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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이 싼 똥 윤석열이 똥 싼다 1/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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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1/240

도선비기는 정씨의 등장을 예언했다. 이후 정감록과 더불어 계룡산 혹은 500년 주기설, 정도령 등으로 해석 된다. 풍문 등을 종합하면 정도전이 있고, 억측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주영이 보인다. 이는 깊이 있게 지보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튼 이런 터무니 없는 전설과 와전이 오늘을 살고 있는 혹자에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진실로 무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정도전은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을 건국했고, 그가 꿈꾸던 재상 중심의 나라는 군주제의 권력을 분산하는 제도로 오늘날 민주주의로 가는 작은 주춧돌이라 볼 수도 있다.
왕의 국가가 그 권력을 나누었다는 점에서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사례임은 확실하다. 물론 난 역사 교육을 본능적으로 거부했고 또한 매우 충실하지 못했다. 그 이유 있는 반항은 점진적으로 알아 보자. 그러니 너무 역사학적으로 지보 않기를 바란다.
왕조실록 등을 배워 삶의 밑천이 된 자들이 알고 있는 역사와 학교 성적은 형편 없었으나 역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현실을 살아온 사람과는 역사에 대한 전지적 시점이 사뭇 다르다. 역사적 인물이란 무릇 그 후대에 실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인류라는 세계적 지향점이 있어야 한다.
지금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인물들은 이미 사라진 유교사상에 그 기준을 두어 미래가 없다. 따라서 작금의 역사는 기록이라는 관점과 당대를 중심으로 왜곡되어 있다. 이러니 아무런 의미도 없으면서 난세에는 아첨꾼마저 인물로 등장한다.
이방원은 정도전과 그 일가를 몰살하고 정진을 살려두며 이렇게 말했다. “아들 하나를 살려 내가 만들어 가는 세상을 보게 할 것이다. 하지만 너의 아들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나라에 위기가 오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이나 그 어떤 공도 인정 받지 못할 것이다.” 보통은 재미로 읽을 수 있는 이 말이 후대에 얼마나 큰 저주인지 알아 보자.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이방원의 저주는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의 현질적 능력이다. 저주 받은 자의 이야기를 풀어 보면, 마법, 저주, 염력, 풍수, 장풍, 귀신, 영혼, 신 등이 현실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영화나 소설 등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이상 현상들이 현실에도 거의 그대로 나타난다. 다만 이를 인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고학력이나 전문성이 강한 분야, 쉽게 말해 가대리에 똥이 가득찬 자들은 평생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튼 정도전의 민본이나 재상제는 사대부를 흔들기에 충분했고 다시 시작된 왕권 중심제에서 밀본이나 풍문으로 세상을 어지럽히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역사 공부를 많이하여 잘 안다는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기록에 없는 역사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그 핍박과 억압 혹은 재상제 추진 등이 드러나지 않게 매우 치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쩌면 이들은 굳이 일본이 아니더라도 중국,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그 어느 나라라도 좋으니 조선을 멸한 후, 독립을 챙취하는 변화의 길 밖에 없다고 판단 했을 것 또한 추정된다.
어떤 측면에선 매국노 집단이라 볼 수도 있다. 그만큼 조선왕조는 비참 했고 비급한 것으로 한 번 더 추정된다. 근거로는 고종이 정도전을 복원시킨 것이다. 역사 기록 그 어디에도 없는 복원 과정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조선을 개국하여 영웅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간 역적이었는데 그 과정의 기록이 없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2/240

오늘날 같이 발달한 정보화 시대에 난 최소 20여년 전 대통령령의 긴 제도적 틀에 갇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고 따르는 공무원이 한 명도 없다. 따라서 구한말 고종의 명이 당시 경남 남해에 둥지를 튼 우리 조상에게 전달됐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 감시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시선을 말하고자 한다. 제대로 된 족보도 없고 어릴 때 진양정씨는 친척이면서 그들과 다른 정씨라 했다. 명절 때 집안의 모임에서는 같은 곳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다른 곳을 향해 절해야 했고 아버님이 말하는 범계공파는 진양정씨 족보에도 없다.
이 외에도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으나 정도전과 연결하면 거의 대부분 이해가 된다. 왕씨가 왕씨, 전씨, 옥씨의 성으로 살아간 것처럼 정씨 또한 진양정씨나 하동정씨, 김해김씨 등에 숨어 살아야 했고 정봉주 의원처럼 봉화정씨로 사는 사람도 있다.
620여 년 전의 역사이니 그 후손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으나 이렇게 나이가 들고 보니 나의 조상에게는 또 다른 은밀성이 내포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당시 마을 어른들 말에 따르면 아버지 5살에 혼자 일본으로 할아버지를 찾아갔고 마을에서는 아버지를 찾아 난리가 났단다.
이는 단순히 어렸던 것으로 기억해서 그렇고 대략 7살경 도일(渡日)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 아버지는 교토에서 할아버지와 머물렀고,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교토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인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아버지는 영어를 가장 잘 하는 조선인이었다. 영어 발음을 잘하여 일본 학생들에게 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한 번은 하굣길에 담 넘어온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주워 먹었다. 이를 우연히 목격한 감나무집 주인이 뛰어와 붙잡아 가기에 조선인이 일본인의 감을 먹었으니 이제 죽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인은 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려가 몸에 탈이 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병원비까지 내어 주었다.
오면서 감도 몇 개 따주며 혹시 배가 아프면 다시 찾아 오라고 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625전쟁 때, 아버지는 일본어와 영어를 어느 정도하여 부산 동래 미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친척들 말로는 너희 아버지가 부산 시내를 돌아다닐 때는 항상 권총도 차고 다녔는데, 미군부대 물자 관리를 담당하여 조금만 친척들을 챙겼으면 우리도 좀 잘 살았을 거라며 불만이다. 정주영 회장이 미군 물류 창고를 관리 운영 할 때 아버지는 미군복을 입고 있던 물자담당 미군 중사였다.
당시는 긴급한 상황이다 보니 카투사도 아니고 대한민국 군인도 아니었지만 전쟁을 위해 한국에 들어온 총알 하나도 빼돌리지 않고 5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상사로 제대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심성은 모르겠느나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은 일본으로 징용간 할아버지의 일수표만 믿고 한량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어머님도 이를 믿고 시집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물거품이 되어 버려도 아버지는 이를 꼭 쥐고 있었고, 나 또한 어려울 때 이를 들고 일본 대사관을 찾아가서 노임을 달라며 항의했다. 세종로에 있는 일본 대사관 직원은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뻔한 소리만 했다.
전쟁 한 번 해지보도 못하고 나라를 넘긴 질찌이 국가가 국민이 평생을 바친 노동의 댓가마저 훔쳐 가 버렸다. 이 절도범이거나 범죄집단은 대한민국이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3/240
당시 징용간 사람들은 지금의 국뽕들 때문에 말을 못해서 그렇지 조선은 노임을 떼 먹어도 일본은 언젠가 반드시 줄 것이라 믿었다.
따라서 국민적 정서를 이용하는 국뽕짓은 고마 해라. 믿지 못하겠지만 지난 500년간 노비보다 못한 삶을 살다가 징용으로 희망이라는 것을 가져 봤는데 국뽕들이 랄지이다. 이런 족보를 가진 난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가난을 겪었다. 대략 7살 쯤으로 예상되는데, 아버지가 농약을 치다가 쓰러지면서 그나마 코딱지만한 논 절반을 팔아 병원비로 썼다.
대략 4마지 정도의 논이 2마지로 줄어든 것이다. 수익이라고는 농사 밖에 없는 집이 논 2마지로 5명이 먹고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비참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가 쓰러진 것도 의문 투성이다. 집에서 저수지 끝 산골에 있는 논까지는 1.5km 정도 된다. 당시 남해 노량은 버스가 배를 타고 건넜다. 남해 고현에 사시는 이모님이 곤양에서 장사를 하고 6km가 넘는 우리집까지 걸어와 아버지가 농약을 치다가 쓰러진 그 시점에 맞추어 산골까지 걸어가서 아버지를 구했다. 물론 우리는 그나마 이모님이 아버지를 살려 매우 고마워 한다.
이모님을 의심 해서가 아니라 30km가 넘는 그 먼 길을 당시 2시간 정도 배 타고, 버스 타고, 걸어서 그 산골에 도착하는 시점에 마침 아버지가 쓰러진 절묘한 타이밍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난 주로 마당에서 지도 그리는 것을 좋아 했다. 그러니까 그 지도라는 것이 보통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 크게 그린 지도다. 대략 가로 세로 5m가 넘는다고 봐야 하나? 기둥 네 개를 그린 위에 판을 올리는 식으로 다리를 그렸다. 이는 큰 천(川)을 건너는 것이고 작은 개울의 다리는 둥근 모양으로 표현했다.
학교, 경찰서, 저수지 등 모두 머릿 속 상상력으로 그렸다. 언젠가 마을 음달의 한참 선배가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는 “동배야! 다리는 그렇게 그리는 것이 아냐” 보통 잘 아는 꺽세 모양의 다리로 표현해야 된다며 내가 그린 다리를 지워 버렸다. 난 그 형에게 대들었고 곧 사람들이 모였다. 당시 우리 집 앞은 마을의 빨래터였다.
동내 아주머니와 어른들은 왜 둘이 싸우는지 물었다. 난 다리 아래는 기둥이 있어야 하고 개울은 마을 가까이 있으니 예쁜 둥근 모양으로 그렸는데 이 형이 다리를 이렇게 그리라 한다며 투덜 그렸다. 그러자 그 선배는 얼마 전 학교에서 다리 그리는 것을 배웠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표현 하라고 했다며 자기 그림이 맞다고 주장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내가 맞단다. 다리가 밑에 기둥이 있어야지 꺽세 모양으로 그리면 사람이 어떻게 건너냐는 것이다. 그러자 그 선배는 화가 단단이 났다. 학교 선생님이 이렇게 그리라고 했는데 왜 마을 사람들 전부 동배 그림이 맞냐며 성화다. 그 때 한 스무살 정도 된 청년이 내가 그린 다리가 맞다고 결론 냈다.
