다.
20년 전, 출생신고 혼인신고 사망신고 등 호적 업무를 오래 담당 하던 선배공무원(女)의 말도 생각 난다.
“ 많이 욕 해라. 욕 들어 먹는 사람이 오래 산다?? 그리고 “모질고 독한 사람이 오래 산다??고 하는 말들은 우리 삶의 주위에 많이
널려 있었어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빨라도 나이 50 줄에 다가가서야 알 수 있다 하였던가

요즈음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4,5년 전, 밤 늦은 시간, 한국방송공사 TV 속의 한 의사의 적나라한 표현처럼, 오늘날도 변함없이 인간의 탄생을 축복하는
이 삶에서 살다 쓰러진 이들을 “패자(敗者)” 라고 표현하고 승자들의 잔치의 틈바구니에서 이미 고인이 된 자(者)들을
되새김하며 쓴 이 논문이 단지 “ 한 우울증 환자의 패자 부활전”으로
팽개쳐 질지, 아니면 늦었으나마 소수의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국민의 대부
분이 다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건강하게 태어나, 이 곳에서 26년 간의 짧지 않은 세월을 공무원으로 봉직하면서 정년퇴임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간 동료들과 또, 추락한 성(性)과 여성을 위하여 형설(螢雪)의 지혜를 짜고 돋보기를 끼고서 오늘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것이 그 전부이기 때문이다.


-- 1999년 10월, 20일, 제안서의 서문 --


.
.
.
.
.
.
.
.
.
.
.
.
.
.
.
.
.
.
.
.
.
.
.
.

< 제안자가 35세에 만난 상관 >


작성자 : 안정은 ( 제안자)

제 목 : 사망 후 보고서 ( 2000. 4. 16 )



윤석천 금정구청장, 감봉 1개월 취소 행정 소송, [ 상고 이유서 88쪽 ~ 100쪽 ( 2002년 7. 22 ) ]


^^^^^^^^^^^^^^^^^^^^^^^^^^^^^^^^^^^^^^^^^^^^^^^^^^^^^^
가정복지과장님의 직위해제와 유방암으로 인한 사망 소식

^^^^^^^^^^^^^^^^^^^^^^^^^^^^^^^^^^^^^^^^^^^^^^^^^^^^^^

시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시장님으로 일하신지도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는가 봅니다.
98년, 지나간 부산광역시장의 선거에서, TV에서 연일 얼굴을 내면서 공공연히 도왔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생각하니 왜 그렇게 열심히 도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박재춘 가정복지과장님(직무대리, 여, 행정6급, 부산대학교 법대 졸, 1988년 당시, 연세 47세경)께서
이미 돌아가셨다는 것을 뜻밖의 소식을 접한 것은 2000년 1월 2일, 일요일, 구청에서 낮에 당직(일직)을 하면서
2000년 새해에 구청장실에 정초의 꽃꽂이를 하러 온 문선생님(문**, 부산에서 제법 알려진 꽃꽂이 선생으로서
서면에서 꽃꽂이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박재춘 과장님은 통도사에서 만난 분이라고 하였음)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믿기지 않아서 “거짓말이 아니냐?”고 하니, 병명은 유방암이라는 것이였고 절에서 올리는 제(祭 : 사람이 죽으면 육체를
떠난 영혼이 이 세상에서의 억울한 일들을 용서하고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가도록 천도하는 불교적 의식)에도 갔다 왔다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언젠가 한번 들었어도 전연 몰랐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박재춘 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되기 전,
사회복지협의회에서 개최하는 모임에 초청장을 받고 참가하였을 때, 행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는데 그 장소에 당시
제가 재학하고 있었던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와 관련된 과목을 강의하셨던 신**교수님께서 눈에 띄여,
일어서서 다가가 인사를 드렸더니 그때 신**교수님께서 함께 벌떡 일어서시면서 (그 큰 키에도 불구하고)저의
인사를 받아 제가 약간 의아해 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이말선 국장님(당시 부산시청의 보사국장)께서 저를 스쳐 지나가면서 귀에다가
“안계장! 박재춘과장님이 유방암이란다”라는 말을 들었지만 과장님께서 전혀 내색하지 않아 그 동안(10여년 동안)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1.
근무할 때, 한번은 병원에 가신다고 하여 이순애 직무대리 가정복지계장(당시 42세경, 본인은 35세경)과 함께
“과장님, 병원에 가셨다더니?”하고 여쭈었는데 “괜찮다”고 하시고는 별 말씀이 없었습니다.

