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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고구려 영토 회복은 그 언제인가 . 중국 漢族놈들은 중국으로 가라

내용
연개소문 (?~665)

연개소문(淵蓋蘇文/?~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蓋蘇文).

고구려 말기의 재상.

장군, 개금(蓋金 또는 金)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이리가수미라고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자유(子遊)이고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이들은 모두 막리지(莫離支)의 지위에 올랐다고 천남생모지(泉男生墓誌)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그의 성을 천(泉)이라 한 것은 연개소문에관한 기사의 전부가 당라의 서적에 의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조는 샘(井) 또는 물(水)에서태어났다고 한다.

연(淵)이라는 성거기에서 유래하였던 것 같은데 <강도지 : 江都誌>에 따르면 고려산(高麗山)에 그의 구기(舊基 : 집터>가 있고 그 고려산에는 5정(五井)이 있었다 하였으며 그 5정에서 깨끗한 물이 용솟음 처럼 흘렸다고 한다.

자칭 물의 정령(精靈)을 타고났다고 한 그는 풍채가 준수(俊秀)하고 위푸잉당당하였다고 하며 열다섯살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서부대인(西部大人)이 되었다.

그 후 천리장성을 쌓는 최고감독자가 되었는데 그의 세력이 커지자이를 시기하고 두려워 한 여러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보장왕) 1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처치한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조리 두륙(屠戮)하고 왕궁에 처들어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나서 보장왕을 옹립하였다.

그는 자칭 대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당시 안시성의 성주는 그의 반대파 였음으로 이를 공격하였다.

이 안시성주와의 협상이 보여 두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누대의 귀족연립정권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였던 것으로 국론 통일을 기하였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축하였다. 고구려는오랜 옛날부터 실권자의 직(職)인 대대로(大對盧)를 5부(部) 귀족들이 호선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의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여의치 않으면 각기 사병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결정을 지었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을 가지지 못하여 방임하는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그러한 정변은 때로는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갔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보인느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 등은 그러한 한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고한 집권과 그 지위가 아들에게로 세습됨에서 보듯 연씨 일가를 중심으로한 보다 강력한 집권화가 진전되었음을 보여준다.

집권 후 국내종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淑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내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하고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나마중국 세력과의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기에 있었던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 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탁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세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져 갔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을 격파 복속시킨 뒤, 명실공히 중국 중심의 체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증시켜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여 한편으로는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그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간의 충동이 빈번하였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 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간의 분쟁이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이러한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강영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 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도 상관되는 것이었다.

그는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찾아와서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하였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당의 사신을 가두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당에 대하여 단호한 대결 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확고히 하고 말갈족과 같은 예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며 전쟁에 대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러한 면은 644년 당태종의 침공 이 후 계속된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와의 사이에서와 같이 전쟁이 불가피 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다원적인 세력균형 상태가 중국 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됨에 따라 깨어져갔다.

중국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서 수,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와의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 하였던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의 중국 내부의 사정과 그리고 이어 돌궐과의 관계로인하여 고구려와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지방을 선제 공격하여 수나라와의 전단을 열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이다.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하였듯이 그는 당태농이 침공해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권에 대신하여 흥성하였던 설연타(薛延陀)의 세력과 연결하여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것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위에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는 대륙의 거센 바람처럼 다시금 휘몰아쳐온 당나라 세력을 여지없이무찔러 고구려의 기상을 드날리게 되었다.

명장 연개소문이 등장하여 크게 승리하는 기록을 세우는 요수전역(療水戰役)과 안시성전역(安市城戰役) 이야말로 당나라와의 대회전에서 고구려의 웅장한 기백을 과시한 전역(戰役)이라 하겠다.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의 영웅적인 전역 몇 가지 소개하면, 당태종이 전선(戰船) 400척으로 고구려를 치게 하더니 마침 요하(療河)가 호우로 범람하여 군사를 데리고 시기를 엿보다가 장마비가 멋자 대대적으로 재침하여 오거늘고구려 수군은 대기하고 있다가 그를 무찔러 대패시켰다.