몇 일이 지나자 난 다른 도면을 크게 그리고 있었는데 음달의 그 선배가 책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얼마나 억울했는지 씩씩거리며 1.5Km 이상 떨어진 마을에서 교과서를 들고 찾아 왔다. “동배야! 봐라 책에도 이렇게 되어 있다.”며 나에게 엄청 화를 냈다. 그 날은 사람이 많지 않고 어른 한 두명 정도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책이 잘못된 것으로 결론 냈다. 서울대서 석사까지 받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이는 교과서가 잘못됐다.
그날 그 선배는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방방거렸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여기 저기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뭐 이런 동내 사람들이 다 있어…,”
이렇게 큰 지도 그리는 것을 나만 좋아한 것이 아니다. 진원이도 아파트 벽면에 지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좀 말렸으나 끝도 없이 그려서 결국 포기 했더니 32평 아파트 온 벽이 지도로 가득 찼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4/240
하루는 동네 놀이터에 가고 있었는데 뒷집 아지매가 위에서 내려 오더니 씩씩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이 아지매는 덩치가 엄청 켰다. “동배야! 이제 너희 집은 망했다. 내가 어제 보리쌀을 빌려 주지 않았으면 너도 어제 굶었다. 이제 너희 엄마와 아버지도 곧 팔려 가고 너도 하인으로 갈 것이니 우리 집에서 노비처럼 일 해라”,
난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왜요?” 했다. “너희 집은 쫄당 망했어!” 하며 계속하는데 부모에 대해 엄청 심한 말을 하여 차마 여기에 적지도 못한다. 마치 못생긴 슈렉이 침을 튀기며 욕설을 해대는 것 비슷했다. 우리가 없이 살아도 부모님을 그렇게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내려 보며 염병떠는 그 면상에 난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다.
얼굴을 땅에 대고 아파하기에 순간 등에 올라타 온 힘을 다해 두들겨 팼다. 그러자 그 큰 덩치가 벌떡 일어 나더니 나를 잡아 죽일 것 처럼 주위의 굉이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그곳에 있었으며 못해도 신병이 됐을 것이다. 순간 작은 내 체격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급히 앞산으로 도망쳤다. 산 정상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 봤다.
사람들이 놀이터 쪽에 바글바글 모여 있고 아주머니가 뛰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주머니는 워낙 귀하게 자라 집에서도 매를 모르고 살았다. 그날 나한테 두들겨 맞은 것이 난생 처음이란다. 해질녘에 집으로 래몰 들어가는데 어머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 순이 엄마 때렸냐?”, “예”, “왜?” 그래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작은 소리로 “잘 했다” 하며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 말로는 그 아지매가 낫을 들고 ‘동배! 잡아 죽여 버린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돌아 다니자 마을 사람들이 왜 그러냐 묻기에 나한테 맞았다고 난리다. 마을 사람들은 그 온순한 동배가 때렸을 리도 없고 혹 때려도 그 조그마한 놈이 때렸는데 그 큰 덩치에 뭐가 아파 그러냐며 모두 너무 한다고 했다나…, 그동안 마을 사람들을 많이 괴롭혔던 그 아지매는 그후로는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반면 그 날 이후 난 뒷집 황*문 아재하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아재는 데릴사위로 들어 갔는데 그 아지매가 거의 노비 대하듯 했다. 오죽하면 그 딸들이 동내방내 다니며 자기 아빠 데릴사위라 할 정도다. 아마도 그래야 엄마에게 잘 보이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이후 아재가 나를 보더니 “동배야 고맙다” 하더니 고물 자전거도 한 대 줬다. 난 그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워낙 덩치가 커서 아프지 않을 거라 생각 하겠지만 사실 마을 사람들이 생각 하는 것 보다 좀 많이 두들겨 팼다.
그날 난 어른도 맞아야 정신 차린다는 것을 어린 시절에 배웠다. 그러니 내 앞에서 나이 먹었다고 거들먹거리지 마라. 맞는다. 사실 난 부산이나 서울가서도 사람 많이 팼다. 물론 맞기는 더 많이했다. 지금의 대중표 국가보안법은 거대한 테스트 베드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령 선포는 확실히 고맞, 국회의 탄핵 의결도 맞는 것 같다. 이 것이 더 잘 맞으려면 앞으로 대통령 령을 잘 따라야 한다. 다만 길거리서 윤석열 탄핵을 시위하는 것은 틀렸다. 헌법재판소는 앞에서 시위 한다고 그 결정이 바뀌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방송 등은 이런 시위자 증거를 담아 국가기관에 넘기고 국가는 이들을 국보법 제7조로 처단하라. 완벽한 나라법은 시위로 바꿀 수가 없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그 결과가 잘못됐을 때 시위를 하는 것이 맞다. 탄핵 시위를 빼면 아직까지는 모두 잘 맞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을 무시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뒤에 내가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 갔을 때도 *문 아재는 참 잘해 줬다. 난 천(川)에서 매기를 잡아 애재에게 주었다.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는 것도 같다. 낚시를 하고 돌아오면 벌써 아재는 논에 가는 척하며 내쪽으로 왔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5/240
“오늘은 좀 잡았어?”, “여기 있어요” 하면 매우 좋아하며 매기를 들고 갔다. 함께 창고 뒤를 지나는데 “동배야! 너 고물 장사하고 친하게 지내던데 이것 좀 치워라. 엿 바꿔 먹든지?”, “이게 뭡니까?”,
“요즘은 공장에 주문하면 기계로 만들어 오니 이런 것은 필요 없다. 그런데 누가 지저분하게 이런 것을 마을에 가져다 놨다.” 이후 치워 주려 했지만 쉽지 않다가 어떻게 기회가 되어 치우고 있는데 뒤에 동내 이장된 분이 치우지 말란다. 그래서 반쪽만 치웠다. 한 번은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아재가 오더니 “동배야! 너 요즘도 나무 때지?”, “예”,
“그럼 저 느티나무 좀 빼어 가라”, “아니 마을 정자나무를 아재가 뭔데 베어 가라는 겁니까?”, “아니다. 저 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다.”, “그래요. 그럼 아재가 우리 누나 팔목 부러뜨렸네요?”, “팔목이 아니고 발목이다.” 둘 중 하나인데 다친 곳이 잘못됐다며 지적해 주었다. “내가 나무를 심었지 누가 저기 올라가라고 했냐?”,
어릴 때 누나가 저 느티나무에 올라가 다친 적이 있어 이런 농담을 했다. “아재도 참! 주려면 쓸모 없는 저런 나무 말고 저기 앵두나무 같은 것을 주지?”, “저 것도 네가 가져라 사실 저 땅은 너희 땅이다.”, “아니 어떻게 저 땅이 우리땅입니까?”, “네 땅이 맞다. 저기 감나무, 석류나무는 다 내가 심었고 너희 땅이니 니가 가져라.
그리고 저 느티나무는 니가 베어가라 내가 해야 하는데 이제 늙어 힘이 없다”, “우리 집에는 완전 이빨 다 빠진 톱 하나 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뱁니까? 아재는 전기톱 같은 것 없어요?”, “내는 없다. 이제 니 줬으니 니가 알아서 해라” 그래서 앵두나무와 감나무는 뻬어 버리고, 느티나무는 죽여 버리고, 다른 감나무와 석류나무는 가지만 쳤다.
결국 아재 말대로라면 동내 사람들은 그 쪽이 우리 땅인 것을 다 알고 있다. 난 이를 10년 넘게 조금씩 정리하여 ‘배원길’로 완성했다. 사천시청의 비리로 부모님이 평생을 ‘내땅 놔두고 왜 남의 땅으로 다니냐’며 절규한 그 땅은 아니지만 선택 가능한 최선의 길이다.
2모작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데 그 마져 반토막이 나버렸다. 아버지는 농사에 전혀 재주가 없어 인근에서 제일 못했다. 중학생 때, 똥을 거름으로 쓰면 오이가 잘 자란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내가 ‘저 사람 농부 맞아’ 할 정도다. 그나마 하급 가격으로 모든 쌀을 팔아 보리나 정부미로 바꿨다.
남들은 정부미가 냄새 난다지만 우리는 그것 마져 없어 먹지 못했다. 보리 밥을 안칠 때면 정부미를 한홉 얹혔는데 이는 아버지 전용이고 언저리로 붙어 있는 쌀알 몇 개는 막내에게 돌아갔다. 난 진짜 먹물처럼 시커멓고 오돌오돌한 보리밥에 소금처럼 아주 짠 작은 깍두기 반찬이 전부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도시락 검사를 했다. 물론 거의 일상이었으나 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그 혼식분식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날은 선생님이 내 도시락을 보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촌놈 같지 않게 귀티나는 하얀 얼굴을 가진 녀석의 도시락이 너무 형편 없었다.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여 다른 친구들 도시락을 둘러 보았다.
그 시대 쯤만 해도 나 같은 도시락을 싸온 학생이 한 명도 없다. 선생님이 검사하는 도시락이 흰쌀에 혼식을 하라는 것인데 나만 도시락이 시커먼 보리밥에 김치 몇 개다. 우리 때는 조금씩 개선되어 있었고 그래서 순수한 쌀밥만 싸오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만 거꾸로 가도 너무 갔다.