2.
한번은 과장님의 얼굴에 붉은 열꽃과 같은 것이 눈에 뜨이도록 돋아 올라 이순애계장과 함께 지켜보고 있다가 걱정이
되어 “과장님,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하고 물으니 “한의원에서 이 열꽃이 밖으로 나와야지, 안으로 들어가면 치명적이라더라”고만 하셨습니다.

3.
겨울 어느 날, 절에서 좋다고 하더라면서 난로 위의 주전자에 마른 풀과 감초를 물에 넣어 푹 끓여서 차로 드시면서
가정복지과 직원들에게도 몸에 좋다고 하면서 먹어보라고 한잔씩 돌렸는데 그 차의 맛이 무척 향긋하고 좋았습니다.

4.
금정구 새마을 부녀회 업무가 별 것도 아닌 감정으로 과장실에서 부녀회원들을 앉혀놓고 공공연히 새마을 부녀회장(이**, 남편은 부산대학교 교수)을
욕하자 새마을 부녀회의 업무가 총무과 새마을계로 넘어가 버렸는데 그 이후, 부녀회장님을 복도에서 만나니
원래 많지 않던 머리숱에 머리 꼭대기 부근의 머리털이 한 웅큼 빠져 남자의 머리와 같아서 이상하여 물으니 “신경성”이라고 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우리과장님과의 갈등으로 마음 고생을 하여서 그런 것 같아 걱정을 하니
“치료를 받으면 차차 나아진다”는 것이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가정복지과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아 계시던 박재춘과장님께
“이** 회장님의 머리 윗부분이 한웅큼 빠져있어 요즈음 병원을 다닌답니다. 신경성이랍니다” 하고 두분의 감정이 편해지도록 말씀드렸는데
“안계장은 나는 이렇게 있어도 괜찮고 부녀회장만 걱정이가?”하시면서 근간에 보기 드물게 화를 내어 제가 놀라 더 이상 말을 못하였습니다.

