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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권 교체기의 대학

내용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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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 --
한국전통식품 및 전통양념 제조와 유통에 따른 정부 규제에 관한 고찰과 그 발전방향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1999년 10월 20일- 김대중 정부)


제안자 ---(소속 및 직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감사실,
지방행정 주사 (6급), 안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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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 정권 교체기의 대학


( 제안서 261쪽 ~ 267쪽 )

-- 중간 생략 --

이듬해, 1980년, 뒤 늦게 한국 방송 통신대학(서울대학교 부설) 2년 전문 과정 가정학과에 입학하였다. 여성은 결혼하면 가정과 떨어질 수 없으며, 또 그 당시 직장인 공직(公職)에서는 여성 공무원에게는 직위나 업무를 부녀계장이나 부녀복지 업무만 주로 맡겼으므로 행정학과를 두고서도 가정학과에 입학하였는데, 인문과목이야 관계가 없었으나 식품학, 영양학, 자연과학 개론 등의 자연과학 이론이 고등학교 교과서와 많이 달라서 쉽지 않아, 몇 뜻 있는 학생들과 함께 당시 부산 지역 학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분의 학원인 전자 통신 학원의 강의실을 빌어서 석사 학위를 가진 조교들을 강사로 모셔 보충 강의를 받았다.
그래서 그러하였던지 졸업학년인 2학년이 되자 부산지역의 총 학우회의 임원으로서 간부활동을 맡아 달라는 것이였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공부하려고 이 학교에 왔으니 학습 부장이라면 맡아 보겠다”고 하고 맡았더니 축제(체육회)야, 일일 찻집 개최야, 학우들 등산 계획이야, 고아원 방문, 오리엔테이션 등 적지 않은 활동들이 있었다.
임원 활동으로 일일 찻집을 개최한 후, 한 고아원(부산광역시 동래구 소재, 당시 논자가 근무하고 있던 구(區)의 관할이였음)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고아원의 원장(여)은 미혼으로서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그 자신의 자녀는 없었다. 보통의 사회복지 시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그 시설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계승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자녀들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어 외국의 사회 복지 시설이 운영되는 것을 보게 하고 , 또 거기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그 자녀가 시설을 받아서 운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원장은 우리들에게 찾아 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엎어지거나 다쳐도 별로 울지도 않고 고아원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였다.
즉 별로 아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것은 고아원 밖의 부모님들처럼 그들의 상처에 대해서 아파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저들이 커서 혹시 그 자신의 생각처럼 타인도 예사로이 때리고 구타하지는 않겠느냐는 것이였다. 사랑을 받고 자라는 사람은 타인을 때릴 수 없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였다.
또 같은 조건 아래서 키우는 아이들도 아이들에 따라서는 나무라지 않아도 착하고 바르게 커는 아이가 있다고 하면서 고아원의 아이 한명이 받은 상장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대부분 미혼인 우리들을 보고서 요즈음 연애 결혼을 많이 하는데 남편을 택할 때는 그 가문(가정)도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말도 첨언(添言)하였다. 귀중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 당시 논자의 대학 전공은 가정학이였다.
같이 갔던 여부회장(가정학과)이 그녀의 어머니가 암으로 투병을 하고 있을 때라 임원들이 모이면 안부를 물었고 그녀도 많이 상심(傷心)하여 내색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지쳐 있었다. 그녀는 그 후, 보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과 결혼하였다.