뒷자리에 키큰 친구들이 점심 시간에 돌아다니며 동기들 반찬을 뺏어 먹었지만 내 자리에 전혀 오지 않는 이유를 그때서야 알았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6/240

다음 날 어머니께 도시락을 안 싸가겠다고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웃에게 우리 아들은 친구들 것을 뺏어 먹는지 도시락을 싸주지 말란다며 큰소리로 말해 그 날 이후 중학교 마칠 때까지 도시락을 한 번도 가싸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 역시 지금의 상황에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다. 한 번은 낫을 들고 따라 오라고 했다. 저수지 주변을 가더니 낫으로 소나무 새순가지를 짤라 껍질을 벗기더니 하얀 속살을 고기 떳듯이 먹어 보라고 했다. 당시 그 소나무 가지를 먹어 보고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깜짝 놀랐다. 내가 먹어본 최고의 맛이라 가끔 혼자 소나무 껍질을 뜯어 먹었다.
나이가 들어 그 때의 맛이 궁금하여 다시 한 번 먹어 봤더니 참으로 덥덥하고 휘발유를 먹는 것 같더라. 소나무, 찔레, 칡, 산딸기, 삐삐, 버들강아지 등 온 산과 들의 먹을 것은 다 뜯어 먹고 그나마 지금의 모습이 됐다. 남들과 비교하면 작은 키나 이도 개고생하며 컸다. 초등학교에서 영화를 상영하니 10원을 내라고 했다. 어머니께 말했다가 혼만 났다. 그래서 전교생이 보는 영화를 나 혼자만 지보 못했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도 참 너무 했다. 4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보는 영화를 한 명 더 본다고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혼자만 못 보게하여 운동장 교장 선생님 단상 철판에 배를 대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면 물배가 따듯하여 참 좋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난 연필이나 붓 등 제대로 된 도구가 하나도 없다.
심지어 도화지 한 장이 없다. 고등학교 이후 돈을 벌면서 언젠가 그림을 시작해야지 하면서 나이 60이 다 되도록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못했다. 참으로 불쌍한 삶이 아닌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흰 종이 한 장이 생겼다.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으나 A4 반절 정도 되는 작은 종이다.
이렇게 깨끗한 종이가 온전히 내 것이 된 적이 없어 고민하다 여기에 아버지 얼굴 사진을 그렸다. 첨부의 마지막에 있는 사진이다. 교실에서 쉬는 시간을 이용해 마무리를 하고 있었는데 지나던 친구가 이를 보고 “야, 동배 그림 잘 그린다.” 했고, 같은 초등학교 동기들이 “동배 원래 그림 잘 그려” 하자 이 소식이 배*덕이 귀에 들어갔다.
같은 반이 아니었던 덕이가 급하게 교실로 들어오더니 내 그림을 보자고 했다. 그러자 수 십 명의 친구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아버지 사진을 보고 맥아더 장군이란다. 자기 아버지도 군인이었는데 우리 아버지와 모자가 다르니 이는 맥아더 장군이 맞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가고 덕이가 조용히 오더니 아버지 사진을 빌려 달라고 했다.
“우리 아버지 맞아! 사진을 왜?” 그리고 몇 일이 지나자 덕이가 나와 비숫한 크기로 아버지 얼굴을 그려 왔다. 미술학원 화백이 도와 줬단다. 초등학교 때부터 내 그림에 대해 약간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덕이는 이참에 코를 납짝하게 눌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 “야, 동배하고 덕이가 그림으로 한 판 붙었다” 하며 소리치자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어 뒤에 있는 친구를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여러 평가들이 있자 두 그림을 놓고 선호도 조사를 했다. 평소에 미술학원도 다니고 붓 등 엄청난 도구를 가진 덕이도 이에 동의 했다. 그런데 내가 대략 55% 정도의 표를 받았다. 덕이는 계속 학원 화백이 봐준 그림인데 어떻게 동배와 비교가 되냐며 불만이다. 그렇게 내가 이기고 몇 명이 다시 찾아왔다.
“동배야! 니가 더 잘 그렸다. 덕이 성격이 그래서 아까는 편 들어 줬다.” 이런 친구가 몇 명 있었던 점 등을 고려하면 내가 더 잘 그리기는 했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7/240
이후 미술학원 화백이 이 소리을 듣고 나를 데려 오라고 했다. 학원비는 덕이와 수근이의 1/3이면 된단다. 이를 어머니께 말했다가 그날 죽도록 맞았다.
난 결국 미술학원 근처도 못갔다. 미술 도구 하나 없이 홍이대 서양학과에서도 박수근 화백과 비견 된다는 득이를 내가 그림으로 이겼다. 하지만 목멍구이 포도청이라 아직 단 한 점의 그림도 제대로 그려 지보 못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어서인지 덕이는 홍이대 서양학과로 나를 데려가 같은 과 친구들을 여럿 소개 시켜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교실에 혼자 있는데 선생님이 들어 오더니 나 밖에 없는 것을 보고 좀 도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함께 가면서 못질을 할 수 있냐고 묻기에 나중에 기술자가 될거라 했다. 뭘 만드는 데는 자신 있다고 했더니 흔쾌히 데려가 학교 미화작업을 시작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 될 때쯤 이순신 장군 벽화를 붙였다. “선생님! 이순신 장군입니까?”, “동배야!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만 싸운 것이 아니다. 너희 할아버지도 훌륭한 장군이었다.” 마침 이를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선생님! 그럼 우리 할아버지는요?” 이 친구의 갑작스런 등장에 선생님은 약간 당황해 했다.
그 때 친구가 교실로 뛰어 가더니 ”야! 동배 할아버지도 이순신 장군과 일본 들놈을 물리쳤데…,“ 갑자기 교실 안이 소란스러워지자 선생님은 ”임진왜란 때는 동배 할아버지만 싸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일본 놈과 싸웠다. 그 때 동배 할아버지는 장군이었다.“ ”와~“
우리 할아버지는 정기룡 장군이다. 정확히 정도전의 후손인지 진양정씨나 하동정씨의 후손인지는 모르겠지만 추측컨대 하동정씨 쪽이 가깝다. 기록을 보면 풍채는 정도전과 비슷하면서 좀 더 커다. 키는 대략 180 이상…, 조선은 왕도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아야 했고 명은 임진왜란 때 연합군으로 참전했다. 그런데 명나라의 기록에는 이순신 장군이 없다. 반면 정기룡 장군은 명의 황제가 그 공을 듣고 직접 정기룡이란 이름까지 하사했다.
일본은 대부분의 병사가 평양까지 진군한 상태에서 이순신은 사실상 비어 있거나 잔병들이 지키는 적선을 격파했다. 반면 정기룡은 육지에서 최정예병들과 싸워 60전 60승을 거두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기룡 장군을 모를까?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이순신이나 정기룡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몰랐다.
정권을 잡고 당시 무기력한 국민들에게 긍지를 심어주기 위한 영웅화 사업을 시작했다. 육사와 서울대 출신 역사학자들을 선별하여 우리나라 영웅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골랐는데 정기룡이 압도적으로 1위를 했고 다음이 이순신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선조에 항명한 것이 516혁명을 정당화 하기에 적합하여 이순신 영웅화를 먼저 시작했고 다음으로 말 잘 듣고 열심히 싸운 정기룡을 영웅화 하기로 했다.
이순신이 교과서, 동상 등을 통해 어느 정도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 잡자 KBS 드라마 ‘꽃신’ 등으로 정기룡 영웅화 사업을 시작하다가 1026이 일어나 영웅화 사업이 중단되면서 지금 우리는 이순신만 기억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1등만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이 아니라 1등 정기룡은 식자들만 아는 영웅이다. 선조도 임진왜란 후 1등 공신에 정기룡,
이순신, 권율 순으로 했다가 정기룡은 살아 있고 아직 젊다는 이유로 제외하고 죽은 이순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권율은 나이가 많아 1등 공신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선조를 모시고 도망다닌 신하들이다. 여차하면 역모죄를 덮어 쓸 수 있었기에 정기룡도 결과에 매우 만족 했을 것이다. 선조 같은 왕을 만나면 그런 나라의 영웅은 안 되는 것이 좋다. 오죽하면 아들 독살설이 돌겠나? 그런데 우리가 교육을 통해 배우는 많은 위인들 중 대부분은 선조를 모시고 도망다닌 사람들이다.
008/240 나 보다 역사 공부 잘 한 사람들도 이를 알고 있나? 난세 영웅이라지만 이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임진왜란에서 가장 크게 배워야 할 것은 명의 몰락이다.
명이 망하지 않고 건재했으면 저 위인들이 백성을 얼마나 괴롭혔겠는가? 그러니 유승룡 정도는 모르겠으나 나머지는 역사에서 지우는 작업도 해야 한다. 유승룡은 이순신에게 열심히 싸울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기록하라고 강조한 것 같다.
누구보다 선조를 잘 알았을 테니까? 반면 정기룡은 그냥 열심히 싸우기만 잘 해 일본놈 코를 가장 많이 벤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정기룡이 유승룡을 만났으면 적과 싸우기 보다 일기를 썼을 것이고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 했을 것이다. 송강 등이 뭐냐?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후 선생님과 둘이서 정리하는데 ”동배야! 너는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를 잊으면 안 된다. 여덟자이니 꼭 기억해라?“ ”예“ 곧 국사 시간에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배우게 됐고 얼마 후 시험에 네모 8칸을 그려 놓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인이 누구냐는 질문이다. 바로 선생님이 얼마 전에 말한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정답이다.
어머니는 국사 공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 했고 나 또한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있었으나 이 문제의 답은 분명히 안다. 바로 얼마 전에 선생님이 나에게만 또박또박 한자씩 말하며 8자라고 했다. 2번 정도의 문제였는데 난 더 이상 국사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난 양심 있는 사람이고 이건 선생님의 반칙이다. 그렇다고 손을 들고 질의 할 수도 없다.