5.
박재춘 가정복지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되기 전, 시청 감사실에서 인장을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여 “시청 감사실에서 왜 부르는가?”하면서도
감사실에서 부를 만한 일은 없었기에 가서 보니, 외근부의 복사 등, 근거서류는 이미 갖추어져 있었고, 제가 모르고 있었던 가정복지과장님의
선물 수수(부녀회원에게서 받았다는 한복천?), 가정복지계의 미성년 세대주(가정복지계 소관)에게 관내 여성들이 지원하는 지원금을 과장님께서
전하지 않은 점 등을 밝혀주면서 (저는 당시 부녀복지계장이였으므로 그 사실은 몰랐음) 부녀회장과 과장님과의 갈등 관계를 물어서
처음 부임하여 관내 중요 여성단체장과 여성들의 명단을 달라고 하여 서면으로 인사문을 보내고 나서 며칠 있어도 금정구 부녀회장인
이**회장님이 들러주지 않자(들어와 주지 않자) 많이 기다렸음인지 불쾌하게 생각하여 제가 퇴근하는 길에 장전1동에 사는
이**회장님의 댁에 들러 “회장님, 우리 과장님의 인사문은 받으셨습니까?, 요즈음도 바쁘시지요. 우리 과장님께서 새로 오셨는데
회장님이 들러주지 않으시니 기다리다가 오늘은 좀 불쾌하게 생각하는 듯하여 제가 들렀습니다.”고 하니 방에 들어오라 시면서 역정을 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금정구청의 직무대리 부녀복지계장으로 오기 전, 장전1동사무소에서 부녀회의 업무를 보았던지라 구청에서 전하는 초청장을
구부녀회장(당시 동래구 새마을 부녀회의 회장이였음)한테 제가 전하였는데 워낙 많아서 살림 사랴, 부녀회의 일을 보랴, 바쁜 것은
익히 알아 온 터이니 이해가 갔지만 과장님께서 불쾌하게 생각하시어 귀뜀해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금정구 부녀회장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 가정복지과장의 인사를 앉아서 받겠다는 것은 아니였을 것이며 역정을 낸 것도
“얼마나 눈치를 주었기에 안계장이 나를 찾아 왔나”하고서 미안한 마음에서 낸 역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튿날 즉시 늦어서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기다려준 가정복지과장님을 찾아왔고, 또 과장님은 또 기쁘게 맞았습니다만
이 일로 하여 불쾌하게 생각하며 결재판을 던진 것은 사실이며 그렇다고 결재판을 던지면서 저에게 감정을 가지고 던진 것은 아니였으므로
그다지 신경쓸 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잊고 있었는데 감사실에서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어찌 그리 모르느냐?”는 말을 흘렸는데 저는 그 말을 박재춘과장님의 비리에 대하여 “어떻게 그렇게 모르느냐”로 들었고,
과장님이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듣고 난 지금에야 당시 시청의 감사실 직원이 한 그 말은 과장님의 병을 이말선 국장님께서
직접 귀뜀해 주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모르느냐는 말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6.
시청 감사실 직원이 질문을 끝내고는 감사실의 별실에서 긴 조서를 쓰더니 나의 도장이 필요하다고 달라고 하여 주니 찍은 후,
돌려 주면서 “과장을 집으로 보낸다”고 나즈막하고 짧게 말하였고, 저는 즉시 받아서 “다른데로 발령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는데
더 이상 말이 없었고 저는 구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과장님은 직위해제가 되었는데 구청으로 날아 온 직위해제 사유서에는 저도 보았는데 가정복지계의 미성년 세대주에게
지원하는 지원금을 전하지 않은 것, 가사봉사원들이 관내의 어려운 독거노인 등의 세대를 위하여 부곡동 관내의 가사봉사원의
집에서 김장을 담글 때, 한번 저를 보내지 않은 일(외근부의 결재를 안해 주었으며 저는 당시 별로 개의치 않고
오늘은 내가 나가지 않아도 되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내근을 하였음), 가정복지과장으로 부임해 와서 관내 여성지도자들에게
인사문을 돌린 후, 금정구 새마을 부녀회장이 구청에 들어오지 않자 불쾌하게 생각하여
결재판을 저에게 던졌던 일(당시 구청청사가 장전1동 지하철역의 일부를 빌어서 넓은 공간을 캐비넷으로 막아
각 과의 동향이 옆의 부서에서 알기 쉬운 때였음)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이 일들은 이미 감사실에서 조사가 되어져 있었던 내용임)