보장왕 4년(645) 당태종이 수십만의 대군을 몰고 안시성을 포위하고 연개소문의 막하장수 양만춘(揚萬春)과 수개월 동안 공방전을 전개 하였는데 당나라 군사들의 전사자도 많이 낫거니와 그보다 군량(軍糧)이 모자라 도저히 더버틸 수 없어 당태종은 회군을 명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회군하려하자 조골성주(鳥骨城主)와 안시성주, 양만춘, 막리지, 연개소문이 일제리 추격하면서 대공세를 펴니, 당나라 군사들은 크게 흔딜리어 서로 밟고 밟히고 하면서 도망치다가 당태종은 말발굽이 흙수렁에 빠지는 등 혼줄이 나서 겨우 도망치다가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으며 그외 사병들도 태반이 죽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 군사의 퇴로를 막고 양만춘은 거세게 몰아치어 당태종이 할바를 모르고 허둥데다가 겨우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하여 갔다.

고려의 문호 이색(李穡)이 당태종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謂是囊中一物耳 那知玄和樂百羽(위시낭중일물이 나지현화락백우) 뉘 알았으랴 고구려 정벌하기는 주머니 속의 한 물건 다루기보다 쉽다고 큰소리 치더니 당태종의 눈알에화살이 꽃칠 줄이야"라고 하였고 조선조 중기의 대학자 김창흡(金昌翕)도 “千秋大膽揚萬春 箭射?髥落眸子(천추대담양만춘 전사규염락모자)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이여. 용(당태종)의 눈동자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렸으니”라 조소 하였다.

연개소문이 쫓기는 적을 쫓아 북경 교외에 까지 깊숙히 밀고 들어갔으니 지금도 북경(北京) 안정문(安定門) 밖 60리허에 고려진(高麗鎭)과 하북성에 고려성(高麗城)이 있다는 점으로 미루워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丹劑中采浩고증).

연개소문의 자는 김해(金海)이었는데 그의 병법을 김해 병법이라 하였고그의 병서를 김해병서(金海兵書)라 하여 고려시대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게는 한권씩 나라에서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요양(療陽), 해성(海城), 금주(金州), 복주(福州) 등지에 연개소문의 유적과 전설이 많이 있다라고 하였고 연해주(沿海州)의 개소산(蓋蘇山)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의 연고지 강화에서는 숭조회가 주동이 되어 그의 장한 업적을기리기 위하여 1993년에 그분의 출생지인 고려산(高麗山)밑 하음에 유허비를세웠다.


▶ 고구려의 멸망

어쨌든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이 발발하여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안팎으로 강력한 통수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으로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의 위기 속에서 이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그의 직을 계승하였고 남건·남산 등이 권력을 나누어 맡았다.

곧이어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고구려는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연개소문과 다섯 자루의 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중 수수께끼는 칼 다섯 자루(五刀)를 차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를 학계에서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해석해왔는데 필자가 만

난 전통무예 연구가는 위엄용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전통무예인 칼을 날리는 비도술(飛刀術)의 마지막 전습자였기 때문에 그랬다는 주장이었다.

설득력은 있었으나 근거 사료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중국의 경극(京劇)에 그 근거가 있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연개소문이 주인공인 경극이 4편이나 만들어졌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등이 이런 경극들인데 여기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 장군이 아니라 소수민족 장군으로 등장해 칼을 던지는 비도술을 사용한다.

고구려 장군이 아니기 때문인지 북한의 항의로 1965년 상연 금지되었다. 이런 경극들이 송(宋)나라 때 만들어진 민간 문학인 평화(平話)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중요하다.

중국 민중들이 고구려 무사들의 전투장면을 목도하고 이야기로 남겼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구·신당서 등은 연개소문이 패주하는 당 태종을 곱게 보내준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원 내륙 깊숙한 곳까지 추격했다는 야사가 많았는데 송나라 때의 민간문학이 사실임을 증거한 셈이다.

명(明)나라 말기 모원의(茅元儀)가 편찬한 무비지(武備志)에는 당 태종 때 검사(劍士) 1000명이 있었으나 일부 비법이 전해지지 않다가 근래에 조선에서 그 검법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그 검법은 고구려 전통무예일 것이다. 장이모(張藝謨) 감독의 무협영화 연인(원제:십면매복 十面埋伏)은 당나라 말기 왕권에 대항하는 비도문(飛刀門) 이야기다.

우리가 위엄용이라고 쉽게 해석하는 동안 중국은 경극과 영화로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연개소문 후손들 묘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비도술을 소재로 삼은 우리 영화나 소설은 언제나 나올까 기다려진다.



-역사 평론가 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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