칸수를 보면 분명 도요토미히데요시가 맞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다음 문제를 풀다가 다시 앞으로 가는 등 계속 신경쓰여 시험 시간 내내 선생님 눈치를 보다가 결국 답을 적지 못했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발음이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게 외워지는 이름이다. 차라리 모두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 했으면 고민도 하지 않았다.
난 그때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 내 시험지를 받은 선생님이 문제지를 보더니 지나가는 말로 ‘신병, 가르쳐 줘도…,’ 그날 난 그렇게 신병이 됐다. 난 평소에 선생님들과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어쩌다 선생님과의 접촉인데 내가 잊겠는가?
G전자에서 전자레인지 디자인 샘플 관계로 미국 시어스 일본 지사장을 일본에서 만났는데 그는 미국 유학파로 영어를 잘 했다. 당시 미팅에서 가격 흥정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일본인 지사장과 저녘에 술을 한 잔 하면서 영업 직원이 내 이야기를 했다.
나의 할어버지가 정기룡이라고 했더니 일본 지사장의 얼굴이 확 변했다. 뒤에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의 할아버지가 일본 명문가 고니시 유키나가인데 일본 명문가는 후손에게 조상 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정기룡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사실 당시 난 영업 사원을 보고, “정기룡이 누군데요?” 하고 물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일본 지사장 할아버지의 부하들을 많이 죽여 그 후손들은 다들 잘 안단다. 도대체 그 영업 사원은 나도 모르는 우리 할아버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잘난 조상 덕으로 졸지에 우리나라 수출에 기여했다.
이 글을 읽고 있거나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내가 마치 착하거나 순수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글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정말이지 사람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기준으로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스스로 착각하며 판단하는 것을 너무 많이 봤다. 그래서 우선 일침을 가한다. 글을 읽었으면 삶에 도움이 되야 되지 않겠나? 난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대략 1만권 정도는 봤다.
1만권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고 있고 지금 안전가옥 도서관에 그 정도 분량의 책이 있다. 대충 봐도 모르는 책이 없다. 학교 교과서를 제외한 고전, 종교, 우화, 소설, 전문서적, 각종 문제집 등 가리지 않고 봤는데 도움된 책이 거의 없다. 누군가 10권 정도 제대로된 책을 추천해 줬으면 그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09/240
굳이 내가 누군가에게 추천 한다면 탈무드 정도다. 이 나이 먹고 보니 탈무드는 내가 가장 좋아한 지혜의 책이다. 난 책 읽는 시간을 인생의 낭비로 본다. 그런 내가 순수하고 착한 것을 자랑이라 쓰겠는가?
당시는 내가 그만큼 신병이고 무식했다. 무식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순수를 대신 할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난 무식했으나 여전히 무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 만점 고맞 서울대 나왔다고 사람이 똑똑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그냥 말 잘 듣는 사람들일 뿐이다. 30살 전까지는 누가 똑똑하고 무식한지 알 수가 없다.
옛날에는 글을 쓰거나 남길 줄 알면 마치 그 사람이 똑똑한 것처럼 됐다. 그러면 그 사람은 공짜로 먹고 살 길이 생기지 않는가? 일 안하고 잘 먹고 잘 살면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가? 학교 선생이라는 작자들은 전부 거짓말쟁이다. 이들은 인성, 지성이 어쩌고 하지만 지나가는 개가 돈 몇푼 던져주면 가장 먼저 꼬리를 흔드는 식자(識者)들이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일이 이지경으로 가고 있는 것도 전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고민하니 계속 수렁으로 빠져 든다. 처음 접했을 때 즉시 하나씩 문제를 풀어 버리면 쉽게 해결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책임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어차피 책임도 지지 않는다.
난 시골에 살면서 두 번 집을 나갔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 도요토미히데요시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내가 만드는 것을 잘한다고 ‘아마무선 만들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내 보냈다. 내가 대회를 나간다고 하자 아버지가 지갑에 돈을 얼마 넣어 주셨다. 교통비며 식사 등 전부 선생님이 지불하여 난 그 지갑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녀왔다.
대회에서 2등을 하여 교육감 상을 받았으나 집에 도착 하자마자 어머니는 “아침에 준 돈은?” 하더니 돈의 행방만 물었다. 확인하니 지갑이 없다. 진주버스터미널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다. 어머니께 교육감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그날 빗자루로 엄청 맞았다. 너무 화가 나서 집을 나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 집으로 돌아 왔다.
중학교 때는 득이가 미술 선생님한테 동배와 같이 미술대회에 나가겠다고 하여 진짜 할 수 없이 수체화 대회에 나갔다. 대회 전날 선생님이 불러 그동안 그린 것을 보자고 했다. 아무 것도 없자 그럼 수체화 도구는 있냐고 물었다. 미술 도구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미술 선생님도 기가찼다. 작은 쓸모 없는 붓조차 없자.
“왜 득이가 너하고 꼭 같이 가겠다는지 모르겠다”면서 선생님 붓과 물감을 빌려 주었다. 사람 보는 눈은 미술선생 보다는 득이가 한 수 위다. 저런 걸 선생이라고…, 사천여상에 도착 하자 다들 도구가 쟁쟁했다. 그런데 난 물통, 니젤 등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알지 못하는 사천여상 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작품을 제출 했다.
그날도 집에 돌아와 엄청 맞았다. 그때는 나이도 좀 있고 해서 집을 나와 밤새 걸어서 남해대교 앞까지 갔다. 다음 날 배가 너무 고파 집 근처의 밭에서 고구마 같은 거나 있나 하고 발길을 돌려 집으로 오는데 어떤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더니 동내 사람 중 누구를 아냐고 물어 안다고 하자 그만 그 오토바이 타고 집으로 와 버렸다.
이 때도 동네에서는 난리가 났다. 결국 가난이 모든 것을 힘들게 했지만 난 살아오면서 가난 극복을 위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긍지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이 사건을 겪고 보니 이젠 돈 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이 40이 넘으면 돈 많은 자가 가장 똑똑하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이재용 회장이 가장 똑똑하다.
서울대 교수도 퇴임 후 죽을 때 자식들을 돌아 보면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10/240
그들은 한편으론 똑똑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상을 본다.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서울대 교수님들은 대기업 기능직 정도의 봉급을 받으면서 불만은 고사하고 엄청난 긍지로 사신 분들 같다. 황교수님은 강남 설계를 하시고도 봉급이 작아 사모님께서 이혼하자고 했다더라. 경기고, 서울대, 하버드를 나와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도 요즘 돈으로 볼 때 년봉 4000만원 정도 받으며 나라에 충성을 다 했다.
그런데 지금 운동권을 보면 나라에 민폐만 끼치고 화염병 들었다는 이유로 년봉 수억을 가져간다. 민주화 운동을 했으면 좋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었어야지…, 그러고도 적다고 난수표까지 받아!! 아직 모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난수표 받은 금배지들은 절대로 용서가 안된다. 어쩌면 노회찬 의원은 그나마 양심이 있었는지 모른다. 대통령이 자살하고 동료 국회의원이 자살해도 운동권은 반성하는 양심이 눈꼽 반만치도 없다.
이쯤되면 전두환도 알아서 백담사에 다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금배지 300이 백담사에 모여 있으면 윤석열 대통령님 모시고 면회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김대중표 국가보안법은 양측이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반성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선 난 김대통령과 잘 통한다. 돈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사람을 끌고 다닌다.
일상에서 끌려 다니며 스스로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재용 회장도 가끔은 끌려다니는 것 같다. 나라의 법은 계속 추적하는 것이고 그러면 난 계속 도망 간다. 알고 보면, 이 모든 일은 상식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이 상식인데 식자들은 항상 그 상식을 깬다. 아니면 안하면 되고 해야 될 일이면 즉시 처리하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 정치, 군, 검찰, 경찰은 마치 누군가 자기를 위한 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착각으로 기다리며 일을 키운다. 능력이 없으면 수사권을 받지 말았어야지 그래야 책임도 없다.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 계속 일만 키운다. 아니, 일을 키운다고 총리 관인으로 나라 판 이완용이 애국자로 둔갑이라도 하나?
처음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 했고, 김대중 대통령이 불합리한 부분을 합리적으로 바꾸었다? 말이 안 되는 시대에는 기다리면 어차피 말이 안 되니 어떻게든 해결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논리에 고맞 말이 되는데 식자들만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좀 더 디테일로 보면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공히 완성을 끝이라 했다.
그래서 법원 판결로 2-30년 후 간첩 누명을 벗는 것이 가능하다. 아니면 처음부터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없는게 맞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선집행 후입증이고 김대중 대통령은 선입증 후집행으로 바꾼 것 뿐이다. 그런데 둘 다 법에는 맞지만 상호 충돌한다. 누구나 또는 논리나 진리도 끝을 또 다른 연결로 지보 않는다.
그런데 배웠다는 자들이 끝을 또 다른 연결이라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논리를 만든다. 수원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보고 하는 말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다. 이는 보어를 목적어로 해석하는 것이다. 진짜 무식한 것이 맞다. 충분히 배운 것 같은 자가 이렇게 무식하다면 누가 믿겠는가? 끝은 그냥 끝이다. 다수당은 더 이상 김대중 대통령 욕보이지 마라.
상식이 안 통하는 세상은 다들 똑 같다. 만약 회복 불가능한 손해 등에 대한 보상이라면 이 모든 것은 안전가옥 끝에 맞추어 시작 했어야 하고 끝에서는 모두 같이 끝난다. 이는 625 전쟁이 유엔 등에 의해 끝났는데 이승만 혼자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승만이 대통령이랍시고 총들고 설쳐봐야 병사 한 명 따르지 않는다. 이승만이나 잘난 사람들은 모두 망상 속에 산다. 현실은 이런 것이다. 권력이라는 것 또한 이런 것이니 빨리 그 이치를 깨닫기 바란다.