7.
금정구청이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장전동 지하철역을 빌어서 업무를 시작하다가 현재의 구청 부지 옆의 빈 공터 위에 가건물을 지어 놓고
개청식을 하였는데, 이날 개청식장의 다과 준비를 저의 계인 부녀복지계에서 맡아 하였는데 개청식장의 꽃꽂이를 과장님과 잘 아는 분이라는
문선생님에게 맡기라고 하여 그렇게 하고, 그 대금 30만원을 과장님께서 달라고 하여 드렸는데(직원 부녀 상담원 박경자) 문선생님한테 전하지 않아
구청장실에서까지 말이 들려오고, 또 그 본인이 개나리꽃 한 아름을 안고 와서 과장실 응접 쇼파 위에 꽃꽂이 해 주며,
“이 꽃은 가정복지과장 취임 축하꽃이다. 개청식 날 한 꽃꽂이 대금 30만원은 주세요 ”하니 “구청 개청에 그 정도는 해 주어도 괜찮다”고 하며
기어히 그대로 보내자 “내 다음에 또 옵니다 ”하고 갔는데 돈을 받지 못하고 나가는 문선생님의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구청장 부속실의 비서(권** : 현 금정구의회 사무국장 비서로 근무함)에게 “ 문선생님이 과장님께 드린 30만원 돈을 받았답니까?”하고
물어보니 “글쎄요, 문선생님도 돈을 받지 않을 사람이 아니랍니다”고 하였고, 문선생님이 더 이상 말이 없고 찾아오시지를 않아 잊고 있다가
금정구 가사봉사원 후원회를 구성할 때, 과장님과 아는 분이고 또 절에 다니며, 주소지가 금정구라고 하여 가사봉사원의 후원회원으로
하여 줄 것인지 전화로 부탁드리니 쾌히 승낙해 주어 지금까지 금정구 가사봉사원 후원회원으로 계속(1989년 - 2000년)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8.
1989년 여름 당시 금정구청 가건물 청사에는 에어콘 시설이 없었는데 “우리 과가 덥기 때문에 선풍기가 필요하다.
과장님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며칠 후, 금정구 새마을부녀회장님인 이**씨가 복도에서 저를 부르며 나와 보라고 하여 나가 보았더니
“과장이 부녀회 보고 왜 선풍기를 사 달라고 하는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하며 과장님께 전하라고 하므로
그대로 말씀드리면 혹시 싸울까 하여 며칠 후, 과장님이 다른 말씀을 하신 끝에 “부녀회장을 며칠 전 만났는데 부녀회보고 선풍기를 사 달라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답니다. ”고 전하였습니다. 이미 새마을 부녀회의 업무가 총무과 새마을계에 넘어갔을 때였습니다.
새마을 부녀회의 업무가 새마을계로 넘어가고서도 부녀회원, 여성단체회원, 가사봉사원들이 구청 가정복지과장실에 자주 들렀는데 어느 날,
부녀회원들도 앉아 있는 자리(응접 쇼파)에서도 “부녀회가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봉사 조직은 몸봉사를 하던지
돈봉사를 해야되는 것이라고 하던데(어느 남자 공무원들이 심심할 때, 할 수 있는 이야기) 부녀회장은 돈을 좀 내면 안 되나?”
하는 말씀을 부녀회원들이 듣는데서 농담하듯이 너무 쉽게 하여서 제가 제자리에서 일하면서 그대로 듣기가 민망하여 “과장님,
부녀회장의 남편이 교수라고 하던데 국립대학교 교수는 공무원과 다름이 없는데 부녀회장이 무슨 돈으로 부녀회에 돈을 냅니까 ?”하고 말씀드리니
그냥 듣고만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리하였던지 그 이튿날 아침, 계장회의 때 앉으니
“ 감 좀 잡아라 ”하고 나무랐으나 부녀회장과의 갈등 탓이라고 생각하였고, 이후 여성단체 회원들에게도
“부녀계장(본인)이 이** 회장편이다”라는 말씀을 한다고 들려왔습니다.

9.
어머니 합창대회가 각 구별 경쟁으로 있었는데 대회에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하여 옆의 가정복지계가 도왔는데
합창 단장을 두고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합창단원들이 임원장(여, 임**씨, 사회복지법인 선아원의 원장, 가정복지과장실의
응접 쇼파를 넣어 준 사람이라 하였음)을 하기로 합의가 되었다고 하여 과장님도 아셨고 국장님께도 결재를 받으러 갈 때,
구두로 보고도 드렸는데, 어느 날 부곡3동에 살면서 노래를 잘 한다는 여자 한 사람이 과장실로 찾아와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을 금정구 어머니 합창단의 단장을 맡겨주면 구청에 피아노 1대를 사 준다고 하고 돌아갔는데 과장님께서 ”안계장, 방금 왔던
여자가 노래를 잘한다고 하는데 자기를 합창단장으로 해 주면 구청에 피아노 한 대를 기증하겠단다“고 하였으나 합창단장을 정하는 것은
부녀복지계장이나 가정복지과장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합창단원들이 스스로 정하며 당시 합창단장이 정해졌으므로 귀에 담아놓지 않았는데
이에 대하여 당시 합창단장으로 내정된 임원장이 노하여 부산시청 감사실에 과장님의 돈에 대한 비리를 신고하였다는 말이 밖에서 들렸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임원장은 여당인 민주 정의당 금정구 지역에서 어떤 직책을 맡고 있다는 말도 들렸음)