졸업 학년인 2학년 말이 되자, 5년 학사과정으로 이미 출발한 한국 방송 통신 대학이 3학년 편입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였다.
같이 활동을 했던 8명의 임원들이 간부 활동과 학교 공부와의 병행이 어려웠던지 대부분 졸업을 제때 하지 못하고 경영학과에 다녔던 남학생 1명과 논자만 그 해 졸업을 하였는데, 그 남학생은 부산의 모 대학 야간(夜間) 행정학과에 편입하여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1982년, 임원 중 논자만 한국 방송 통신대학 3학년 가정학과에 편입 원서를 내고 합격 후, 홀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한국 방송 통신대학 5년 과정의 가정학과 3학년에 편입한 학생들은 2년 전문 과정의 한국 방송 통신대학 가정학과를 졸업한 학생들도 없지 않았으나 2년 교육 대학을 나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현직 교사, 2년 전문과정의 간호원, 조산원, 임상 병리사들이 대부분이였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이번에는 부산지역의 협력학교 측(부산대학 : 부산 대학교에는 한국 방송 통신대학 학우회 부산 지역, 지도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부산 대학교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당시 사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다는 소리가 들렸음) 에서 부산 지역의 여부회장을 맡아 달라는 것이였
다 (3학년 남학생 : *1 회장, 3학년 여학생 : *2 여부회장, 2학년 남학생 : *3 부회장)
총학우회의 일이란 교정(캠퍼스)이 없는 학교인지라 뒤 늦게 입학한 학생들이 공부가 힘이 들어서인지 탈락이 많아서(서울대학교 부설, 한국 방송 통신 대학의 전문 과정이 졸업하기가 어렵다고 통신 대학교 무용론이 나오기도 하였음) 학생들이 좀 더 쉽게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계속 불태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총 학우회의 역할이였는데 당장의 학우회 사무실 하나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부산 시내의 다방을 떠돌면서 학우회 임원들이 회의를 하였다.
그래서 논자가 당시 결혼을 하기 위하여 준비해 둔 결혼 자금을 인출하여 2. 3평의 학우회 사무실을 얻었다. 임원이라 하여도 7명이였다.
총 학우회 임원들이 교정(캠퍼스)과 강의실이 없는 부산 지역의 학우들을 위한 학습 활동(학교 강의실 임대) 과 단체 활동(오리엔테이션 주최, 체육회, 등산 활동, 수련대회 등)을 위한 대강의 계획을 세워서 독학하는 학우들을 불러내어 각 학과 별로 모이게 하여 각 학과별 학우회 (학과 대표, 부회장, 총무)를 만들어서 학습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각 학과의 활동이 활성화 되어, 총 학우회 임원들이 세운 대강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하여, 시내 중심에 있는 다방에 각 학과 임원(학과 대표, 부회장, 총무)을 함께 불러 회의를 하여, 부산지역 학우회 축제(체육회 등), 등산 활동, 오리엔테이션 등을 개최하였다. 학습회 활동이 잘 되는 학과에서는 학과별 체육회, 등산 활동도 개최하였다.
3학년 한 해의 총학우회 활동을 마치고 우리에겐 고학년이 없어서 4학년에서도 계속 같은 임원진들이 총학우회 활동을 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회의를 개최하면 도대체 회의 진행이 되지 않고, 의사가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 없이 총학우회 활동을 방해한 학과가 농학과 대표 및 학생들이였고 회의 때마다 같이 일어서서 회의 진행을 방해하였고, 회의를 통해 시행될 안건은 무산되었다.
그들은 학과를 대표하는 학과 대표였기 때문에 그가 속한 학과 학생들은 여타 사유로 참여시킬 수 없다는 것이였다. 분명한 이유도 없었다.
그 당시 부산 지역의 학우회장이 어렵게 자라서 검정고시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부산의 모 여자 상업 고등학교에서 주산을 가르치고 있는 신혼의 가난한 고등학교 교사였다.(논자도 제3자를 통하여 들었음)
그렇게 한 이면(裏面)적 이유는 지금의 총 학우회 임원단이
학교에서 임명한 학우회 임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였다. 당시 학과의 대표들은 몇 몇 참여하는 해당학과 학생들이 손을 들어서 다수결로 하여 학과 대표를 뽑기 때문에 그는 그 학과를 대표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그 자신의 승낙이 없으면 부산 지역의 그 학과 학생들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 즈음 각 학과 학우회 활동이 정착되어 학습 활동은 각학과 별로 총 학우회의 간섭이나 도움 없이 회비를 받고 강사를 모셔서 점차 활성화 되고 있었기 때문에 총 학우회의 침체된 역 할이 전체 학우들의 당장의 학습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는 바는 없었다.