011/240 평생 앞만 보고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잘 안다. 어쩜 다른 누군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스스로를 망상 속에 가둔다. 조선시대에는 이방과 형방 등이 나라를 주물렀지만 기록은 마치 사또나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묘사되어 현실을 지보 못하니 전쟁 한 번 하지 못하고 나라가 망했다.
그렇게 능력이 있으면 애초에 전쟁을 막거나 자주 독립을 했어야지…,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날 하교하여 집에서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선생님이 그러는데 우리 조상 중에 장군이 있습니까?” “장군 뿐이냐. 조선도 너희 할아버지가 만들었다.” “그럼 이성계 왕이 우리 할아버지입니까? 국사책 제일 앞에 사진이 있던데…,” “국사는 알 필요없다.
너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무엇보다 너의 그 잘난 조상들 때문에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산다. 내가 너 보고 공부하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 알려고 해” 하며 화를 냈다. 성적표를 받으면 내가 직접 아버지 도장을 찍어 갔다. 부모님은 내 성적표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어머니 주장은 이유있다. 그 때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오자 “그 잘난 조상, 아버지께 여줘봐라”, “왜 또 조상님 가지고 그래.” 부모님은 1년 365일 다툰다. 하지만 항상 어머니의 일방적인 승리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가 처음으로 반격하는 모습을 봤다.
“나를 욕하는 것은 뭐래도 상관 없지만 조상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둘은 그 날 지독한 부부 싸움을 했다. 아버지는 힘든 가난 속에서도 재사를 지낼 때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여러 재사 도구와 옷을 깨끗하게 다려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번지르르하게 바르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조상을 섬기었다.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났는지 모른다.
곤명면에 있는 조장이라는 작은 마을은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군이 상륙하여 빨갱이 소탕 작전을 하는데는 문제점이 많았다. 우선은 눈이 작고 코가 낮은 등의 특징이 양측 모두 똑 같다. 그래서 이를 구분하기 위해 흰색 옷을 입으면 미군편, 나머지 색의 옷은 공산당으로 구분했다. 물론 군인은 국방색이었으나 이는 군의 이동 확인이 가능하니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나라는 공산당과 미군편이 밤이면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아버지는 국군편, 아들은 공산당이 되니 어느 아버지가 아들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빨갱이들도 모두 흰옷으로 바꿔입고 빨치산 활동을 시작했다. 이를 눈치챈 미군은 작전을 바꾸었다. 흰옷을 입고 개별적인 행동 즉, 농사 등을 하면 미군편,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공산당으로 간주하고 공격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어 보이나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사실 미군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지리산 등에서 직접 소탕하는 것은 국군이고 미군은 대부분 전투기로 공격했다.
드라마 등을 통해 보면 군인이 열심히 싸우는 장면이 많이 연출되지만 625 전쟁은 사실상 공중전이다. 대부분의 전쟁은 전투기로 특정 지역을 폭격했기 때문에 이는 미군의 문제가 아니라 전시에도 지시를 따르지 않는 태평한 국민의식이 문제다. 당연히 우리 힘으로 북한 공산당을 물리치는 것이 가장 좋다. 북한 공산당은 정치인의 주장과 달리 서로 생각과 이념, 사상이 전혀 다른 사람들의 집단이다. 물과 기름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북한 주민 역시 대부분 사회주의를 추종하여 북한에 남았지 강제로 머문 사람은 일부다. 헌법 운운하며 막가파로 통일을 주장하지 마라. 또한 마치 강대국의 이념으로 분단 된 것처럼 날조하지도 마라. 무엇보다 가장 못난 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로 남은 것은 어쩌면 반상의 도리가 뿌리 깊게 자리한 것도 한 몫 했다. 국민 절반은 세상을 잘 모르는 천민 출신으로 대부분 사회주의를 꿈 꾸었을 것이다. 나머지 반은 양인 출신으로 자본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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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분단은 힘 없는 민족의 서러움 보다 우리 스스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똥고집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 사는 것은 자본주의의 승리라기 보다 유엔도 아닌 미국의 원조로 보는 쪽이 더 가깝다. 물론 우리나라 노동자의 노력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런 원조가 있어도 가난한 나라는 많다. 잘 살아 보겠다는 국민적 여망이 노동으로 나타난 결과다. 그렇다고 노동운동과 연결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노동자 등골에 빨대 꽂는 것 빼고는 식자들이 한 일은 거의 없다. 빨대 꽂는 것은 노동자 단체들도 똑 같다. 결국 식자가 국민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유전을 개발하는 등 타고난 바탕에서 찾거나 특허 등 기술적 이익이나 금융 등을 가져오는 것이다. 아니면 전쟁 한 번 하지 않고 일본이나 중국 땅을 뺐는 것도 좋다. 필요에 따라서는 전쟁을 해도 된다.
아니면 원자력, TV, 선박, 반도체, 자동차, 비행기 등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그 권리를 국내로 가져오는 것인데 이런 것이 뭐가 있는가? 아니면 얼마나 있는가? 대부분 제조를 통해 외화를 벌어들였으니 노동이 만든 결과가 확실하다. 이렇게 배가 좀 부르니 노동의 땀 위에 숟가락을 놓는 것이 식자다. 확실한 통계로도 얼마든지 입증이 가능한데 식자들은 이를 빙빙 돌린다. 아무튼 이런 변경된 미군의 전략은 공무원을 통해 즉각적으로 각 마을에 전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각 마을은 이를 즉각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 하겠으나 우리가 어디 그런 민족인가? 우리 역사의 공무원 중에 민초를 바라본 자가 있는가?
말단 공무원도 없다. 모두 군주나, 일본, 미군, 독재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변경된 미군의 작전은 전달되지 못했고 혹 누군가 전달 했어도 국가에 대한 불신이 강한 국민들은 따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군은 흰색 옷을 입고 모여 있으면 공격하는 것이 작전이고, 마을 사람들은 알거나 모르거나 전쟁 중이라도 잔치는 한다는 신념이 충돌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도 어리석은 자들이 아닌가? 어느 날 미군은 조장 마을 정자나무 주변에 흰옷을 입은 수십인지 수백인지의 사람들을 발견했고 즉각 공습명령이 떨어졌다. 그 날 여름 나의 고향 조장 마을에는 미군의 공격으로 살아 남은 자가 단 한 명도 없다. 이후 조장 음달 마을은 객지의 후손들이 터를 닦아 아직도 여름이면 때재사를 지낸다. 내 어릴 때는 향 냄새가 1.4Km 건너 양달까지 전달 됐다. 맞은편 양달은 대부분 외지(外地)의 군인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우리 가족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이 쪽에서는 농사를 배울 만한 자가 없다. 양달 마을 저수지 옆 산은 임진왜란 때 정기룡 장군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한 조경 장군의 선산인데 그 후손이 살면서 유새했으나 지금은 없다. 저수지 바로 밑에는 선조 때, 유성룡의 후손이 자리 잡았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집안이 우리를 가장 성심껏 도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상 우리 집안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나 보이지 않는 역사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마을 가운데는 우물이 있었고 바로 옆이 우리 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마을 가운데 위치하여 마치 감시를 당하는 것 같다. 원래 마을 우물은 지금의 배원 골프장 옆이었다. 당시 다른 사람이 살았던 우리 집터는 입구나 출구가 별도로 없어 아무 곳으로나 다닐 수가 있었다. 뒤에 공동 우물이 생기면서 사실상 전용 우물 비슷하게 됐다. 지금 마을 문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바로 아래 있는 집은 순종 임금 때의 궁녀가 내려와 사방에 탱자나무를 심어 놓고 위리안치했다.
얼핏보면 일반 마을 같으나 그 외에도 자세히 보면 특이 할 만큼 이유 있는 집들이 우리 집을 빙 둘러 싸고 있다. 좀 억척하자면 이들은 보이지 않게 우리를 괴롭히는 악당들이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살 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을 구하지 못했거나 안해 고졸인 교감 선생님이 영어 수업을 대신했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13/240
교감 선생님은 알파벳도 제대로 모른다. 그래서 난 이 수업이 제일 좋다. 친구들에게 확인이 필요 하겠지만 학기 마칠 때까지 영어 교과서를 단 한 페이지도 지보 않았다.
난 시골에서 9년간 학교에 다녔는데 그 중 가장 유익한 수업이었다. 당시 영어 시간을 가르친 교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똑똑하다는 친구들은 그 시간에 각자 공부를 하여 이런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삶이 좀 더 나아졌나? 대충 이런 이야기를 주로했다.
일제초기 일본군은 진주성을 장악하고 완사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니까 말이 진군이지 그냥 접수하러 다니는 정도다. 일본군 3-4명 정도가 몇 개의 면을 정리하기 위해 곤명 쪽으로 내려 왔다. 이 소식을 미리 접한 여러 마을 주민들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 위해 송비산 쪽으로 죽창을 들고 모였다.
이미 나라는 항복 했지만 이런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니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려고 대략 100여 명 이상이 모였다. 그런데 일본군 역시 이 소식을 미리 듣고 작전을 짰다. 1-2명이 지역방위군의 앞에서 모습을 살짝 보이며 총소리를 냈다.