10.
박재춘 과장님은 자신의 진급이 늦은데 대하여 (1988년도 46세경, 6개월전에 주사로 진급하여 6급의 경력이 부산시에서 가장 적어서
동래구에서 분구가 된 금정구에 발령을 받았다는 말이 들렸음)한번은 이말선 국장님을 탓하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다소 공감이 갔습니다.
업무에서는 부산진구청에서 오래도록 호적업무를 보아왔다는 말이 들렸고, 부녀회의 업무가 처음인 듯하였으며, 돈에 대하여는 소문대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 저 개인에 대하여는 업무와 상관없이 감을 못잡느니 하면서 구청장 사모님(당시 서종수 구청장님)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나 관내 저를 익히 아는 여성단체회원들이 있는 앞에서도 가리지 않고 만만한 동생 대하듯 하고 “안계장은 뭘 모른다”는
핀잔도 더러 하자, 어느 날은 구청장 사모님께서 그냥 듣기가 곤란하였던지 “과장이 너무 그렇게 하면 안계장이 주눅 들어요”하고 충고하였습니다.
저는 과장님의 성격이 차차 알려지면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문제삼지 않았는데 당시 가정복지계의 주무였던
박**씨(남, 당시 고참 행정직 7급, 현재 5급으로 금정구청 ?과장)가 보기가 딱하였던지 부녀복지계를 향해서
“다음부터는 과장이 이유없이 잔소리를 하면 같이 대들어 따져 보라. 그러면 좀 덜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저는
당시 계장이였으므로 업무와 관련이 없는 말들이 대부분이여서 대응하지 않았고,
저의 계의 직원인 부녀 상담원 박경자씨가 한번은 과장님의 엉뚱한(불합리한)꾸중에 크게 맞고함을 치며 말대꾸를 하였는데
과장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맞고함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속이 상하는지는 아시는지 한번은
“안계장은 시집을 안 가서, 생속이라서 ”하는 말도 하였습니다.
어떻던 모자라는 직원에 새마을부녀회의 업무도 새마을계에 빼앗기고 과장님은 부녀복지 업무에 대하여는 불평이 없으면서도
사소한 일들(과장님이 평소 앉는 응접 쇼파의 자리에 앉아, 찾아 온 손님과 마주보고 대화 중인데도 자리를 옮겨 앉으라고 하는 등)로 속이 상하여
당시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에 같이 다녔던 여학우한테 털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제가 대민 민원부서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여 과장에게나
관내의 여성, 직장의 직원들에게 깎듯이 대하여 그렇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상대방에 따라서 말도 낮추고 무게도 좀 잡아 보라는 것이였습니다.
저의 이러한 속앓이와 가정복지과의 분위기가 소문이 났던지 어느 날, 동래구청에서 같이 근무하였던 (같은 과에서 함께 근무한 적은 없었으나)
심** 과장님께서 퇴근 후 불러서 나가 보니, 사하구에 근무하는 어느 여계장 한사람(당시 미혼)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씀인즉
박재춘 과장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부산시의 웬만한 여성 공무원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는
과장님의 성격 탓이라고 하면서 많이 힘들면 함께 나온 여계장과 자리를 맞바꾸어 보라는 것이였습니다. 당시 사하구청에는
저와 한국방송통신대학(서울대학교 부설, 전문과정) 가정학과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김** 가정복지과장님(여, 정년퇴임)이
사하구에 계셨는데 박재춘과장님과 달리 기혼이며, 공무원교육원에서 오래 강의하였으며 또 남편이 교수이므로 그 아래서 일하기
따로 살 용기가 나지 않았고, 또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재학 중이여서 근무 후, 논문을 지도 받아야 할 시기였으므로 “
옮길 수가 없다”고 하니 심** 과장님은 너나 나나 박재춘과장이나 모두 미혼이라서 그런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재춘 과장님은 그리하면서도 업무에 대하여는 별로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였고 (가정복지계와 부녀복지계가 모두 열심히 하기도 하였지만)
업무와 관련된 행사를 끝내면 “다 욕봤다”하셨으며
또 저 개인에 대하여는 “돈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한다”고 한번 말씀하셨는데(가정복지과 직원들이 함께 온천장에 한정식을 먹으러 가는 차안에서) 그것은
새마을부녀회의 업무가 새마을계(총무과)에 넘어가고서도 새마을 부녀회장님과 부녀회 총무가 함께 가정복지과에 들어와서 회장님이 제 책상 위에
돈봉투를 놓으면서 “가정복지과 직원들이 모두 수고하므로 과장님과 함께 식사 한끼라도 하라”는 것이였습니다. 제가 “부녀회에 무슨 돈이 있습니까?”
하면서 일어서서 돈봉투를 들고 돌려주려고 가니(선풍기를 사 달라고 과장님이 억지를 쓴 적도 있어서) “이번 월례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다”
면서 손을 저으며 도망을 가버려서 저를 지켜보고 있던 과장님께 그 봉투를 드리며 “가정복지과 직원들이 고생한다고 식사라도 함께 하랍니다”하고 드리니