논자는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시간을 쪼개어서 학우회 임원으로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남성이라는 사람들이 또 가정에서 가장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또한 가정의 아빠라는 사람들이 이유도 되지 않는 고집을 피우고, 뒤 늦게 공부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학생들을 담보로 하여 억지를 부리는 것에 대하여 도대체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러 왔는지, 감투를 쓰 러 왔는지. 그것은 한번씩 어지러웠던 우리 나라 국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마 그것은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감투를 잘 쓰지 않으려 한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그리 생각하였던 것처럼.
또 국민학교 때부터, 일주일에 한번 쯤, 한반의 아이들과 공동의 문제를 가지고 스스로 결정해 가는 (나의 초등학교 때처럼-논자는 초등 3학년 겨울 방학 때, 방학 숙제로 제출하라는 시가 잘 지어졌다 하여 4학년 때, 문화부장을 맡았는데, 반공 국시를 제일로 삼는 혁명 공약을 외우면서부터 없어졌음) 훈련이 되지 않은 탓이라 생각한다.
또 지방 자치는 민주주의의 학습장이라고도 한다. 민주주의의 학습은 국민학교 때부터 중고등학교 때까지 남녀가 같이 한반에서, 공동의 문제와 의제를 가지고 토의하며, 해결해 가는데서 훈련되어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남녀 공학 문제는 학교의 화장실만 바꾸면 될 것이다. “남녀 칠세 부동석(男女七歲不動席)”을 않아서 성(性)문제가 있다면 각 학년 별, 남 여, 성(性) 상담교사를 2사람씩 발령하여 성교육과 상담(카운셀링)을 받으면 될 것이다. 남녀 칠세 부동석의 고전적 가치관을 고수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남녀 칠세 부동석”에 의한 학습 능률 향상을 위한 목적 때문인지, 또 아니면 남녀 평등에 대하여 한국 남성이 여성에게서 갖는 열등감 때문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이도 논하는 교육자도 없다.
4학년 말이 되자, 농학과의 회의 진행 방해가 계속되니 회의도 대화도 되지 않고 다른 학과 대표들도 이들을 말리고 상대하지 않게 되자 임기를 몇 달 남겨 두고서 총 학우회장이 더 이상 부산지역의 *1 총학우회장을 맡을 수 없다는 긴 편지를 각 학과 대표들에게 보내고 또 학우회 지도위원회 위원장님께는 편지와 함께 회장 사표서를 보냈다는 것이였다. 총 학우회 임원진들에게는 편지도 의논도 없이. 그리고는 두문 불출하였다.
논자는 당시 동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부산 대학교의 위원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총학우회 임원들을 불러 모아 의논을 한 결과, 임기를 몇 달 남겨두지 않았으므로 회장을 찾아가서 사표 의사를 번복시키기로 결정하고, 높은 산 가까이의 전셋방에 살고 있는 *1 회장의 집 근처까지 찾아가서 불러내어 임원들이 사정을 하고 달래어 번복을 시켰다.
그해, 임기를 두달 남겨두고 학교 본부에서 총학우회 회장과 부회장에 대한 동남아 해외 연수가 있다고 하였다. 대상은 회장과 부회장 1사람이였고, 회장의 연수 경비는 무료이며 부회장은 학교에서 반, 반은 본인 부담의 조건이였다. 그 경비의 출처는 통신대학 출판부에서 부담한다고 들렸다. 각 지역에는 부회장이 남녀 두사람이였는데 부산지역에서는 저학년인 * 3 남부회장이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양보하였다.
1983년 10월 14일부터 24일까지 10박 11일의 대만, 태국, 일본의 교육 문화 시찰이였다. 논자는 이 해외 연수(공로 연수)를 남다른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논자와 같이 한 학년 아래로서 *3, 남부회장을 맡았던 학생이 이듬해 4학년이 되어 총학우회장이 되었는데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감투를 벗어 던졌다. 그 학생은 행정학과 학생으로서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였다.
총학우회 사무실, 학생들의 강의실은 한국 방송 통신대학 부산지역 학습관(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에 자리한 부산 시장 관사가 있던 곳에 건립되었음)이 건립되면서 곧 해결되었다.(86년 10월 개관)
또 이러한 일들은 정치적 전환기 때 맡았던 역할이였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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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장, 3학년 - 허성규 (남학생)
*2 여부회장, 3학년 - 안정은 (제안자)
*3 부회장, 2학년 - 문기호 (남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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