“탕! 탕!” 나머지 2명 정도는 지역방위군의 뒤쪽으로 가서 그 소리에 맞춰 주민들을 한 명씩 여유롭게 사살했다. 그런데 지역방위군 100여 명은 전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모두 앞쪽 일본군만 바라보다가 전멸했다. 지역방위군을 전부 사살한 일본군은 죽창을 들고 살아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찔러 확인 사살 후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그 때 한 명이 죽창에 허벅지를 찔리면서도 시체를 덮고 소리를 죽여 살아 남았는데 그 사람이 가끔 장날 볼 수 있는 누구란다. 그러면서 ‘에이 신병들!’ 하며 놀리곤 했다. 또 한 번은 옥녀봉에 간첩이 떴다는 제보가 있어 군과 경찰이 출동 했더니 일본 군인이 총을 들고 바위 틈에 숨어 그대로 죽어 있었다며 당시의 참상을 말하곤 했다.
조장 마을의 때제사도 이 분이 영어 시간에 말씀 하셨다. 난 이렇게 재미난 영어 시간을 보냈다. 2학년 때는 사회 선생님이 영어를 가르쳤는데 영어를 가르치기 보다 불만을 더 많이 토로했다. ‘나도 영어를 얼마나 못하는데 나한테 영어를 맏기냐?’ 뭐 이러면서 수업도 두 세번 했나? 난 애쓰는 사회 선생님 보다 교감 선생님이 더 좋았다.
알파벳은 배워서 뭣하나? 그 때 난 영어를 제일 못했어도 아마 지금은 내가 제일 잘 할걸? 내가 우리나라 수출에 엄청나게 기여한 점 등을 고려하면 영어 활용도는 우리 동기들 전부를 합친 것 보다 내가 더 국익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난 진짜 우리나라 수출에 엄청 많이 기여했다.
따라서 니가 국회의원을 지냈건 장관을 지냈건 나대지 마라. 어차피 지금 쯤이면 전부 정동배 저놈 제거 해버리자고 떠들었을 것 아니냐? 그러니 난 너희들처럼 하찮은 애들하고 같은 밥먹기 싫다. 이 나라 정치인하고 난 어차피 적이다. 다만 법적으로 어떻게 뜻을 같이 하냐의 정도다. 이주호처럼…, 난 지난 20년간 이주호를 욕하며 살았다.
동기들 중에 나보다 영어 잘 하는 사람 있나? 난 가끔 네이티브다. 그냥 가끔…, 중학교 2학년 때, 그 중 가깝게 지냈던 철이가 있었는데 공부도 곧 잘 했고 성격도 워낙 좋아 내가 수업 전에 항상 이 친구의 과제를 베껴 매맞는 것을 피하곤 했다.
한 번은 교실에서 참고서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 이것 선생님이 보는 책이잖아!”, “그냥 참고서인데…,” 이 친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고 난 문제가 출제된 책은 선생님만 보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학생은 항상 교과서만 봐야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글에 색도 있고 문양 비슷한 것도 있어 난 선생님한테 신고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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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런 참고서 안 보냐?”, “이건 선생님들 보는 책이야!”, “넌 진짜 참고서가 뭔지 모르는구나?” 하며 이상한 눈으로 나를 봤다. 행렬이는 학교 끝나고 철우와 참고서로 공부도 같이 하는데 평균 점수가 나보다 낮다며 의아해 했다. 난 진짜 교과서로만 공부한 서울대 출신이 맞다. 그렇게 보면 행렬이는 확실히 나보다 머리가 나쁜 것 같다.
착한 철우는 나를 불쌍히 봤는지 이미 다 본 참고서를 준다고 했으나 난 선생님 책을 보는 것이 두려워 거절했다. 이건 확실히 무식한게 맞다. 한 번은 아버지가 소주 반 병 정도의 등유를 어디선가 구해 왔다. 난 매우 기뻤다. 이제 우리도 밤에 불을 밝히는 줄 알았다.
집에는 호롱불을 켤 수 있는 종지와 그 공간이 있다. 그래서 등유가 그렇게 반가웠다. 그런데 그 호롱불은 결국 한 번도 지보 못했다. 아마도 아버지 친구분들이 올 때 몇 번 사용했던 것 같다. 아버지 친구분들은 대부분 625 참전용사들이다. 한 번은 방에 누워 있는데 아버지가 호롱불을 준비하고 있었다.
왠일인가 기대하며 지켜 봤더니 나 보고는 그냥 빨리 자란다. 그래서 방 구석의 커튼 비슷한 천을 덮어 쓰고 누웠는데 이웃 마을의 어른 몇 명과 방에서 담소 나누는 것을 들었다. 그 중 머간이라는 마을의 어른이 제일 말이 많았다. 마치 밀담을 나누는 것 같았으나 그냥 625 때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곳에 있었다는 등 말하며 당시의 참상을 말하는데 아마도 이들에게 난 보이지 않았나 보다. 이는 보통의 방송이나 책으로도 듣지 못하는 이야기 같아 아픈 역사를 한 번 기록해 본다. 빨치산 여군을 잡았는데 적의 위치를 빨리 알아내지 못하면 국군이 죽을 수 있기에 심한 고문을 했다. 리기다 소나무의 솔방울은 크고 매우 거칠다.
이를 공산당 여군의 성기에 넣고 돌리며 고문했는데 피를 흘리며 죽을 때까지 입을 안 열더란다. 또 다른 사람은 유리병을 깨어 바닥에 깔아 놓고 옷을 벗긴 다음 양쪽 팔을 잡아 깨진 유리 파편 위로 끌었다. 계속 끌고 다니며 고문을 해도 말을 안해 급기야 창자가 다 나왔다는 등의 말을 듣고 난 그날 무서워서 잠을 못잤다.
전쟁은 함부로 입에 담으면 안 된다.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전쟁이다. 한마디로 인권 등은 개나 줘버려다. 방송이나 영화로 보는 전쟁은 양반이다. 한 번은 낙동강 전선의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는 차마 기록하지도 못한다. 이념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렇게 한 번 호롱불을 켜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은 들었지만 난 그날 어둠 속에 있었다.
난 학교 마치고 와서는 소꼴을 한 짐 해온 후 식사 마치고 어두워지면 잠을 잤다. 그래서 아직도 내 손에는 낫으로 풀베며 입은 상처가 수십군데나 있다. 특히 양손 검지는 상처 아닌 곳이 없다. 오후에 해가 지면 우리는 5시쯤 잠이든다. 물론 아침은 해가 뜰 때까지 잔다. 가끔은 이웃이 찾아와 학생이 공부는 안하냐며 걱정도 해 주었지만 난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 난 학생 같지도 않고 학교 같지도 않는 곳을 다녔다.
호롱불 한 번 켜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그 불로 공부 한다는 것은 사치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면서 집에서 숙제를 한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후 5시면 불빛이라고는 전혀 없는데 어떻게 숙제를 한단 말인가? 난 이런 숙제를 내는 선생들이 너무 미웠다. 보바들이 아니라면 환경이 되지 않는데 그런 숙제를 자꾸 내면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숙제 안 해왔다고 왜 때리는 거야? 학교에서는 한석봉이 반딧불이로 공부 했다는데 이는 전부 거짓말이다. 이 나라 국민들이 전부 사기에 노출되어 교과서에서 조차 이런 엉터리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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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역사 왜곡은 일본 보다 우리가 더 많이 한다. 특히 방송국 들놈이…, ‘나는 이 나라의 국모다’ 이런 친미…, 년이이 나라 말아 먹었다. 연필도 없던 시대에 반딧불이로 붓글씨는 어떻게 쓸 수 있고 비닐 봉지는 어디서 났단 말인가? 또 그 많은 반딧불이는 어떻게 잡았고 한석봉이 부자라 반딧불이 잡는 하인들이 많았나?
역사 왜곡도 좀 적당히 하자. 어디 돼먹지 못한 학자들이 모여 대국민 사기극을 벌려…, 먹지를 못하니 몸도 약했다. 눈이 점점 보이지 않더니 가장 앞자리에 앉아도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으나 눈이 나쁘다는 자체를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시 면접 보려고 안경을 처음 맞췄으니 공부를 잘 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된다.
가능한 빨리 학교를 떠나고 싶었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남해 이동의 남흥여객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청소 등 일자리가 있으니 3학년 다니지 말고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학교에서 시간 때우느니 그곳에 가면 월급은 없어도 밥은 먹고 산다며 아버지와 뜻을 같이 했다.
그럼 내일부터 학교 안 가고 그곳으로 바로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염려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내가 흔쾌히 허락했다. 이젠 학교가 더욱 싫다. 하지만 당장 남해에서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대기 상태이기 때문에 학교는 가야 했다. 친구가 말을 걸어왔다. “동배야! 민이가 왜 저렇게 열심히 공부 하는지 아냐?”,
“몰라, 친미놈인가 지보 뭐.”, “제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너희 아버지 논 많냐?”, “아니”. “그럼 넌 졸업하고 뭐 먹고 살거야?”, “몰라, 난 남흥여객에 세차하러 가기로 했어. 아마 내일부터 학교 안 나올지도 몰라.” “너희 아버지 빽 좋내. 그래도 우리 마지막으로 공부라는 것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
사실 이날 짧은 대화였지만 나를 돌아보는 첫 계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몇일 지나 2학년 기말고사 전에 다른 친구가 “동배야! 너도 학교에서 공부 좀 하지” 하여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부라는 것을 단 하루만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에 교실이 그렇게 밝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밝은 전기불이 신기하여 여기저기 막 돌아 다녔다.