“안계장이 갖고 있다가 내가 달라고 하면 그때 직원들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며 보관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는 마땅히 보관할 캐비넷도 없어 저의 직원(부녀 상담원,박경자)에게 맡겼는데 그 이후, 가정복지과 직원 모두와 함께 온천장에서
훌륭한 한정식 식사를 하였는데 그것이 그 돈인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관내 저소득층을 위한 자원 봉사 단체인 가사봉사원이 있었는데 금정구가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가사봉사원들의 인원이 몇 명 되지 않아 동별로
인원을 보충하고 달마다 월례회를 개최하고 또 그 봉사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뜻있는 여성들을 받아들여 가사봉사원 후원회를 구성하는데
가사봉사원들이 그들도 월 회비를 내고 또 가사봉사원 후원회에서 수시로 지원금이 나가서
봉사활동을 위한 프로그램(독거 노인 및 시설 노인 목욕 돕기, 관내 불우 세대 겨울 김장 담그기 등)을 발굴하여 제공하고
봉사활동 결과는 일일이 구청장님(서종수 구청장님)까지 결재를 받으며 자랑(보고)하였습니다. 당시 새마을 부녀회 업무가
새마을계로 넘어갔으므로 제가 그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무척 활성화 되자 과장님께서 흡족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봉사활동이 활성화되고 또 가사봉사원 활동비 및 활동비 잔액을 매월 정산하여 가사봉사원 월례회 모임 통지를 할 때 공개하였는데 부녀회에서
다소 신경을 쓰고 말이 있었음인지 (가사봉사원 중에는 부녀회원도 있었으므로) 당시 이** 부구청장님께 가사봉사원의 봉사 활동을 보고(서면 보고)드리니
“안계장, 가사봉사원제도를 만들 때, 새마을 부녀회원들이 부녀회의 견제 세력을 키운다는 말이 있었다”(이 가사봉사원 제도는 당시 이 말선 보사국장의
특수시책이라고 하였음)고 귀뜀해 주셔서 얼른 금정구 부녀회원들에게서 말이 나는가 싶어서 “볼런티어(자원봉사자)의 갈등”이라는 제목으로
갈등의 사유와 해결 방안을 제시한 몇장의 보고서를 부구청장님께 직접 제출하였는데 이후, 부녀회원, 부녀회장, 상관들이 더 이상 운운하지 않았으며
며칠 뒤, 아침 가정복지과 계장 회의 때, 과장님께서 “오늘 과장회의 때, 구청장님이 금정구청 직원들의 수준이 편차가 심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제가 부구청장님께 드린 보고서가 구청장님(당시 서종수 구청장님 : 동의 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셨음)께서도
읽어 보셨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즉 본인이 “돈 문제를 분명하게 처리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부녀회에서 주는 돈, 가사봉사원 활동비의 공개 등에 대한 칭찬인가 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1.
박재춘 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된 후, 어느 날 국장실(박승진 총무국장)에 결재를 받으러 가니
“안계장은 상관보다 조직이 중요하냐고 물어서 저는 박재춘 과장님의 직위해제와 관련하여 나를 원망하는가 보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대학원의 논문 작성 관계로 필요한 시기에 맞추어 휴가원(1989년 하계 휴가)을 내니 “상관보다 먼저 휴가를 가도 되느냐 ?” 면서
결재해 주셨고, 1990년 2월,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근무상황부에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이라고 적어가니
“대학원은 졸업이라고 하지 않고 수료라고 하지 않느냐?”면서 결재해 주셨는데 결재 때마다 다소 못마땅한 듯하여 뭔가 나를 오해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 또 그렇다고 하여 박재춘 과장님의 흉을 널어 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 박승진 국장님은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재학 중이라는 말도 들렸습니다.
또 어느 날은 박승진 국장님의 결재를 받기 위해 국장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결재가 된다고 하여 국장실로 가니
벌써 손님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가셨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국장실에는 부산시청에서 근무하는 듯한 다소 낯이 익은 7급 여직원이
국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도 국장님과 만나기로 되어 있는데 점심시간 전에 박승진 국장님께서 식사하러 가심으로써 만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국장님과는 부산시 산하 천주교도들의 모임인 “등대회”의 회원으로서 알고 지낸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녀는 얼굴이 많이 얽은 여직원이였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하고 그날 생각하였습니다.


