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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활약" 강근호 지사 부인 이정희 여사 생사의 갈림길

내용
"장산 여전사''여, 다시 일어나주오"
청산리 전투 활약'' 강근호 지사 부인 이정희 여사 생사의 갈림길
제대군인 모아 장산 20만평 개간 40년간 산에서 홀로 무소유 생활


부산 해운대구 장산의 이정희(76) 여사. 장산 폭포사에서 정상을 향해 20분께 올라가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애국지사 강근호의 집(모정원)''이 그의 삶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병상(동래봉생병원)에 누운 채 생사의 갈림길을 오가고 있다. 지난 13일 뇌출혈로 쓰러진 지 2주가 넘도록 의식이 없다.
그의 집 모정원은 남편이자 동지였던 강 지사의 유품과 유훈이 깃든 살아 있는 박물관이었다.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을 비롯해 만주와 러시아 일대에서 독립군의 위세를 떨친 강 지사는 1950년 6·25전쟁에도 참전, 몸을 아끼지 않는 나라 사랑을 실천했다.

전쟁 중이던 1953년 서른 네 살 연상의 강 지사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은 연애 감정이 아닌 동지애 때문이었다. 6·25전쟁에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해 지리산 전투에도 참전한 이 여사는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이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민중의 공이고, 민족이 없어졌을 때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싸우는 것은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며 강 지사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존경심과 끈끈한 동지애를 느꼈다. 만주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대한민국 초대 정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이 이 여사의 증조부다.

강 지사가 1956년 예편 이후 불과 4년 만에 예순 둘 짧은 생과 길었던 전쟁을 마감한 뒤 이 여사에게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스물 여덟 꽃다운 나이에 그의 어깨엔 7살 아들, 1살 딸이 짊어져 있었다.

미국 정부가 강 지사의 공로를 인정해 수여한 동성무공훈장을 발견해 무작정 하얄리아 부대로 찾아간 이 여사는 "난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귀국 정부가 강 지사의 공을 인정했으니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만 마련해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이 여사는 미군들이 보호하고 있던 고아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이 여사는 소유하려 드는 법이 없었다. 1967년 제대 군인들을 모아 ''장산개척단''을 조직한 뒤 지금의 장산마을 20만평 개간을 진두지휘하고, 벌거숭이 산이던 장산에 나무를 심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도록 한 그는 개간한 땅을 모두 노동자들이 불하받도록 해 주고, 지금의 모정원으로 내려왔다. 강 지사의 추모비가 세워진 한 평도 안되는 땅 외에 이 여사가 기거한 땅은 불하받지도 못한 국유지이다.

''잠시라도 모시고 싶다''는 자녀들의 청을 뿌리치고 홀로 40년이 넘게 산속에서 살아온 이 여사는 2004년 자녀들의 도움으로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기 전까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두막 같은 산집에서 건전지로 라디오를 들으며 세상 이야기를 접하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딸 정화(48)씨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려고 며칠 전 이 여사의 짐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통장에 찍혀 있는 잔액은 단돈 1만원. 군인으로, 사회복지사업가로, 장산을 호령하는 여걸로 살아온 70평생에 그가 남긴 것은 그게 전부였다.

내년께 모정원을 명실상부한 애국지사 강근호 기념관으로 조성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뜻있는 이들과 함께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모진 세월 앞에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세상을 떠날 땐 장기도 필요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가 세상에 남길 것은 민족애와 나라 사랑뿐이다.

이호진 기자 jiny@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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