친구들도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밤늦게까지 그렇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 친구가 오더니 “넌 공부 뭐 할꺼야?” 물었지만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뭘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앉아 놀았다. 그러자 참고서가 없냐고 물었다. 난 아직 참고서를 한 번도 본적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시험 범위의 교과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하여 그날 밤을 꼬박 세워 교과서 시험 범위를 몇 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다음 날 시험을 치는데 놀라운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항상 시험을 왜 치는지도 모르고 자리만 지켰는데, 이번에는 바로 어제 밤에 공부한 내용의 문제들을 쉽게 풀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를 읽고 답을 맞추는 것이 무엇인지를 처음 알았다. 내가 시골로 내려 갈 때 누군가 내 성적표를 살짝 조작해 놓은 것을 봤다. 그 때의 나를 누구보다 난 잘 안다. 사람을 살짝 흔들어 놓을 생각인가 보다. 물론 어디선가 키다리 아저씨가 지켜보는 것도 안다. 하지만 래몰 한 번 도와주고는 좀 더 쎄게 몇 번을 찍어 눌러 버리는 것도 잘 안다.
난 모난 돌이고 평생 정을 고맞 살았다. 그러니 내 앞에서 생색 내는 놈은 신병되기 싫으면 까불지 마라. 그날은 한숨도 안 자고 공부했고 분명히 내가 아는 문제가 많았다. 중2 마칠 때까지 딱 하루 공부했는데 지난 8년간 평균 40점 정도의 점수가 대략 64점으로 평점 20점 이상이 올랐다. 이는 100% 내 능력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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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교과서 전 과목을 다 가져 있었으면 평균 70점도 충분히 넘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날의 문제 일부가 기억 날 정도이니 장난 치지마라. 내가 그때 나를 아는데…, 꽉!
그렇게 공부하는 것을 처음 배웠고 친구들도 놀라워했다. 하루 공부하고 평점이 20점이 넘는 놈이라나…, 참고서까지 있었다면 하루 공부 하고도 80점은 거든히 넘었을 것이다. 하루 공부하면 될 일을 학교는 8년이나 나를 잡고 매질만 했다. 꼬박 이틀을 굶고 공부하며 시험을 쳤지만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았다.
내가 밤에 공부라는 것을 했다는 뿌듯함이 왠지 스스로를 즐겁게 했다. 사실 당시 하루 이틀 굶는 것은 일상이다. 아무튼 바로 이 점수가 내 인생을 바꿨다. 얼마 후 같은 동내 선배가 부산기공을 다녔는데 올해부터 전국 모집이 아닌 영남지역 모집으로 바꿨다고 했다.
그래서 마지막 학기말 평점이 80점 이상 되야 원서를 쓸 수 있었는데 60점 이상이면 원서를 받아 준단다. 부산기공은 국립으로 모든 것이 공짜다. 그러니 합격만 한다면 나처럼 만들거나 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에게는 딱이다. 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치러 갔는데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지원했다.
지원 기준이 낮아져서 900명 모집에 수천 명이 몰렸다. 원서는 어떻게든 접수했지만 합격은 또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이 또한 천운인지 수학, 기술, 과학 등 평소에 내가 좋아 하는 과목이 전부 들어 있고 역사, 사회, 영어 등은 모두 빠졌다.
같은 중학교에서도 나보다 평점이 훨씬 높은 친구가 떨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내가 900등 꼴지로 합격한 것 같다. 부산기공은 내가 가기에는 진짜 넘치도록 좋은 학교다. 영어, 역사 등의 과목을 잘 하는 한 친구는 학기말 평점이 80점이 넘는데도 시험에서 떨어졌다.
이 때 내 별명대로 난 첫 ‘턱걸이’를 했다. 비록 털걸이로 들어 갔지만 난 고등학교에서 정말 빚났다. 선반과 선생님은 선반에 재주가 있으니 함께 기능올림픽을 준비하자고 했고, 컴퓨터 선생님은 내가 애플 베이직을 잘 이해 한다며 컴퓨터를 배우라고 했다.
설계과 주임 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뺑뺑이 정동배가 설계자격증을 한 번에 땄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난 정작 미술도장(장식미술) 국가대표가 됐고, 포스터 대회에 출품하여 최우수상을 받는 등 만들고, 그리는데는 이곳에서 나를 당할 자가 없다.
그러니까 그냥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해도 다른 친구들이 한참을 고생해야 내 흉내를 내는 정도라 해야 할까? 우리 황교수님과 나교수님께서 이 부분을 좀 읽었으면 좋겠다. 교수님! 나 그렇게 못난 제자는 아닙니다. 재료역학은 단 한 문제만 출제된다. 몇 그램 정도의 공이 경사 몇도, 길이 얼마에 마찰률 얼마로 떨어질 때 구르는 시간을 계산하거나 하는 짧은 문제다.
그러니까 두 줄 정도의 문제에 풀이는 A4 2장 정도 된다.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생이 풀이를 암기한 만큼 적는 시험이다. 기능 선수를 시작하면서 수업을 듣지 못한 난 중학교 때 배운 방정식과 함수 몇 개를 응용하여 한 페이지 반 정도로 풀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었는데 선생님이 나의 풀이를 매우 좋아 했단다.
그렇게 문제를 푸는 학생이 부산기공 생기고 내가 두 번째란다. 이를 듣고 내가 어렵게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답을 맞춘 것으로 알겠지만 사실 답도 틀렸다.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마라. 가끔 어떤 사람은 나를 천재 비슷하게 보는데 난 특정 부분에 특화된 천재 흉내 내는 정도다. 나머지는 거의 보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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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별명이 보바라면 난 진짜 보바다. 띠리리 리리 리! 봐라 맞지? 그런데 그 풀이가 논리적이라 풀이와 답은 틀렸지만 논리에 맞다며 높은 점수를 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기능 선수였기 때문에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을 뿐이지 일반인과 비교하면 공부 못하는 중졸로 볼 수도 있다. 고등학교라는 장소에서 주업은 기능선수이고 부업이 학생이다. 기능선수는 대회 입상 실적으로 성적이 나간다. 그래서 내 고교 성적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아 서울대학원 진학이 가능했다. 굳이 비교하자면 씨름 선수 강호동이 하고 비슷하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내가 서울대학원에 지원서를 쓰면서 고등학교 성적을 처음 봤다. 그만큼 학교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기능선수라고 애써 챙겨 주셨지만 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서울대학원은 고등학교 성적표도 제출해야 한다.
625 이후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의문을 품는 자는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을 타개하기 위해 간호사와 광부들을 독일로 보냈다. 이후 독일 총리의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만 이들의 모습을 보고 울어 버렸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잘 안다. 아마도 긴 여정에서 일국의 대통령이 비행기표도 못구하는 등 고생하여 도착해서 특히, 광부들 모습을 보고는 그냥 눈물이 흘렀나 보다.
이를 지켜보던 독일 총리는 국민을 진정으로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게 되어 한국을 도울 길을 찾는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조국 근대화 즉, 중화학 공업으로의 길을 제안 했고 독일은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독일의 기술교육시설 보다 뛰어난 기술교육원을 만들어 주었다.
바로 한독기술학교 즉,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보통은 기계공고를 비슷한 학교로 생각하나 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는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운영에 관한 법률’로 설립된 학교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립서울대학교 운영에 관한 법률’과 단 2개의 학교만 특별법으로 설립됐다. 굳이 억척하자면 공무원으로 치면 청와대 공무원인 셈이다.
공무원이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일반인은 몰라도 학교 하면 반드시 이 두 학교는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이 두 학교의 직원이나 선생님, 교수 등도 모두 공무원이고 또한 당시는 특별법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학교들이기 때문이다. 법을 모르면서 어떻게 법을 지킨단 말인가? 그러니까 서울대학교는 여느 국립대와 다른 학교다. 이는 법률의 문제다.
이 글을 읽고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모르는 공무원이 대부분일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나라가 아닌가? 도대체 어떤 들놈이 공무원 시험 문제를 이 따위로 출제했기에 기본을 모두 뺀 문제만 출제 했단 말인가? 잘 하지 말고 그냥 기본만 하자. 이 꼴통들아!
학생들이야 그냥 학생이니 잘 모르겠지만 부산기공 선생님들은 그 프라이드가 보통이 아니다. 한 번은 학생들끼리 싸우다가 해운대 경찰서에 잡혀 갔다. 선생님이 보호자로서 경찰서를 찾아가 친구들을 데려온 후 이 일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선생님이 경찰서에 도착하자 경찰이 서류로 학생들 머리를 때리며 “공부를 못해 기술을 배우기로 했으면 열심히 기술만 배우면 되지 어디 못돼 먹게…,” 라며 학생들을 혼냈다.
경찰 말로는 학생들이 “‘초경’, ‘팁’, ‘다이아몬드’가 뭐라 뭐라 하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학생들이 못된 짓만 골라하고, 다이아몬드 살 돈은 또 어디서 났단 말입니까?” 라며 선생님을 혼냈다. 그래서 선생님은 학생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초경이 A학생의 것인데 B학생이 빌려가 팁으로 사용하여 다이아몬드로 잘 못 갈았으니 물어 내라는 것이다.
국민의 50%가 넘는 대한민국 기계공고나 실업계 출신들은 대부분 흔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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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학생이 누군가에게 팁을 주고 한 여성의 초경을 어떻게 하여 다이아몬드로 합의를 보려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사실을 확인한 선생님도 처음에는 약간 황당했다.
경찰은 막무가내고 그렇다고 설명이 안 되어 학생에게 교과서를 꺼내라 하고는 하나 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것은 선반이고, 이것은 팁이고, 이것은 초경이고, 이것은 바이트고, 이것은 심압대고 등 설명한 다음 학생들은 이런 수준이고 이들에게 이 초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하루 종일 설명했다.
속된 말로 경찰 너 보다 열배는 더 똑똑한 애들이고 이들의 기술 수준은 국내 최고다. 이 무식한 들놈아! 뭐 이런 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던 다른 경찰이 부산기공을 알아보고 그 경찰관을 혼내며 정리하여 학교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경찰이나 밖의 일반 공무원은 여러분을 모르니 만나면 무조건 피하란다. 돌이켜보면 이는 진리다.