12.
박재춘 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되기 전, 부녀복지계의 유일한 직원이였던 박경자씨와 저를 함께 대동하여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고(관내에 거주하면서 동래구 관내에서 ** 미용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씨와 함께), 또 한번은 저만 데리고
두구동에 사는 어느 부유한 보살님의 집에 가서 햇쑥떡을 먹고 왔는데 그 보살님은 경칩(24절기의 하나로서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시기) 때에
움터 오르는 햇쑥을 뜯어서 떡을 해 먹으면 사람한테 좋다고 하면서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뜯어서 만든 떡이니 많이 먹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보살님은 통도사에 다니는 보살님으로 자식이 없으며 자신의 많은 돈으로 남의 자식들을 공부를 시키는 신심이 돈독한 보살님이라고 하였습니다.


13.
과장님이 직위해제가 된 후, 여성대학을 개최하는 어느 날, 오른 손에는 뭔가를 들고 왼손으로 가정복지과의 둥근 문고리를 쥐고 열고서
닫은 후, 뭔가 이상한 느낌이 있어 손바닥을 보니 왼쪽 집게 손가락이 있는 바로 아랫부분의 살갗 안쪽에 갑자기 피가 터져 고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구청과 가까운 부곡동에 있는 *** 내과에서 임상병리사와 병원의 사무장으로 있는 통신대학 가정학과 후배(조**, 여, 현재 부산광역시 보건환경 연구원으로 근무,
이학박사)에게 들러 물어보니“잘못하면 관절염이 올 수도 있으니 신경 욋과에 가서 피검사를 해보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박재춘 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되었던 터이라 “우리 과장이 돈문제로 직위해제가 되어 골치가 아프다”고 하니
“상관이 직위해제가 되면 그 아래의 사람이 과장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여 “우리는 아직 급수가 7급이므로 과장이 될 수도 없고
입장만 곤란하게 되었다”고 하고서 돌아와 이후 시간을 내어 구청 가까이에 있는 금정 욋과에 가서 피검사를 해 두고 또 며칠 후, 결과를
알아보니 이상이 없다고 하면서 “이런 증상이 있으면 피검사를 자주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4.
박재춘과장님께서 직위해제가 된후, 과장님의 짐이 계속 그대로 있어서 이순애 계장과 함께 짐을 싸서
부산진구 초읍동 관내에 산다는 과장님의 댁을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서 찾아가니 “방금 구청장 사모님께서 왔다 갔다. 자주 오신다”고 하시고
그리고 “걱정하신다”고 하였는데 왜 직위해제된 과장님의 댁을 구청장 사모님께서 그것도 자주 오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15.
박재춘 과장님께서 복직(?)된 후, 제가 세무과에서 7급 평직원으로 근무하는 저를 부른 후, “내가 이순애 계장 때문에 죽을 뻔 했다”는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면서 -- 중간생략 --


16.
직위해제가 되었던 박재춘 과장님께서 복직하여 금정구청 시민과 민원대기실의 복판에서 민원안내를 하고 있을 때,
저는 여전히 7급으로 진급도 못하고 (7급으로 진급한지 10년째, 가정복지계장이였던 이**애 계장은 6급으로 진급하였음) 세무과에서
국고인 교육세 통계업무와 과오납금 환불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한번은 총무국장실(윤석천 총무국장)에 통계업무에 대한 결재를 받으러 가니,
“박재춘 과장이 요즈음 이순애 계장을 욕하고 다닌단다”라고 하셨는데 저한테는 유감의 감정이 없고 “이순애계장 때문에 내가 죽을 뻔 했다”
는 비슷한 말씀을 하고 다니시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박재춘 과장님의 그 말씀과 이말선 국장님의 “박재춘과장이 유방암이란다”라는
귀뜀의 말씀이 오랫동안 제 귀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2000년 4월 16일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감사실(행정자료실)

지방행정 주사 안정은 올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붉은 글씨는 보충

* 성명의 일부는 ** 처리 : 개인 정보 보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