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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 사건이 남긴 교훈

내용
제목 여순반란(叛亂)이 남긴 것

1) 반란과 6.25 남침 실패의 두 가지 교훈

전쟁이 끝난 후 북한 김일성이 땅을 치고 후회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

1. 그 하나가 6.25 때 서울을 점령하고 3일을 머문 일이다. 서울 점령 후 무려 3일. 만약 그 기간에 인민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곧바로 부산으로 진격하였더라면, 미군과 유엔군은 군대를 파견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을 것이고, 남한은 말 그대로 적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서울에서 3일을 기다렸다. 남침만 한다면, 30만 남로당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말만 믿은 것이다.

김일성은 이 폭동이야말로 인민군의 남한 침략이라는 전쟁 범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일 동안 제주 4.3 사건 같은 폭동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誤判)이었고 실패였다.

2. 또 하나는 ‘왜 남로당이 합법적인 의회 진출을 꾀하지 않고, 제주 4.3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던가.’ 라는 자기반성이었다. 만약 남로당이 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에 참여하였더라면, 최소한 제주에서만도 2석은 차지하였을 것이고, 전국을 통틀어 남로당 의석수는 제1당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랬더라면, 남한은 전쟁 없이도 적화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사가(史家)들의 판단이다.

당시 정치 상황을 살펴보자.
남로당은 46년 10월 대구폭동 사건을 즈음하여 폭동을 지휘하던 주요 간부들이 잠적하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결성한 정당이다. 46년 11월 23일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연합하여 남로당을 결성하여 이를 박헌영이 주도(主導)하였고, 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로당이 탄생하였다. 그 후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월북하였고, 남로당은 불법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서 강동정치 학원을 열었다. 그리고 수많은 월북자들을 빨치산으로 양성하는 한편 남한 좌익들의 파업과 폭동을 지휘하였다. 특히 6.25 전쟁 전(前),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벌어진, 박헌영이 남파한 유격대의 활약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눈앞에 마을을 바라보면서 얼어죽은 여빨치산의 최후도 바로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런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刻印)시켜주기 위해,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제주 4.3사건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주모자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사위이자,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이었다.

2) 전교조와 남로당

여기에서 잠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학생을 세뇌시키고 남한 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전교조라는 존재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해 보자. 해방 이후 남로당에는 적화사업으로 수많은 붉은 교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포섭하여 세뇌시켜 폭동의 중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 예로써, 제주 4.3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에도 ‘붉은 교사’들이 양성한 학생들이 국군과 싸웠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지회, 지창수를 비롯한 반란군에 가담한 남로당 무장 세력은 모두 1,000여명, 여기에 학생을 비롯한 동조자가 무려 1,200명이었다. 도합 2,200명이었다.

“국군 아저씨, 잠깐 이리 와 보세요.”

다가간 국군에게 치마폭 속에 숨긴 권총을 꺼내든 여학생들. 총이 발사되고, 사망한 동료를 본 국군들. 이어 여수가 탈환이 되고, 국군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그 청순한 여학생에게 총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붉은 교사’들이었다. 혹자는 여학생 사살 사건이 거짓이라 하나, 국방부 전사(戰史)는 이를 사실로 규정하고 있다.

그 후 지리산으로 백암산으로 선생님을 따라 입산(入山)하여 빨치산이 되어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들. 이들을 누가 비극의 나락으로 끌어갔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너와 내 자식을 가르치는 교사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교사들이 학교에서 우리 학생들 곁에 있다고 보면 된다. 그들이 바로 지금의 전교조라는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상식(常識)이다. 여담(餘談)을 더해 본다.

전교조는 태극기에 대해 경례를 하지 않는다. 소위 민중의례를 한다는 것인데, 그러나 묵념은 한다. 웃기게도 그 묵념의 구호가 바로 이렇다. “통일을 위해 순국하신 선배 교사 선생님들께 묵념을 올립시다.”

그 선배들이란, 김달삼 이하 ‘붉은 교사’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달삼은, 1948년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박헌영의 지령을 받아 3월초 제주 조천면 신촌리에서 19명이 간부들과 폭동을 모의하였다. 그리고 김달삼은 제주 경비를 위해 파견된 9연대 안에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과 남로당 유격대원들을 동원, 4월 3일 새벽 두 시에 제주 도내 12개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그 비극을 시작하였다.

이때 김달삼에 의해 학살(虐殺)당한 사람 중에는 14살(문숙자), 12살(문정자) 소녀들도 있었다. 학살 대상은 우익인사들과 그 가족, 경찰과 대청단원들의 가족들이었다. 살해 도구는 모두 죽창이었다. 어린 소녀들의 순결한 이름과 여린 목숨까지 그들은 처단해야할 적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달삼은 9연대장 김익렬과 평화 협상을 맺고, 북한 정부 수립을 위한 8.25 선거일에 맞춰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갔다. 이때 김달삼이 가지고 간 것이 제주도민들이 인민공화국 수립을 찬성하는 투표용지였다. 당시 제주도 8만 유권자 중에서 무려 5만이나 되는 숫자였다. 이후 제주도는 이덕구에게 맡겨지고, 이 자가 1949년 6월 7일 사살될 때까지 1,700명에 이르는 우익 계열의 제주도민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육지 사람들이 우리 형제를 죽인다.’고 선동하여, 그 결과 선량한 제주도민들이 지역적 온정(溫情)에 합세하였고, 수많은 군경을 습격하여 죽였다.

그리하여 그 보복으로 무려 1만 이상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로 파견될 14연대가 마침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면서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토벌되면서 대한민국은 형제 동포들이 적과 적으로 나뉘어 6.25가 끝날 때까지 죽이고 죽이는 지옥도(地獄道)를 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의 비극이 6.25 침략을 좌절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한 살극(殺劇)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로당과 빨치산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남로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군대는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군대 내의 좌익들을 모두 색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6.25가 일어났어도 군대와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게 6.25는 끝났고, 북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대한해외참전전우회 창원시지회 홍보담당
겸, 해군동지회 창원시지회 홍보담당
겸, 보훈지킴이 창원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