국회의원은 이런 들놈한테 수사권을 넘겼다. 선생님이 항상 해결사로 나설 수는 없단다. 도대체 특별법으로 설립된 학교 학생을 공무원들이 모르면서 이들은 무엇을 지킨단 말인가? 내가 주로 원망하는 공무원은 하급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공직원으로 부르거나 공노비로 부를 필요가 있다. 법을 전혀 모르는데 감투만 높이 쓰고 있어 국민들도 헷갈린다.
국제대회까지 가서 5일씩 경기를 하여 능력을 인정 받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기능공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은 공무원이라며 으쓱거리게 둔단 말인가? 법도 모르고, 한자도 모르고, 영어도 못하고, 컴퓨터도 못하고, 안보, 안전도 모르면서 노조이니 공노비가 맞다. 아니면 공무원 시험문제 출제자들을 잡아다 볼기를 쳐 발라야 한다.
고위 공무원도 이것이 헷갈리는 것 같다. 고위공무원 1,2급 얘들아! 이쯤되면 대부분 우리 같은 건물에서 공부한 후배들 맞지? 선배들이 개떡 같이 만들었다고 그대로 따라하지 마라. 이는 좀 다른 선배의 부탁이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기능올림픽 출신은 최고의 기술자가 맞다. 알겠나? 단어가 사람이나 직업의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된다.
건방진 들놈! ‘SKILL’은 그냥 해석해도 기술이다. 스킬올림픽이면 기술올림픽이지 어찌 기능올림픽이 되냐? 반상 좋아하는 들놈이 이름을 이렇게 지어놨으니 개고생 해도 항상 깔고 보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고위공무원 후배들아! 기술올림픽과 공노비로 가즈아!
일선 공무원들과 오랫동안 일을 했는데 이들은 말이 많다. 공무원은 봉사하는 직이라며 큰소리 친다. 혹자는 공무원은 월급이 아니라 봉급을 받는다며 시끄럽다. 하지만 이 말 뜻을 이해하는 공무원은 아무도 없다. 참으로 재미난 세상 아닌가? 법을 알아야 법을 지키지…, 아무래도 공무원 시험 문제 출제자를 전부 바꿀 필요가 있다. 개똥들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공무원이 입에서 나오는 말의 뜻도 모르면서 저렇게 수다를 뜬단 말인가? 공무원은 봉사하는 직이다. 그래서 봉급을 받는다. 그럼 무엇이 봉사인가? 노인 도와주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이 봉사인가? 그럼 공무원 사비로 하든지, 적어도 녹을 먹고 사는 공무원의 봉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공무원의 봉사는 헌법 제7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것이다. 즉, 봉사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인데 이는 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공무원의 가장 기본이다. 법이란 것은 완전 할 수가 없으니 공무원이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늬앙스 즉, 기호, 눈치, 상황, 낌새, 의미, 분위기 등의 점들 연결로 상황을 파악하여 법에서 약간 벗어 나더라도 이를 법에 맞게 집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약간의 리스크와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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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국가는 이를 보고로 받아 알고 경우에 따라 보상도 해 준다. 그러려면 항상 상부에 보고를 잘 해야 하고 보고가 잘 되야 법이 지켜지고 국민이 편안하다.
과정에 문제가 있어 보이면 국민권익위원회에 이를 보고 하고, 이런 모든 것을 하지 않으면 그 공무원은 없애 버려도 된다. 그런데 고위직 중에서도 보고가 없으면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 하는 자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급 공무원들이 저 모양이란 말인가?
필요 없는 공무원을 치웠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냥 뇌물이나 비리 정도의 개나 소나 알 수 있는 일로 처벌하는 것이 전부다. 고위공무원은 지자체와 노조 때문에 지시도 함부로 못하고 하급 공무원은 아는 것이 없으니 국민만 중간에 끼어 개고생이다. 안보고 법이며 다 판개치고 국민만 힘들게 하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나?
나존 좋단다. 벌씨들놈!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웃과 공동체다. 따라서 불법이 일어나도 공무원에게 신고 하기가 매우 난처하다. 많은 문제점들은 이장이나 부녀회 등 여러 단체와 결탁된다. 그러니 공무원은 항상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의 이상 행동들을 알아채고 이를 파악하여 잘못을 바로 잡고 법을 지키는 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지방 공무원이 보고하면, 중앙 정부는 대부분의 보고에 대해 즉답을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신이 오면 반응하고 안 오면 계속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보고를 올린다. 이런 과정에서 공무원의 손해가 발생하면 이를 보상해 주는 것이 국가직 공무원의 일이다. 후배들아! 알겠냐? 나 유명하다고 했으니 다들 알지?
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관용 차량을 세차하면 공무원은 이 차량을 절차를 거쳐 폐차하여 매각 등으로 나에게 주면 중앙정부는 대신 더 좋은 차량을 지원하고 그 공무원을 진급시킨다. 공무원이 선출직 똥멍구 잘 따라 다닌다고 진급 시키면 나라는 망한다.
국민은 공무원 눈치 본다고 눈동자가 머리 끝까지 올라가 있는데 수천 수만 번의 눈치를 줘도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공무원이다. 이 신병 끼새들은 부탁하면 지가 잘나서 앞에서 기는 줄 안다. 김혜경 법카 사건의 관련 공무원이 대표적으로 아주 무식한 놈이다.
무식한 놈의 가장 큰 문제는 지가 무식한 것을 모른다. 보바가 머리에 꽃을 달고 다니며 항상 웃는 것과 같은 원리다. 대화가 아니라 가르침이 필요한 들놈이 소통을 주장하는 한심한 꼴이다. 사랑하는 후배들아! 내 말 명심하고 공무원 구분 잘 지어라! 천 번 이상의 늬앙스에 소통이 아니라 그냥 종이학이 되는 자들을 봤다. 좀 더 있었으면 난 미쳐버렸을 것이다.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돌가대리 소리 보다 범죄자 소리를 듣고 살아라. 쪽팔리지도 않나? 시골 농부가 비웃으며 공무원은 이런 것도 모른다면서, ‘아이고 주사님!’ 하며 부탁하자 ‘아, 예 바로 해드릴께요’ 하더라. 그러자 그 농부가 옆눈으로 봐라 이것이 공무원이라며 비웃는데 공무원은 그 위법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것 같다.
난 문래동에서 근무하여 주로 영등포역을 이용했다. 역사까지는 큰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시골 할머니들이 큰 짐을 들고 오르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난 당시 무식하여 매번 도와 주었다. 이는 바로 민간인이 할 일이다. 공무원은 그 짐을 들어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소매치기를 잡거나 통행로 지정 등 법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부산기공은 대통령이 매년 1회 이상 찾아와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며 기술 배울 것을 강조 했는데 바로 코앞의 경찰이 무식한 상상력으로 학생들을 여학생 간강범으로 몰고가는 것도 모자라 하루 종일 설명하야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기구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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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사권까지 받은 이 끼새들은 고졸이나 없는 사람이면 뺑뺑이 조사하여 힘 없는 놈이 지치기만을 기다린다. 반면 학벌이 좋고 집안이 빵빵하면 조사도 하지 않는다.
서울대 석사까지 받은 너는 뭐냐고? 난 상대가 최병렬, 나경원 등이다. 그러니 이들 눈에는 똑 같은 고졸 비슷하게 보인다. 한편으론 서울대 석사 고졸 같기도 하다. 내가 강남 경찰서 조사 받으러 가면 내 앞에서 상대방에게 전화하여 “맞죠? 그렇겠죠?” 하며 아주 예를 다 갖추더니 상대를 불러 조사도 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한다.
윗 사람이 맞다고 하지 않느냐는 식이다. 발씨들놈! 범인이 지가 범인이라는 것 봤어? 난 그나마 서울대 석사라도 있어서 여기까지 왔지 보통 사람들의 경우 소송으로 가면 100% 없는 죄도 덮어 쓴다. 이 글을 읽고, 서울대 수석 정도 안 해본 사람이라면 절대 소송으로 가지 마라. 물론 결과적으로 맞는 것인지 처음부터 맞는 것인지는 집행을 두고 봐야 안다.
소송으로 가느니 그냥 알아서 처리하고 딱 잡아떼든지 평생 나랏밥 먹고 살아라. 요즘은 교도소도 지낼만 하더라. 무식해도 무식한 것이 무엇인지 정도 알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지금의 공무원은 그럴 필요를 전혀 못느낀다. 공무원은 절대로 처벌하지 않는 세상에서 시간만 떼우면 죽을 때까지 배불리 먹고 사는데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차라리 뇌물 먹는 공무원이 많은 나라가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중에 행동하는 놈도 있지 않을까? 이런 무식한 들놈은 비웃는 모습을 보고도 존경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으슥으슥한다. 어쩌다 잘못된 자각이라도 하면 강아지처럼 선출직 똥꾸멍만 졸졸 따라 다닌다.
부산기공은 당시 정밀기기나 온도계 등 국내 최고의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보통의 문방구용 30cm 자도 여름과 겨울은 약2mm 이상의 차이가 난다. 정확히는 평상시도 제작사에 따라 다르다. 내가 전공한 선반은 0.01mm를 가공하는 기술이다.
오랜 연습을 하면 그 0.01mm가 눈에 보인다. 사람들은 착시라고도 하지만 진짜 보인다. 뭐랄까? 색으로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게 있다. 이런 정밀 기준을 잡는 측정기가 바로 부산기공에 있다. 그래서 서울공대도 정밀 기준을 잡을 때면 부산기공에 와서 그 기준을 잡아간다.
모든 정밀기기는 82년 당시 여름은 에어컨, 겨울에는 난방을 돌려 적정 온도를 유지하고 주야간으로 각 기기마다 경비가 붙어 지킨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려운 우리나라가 달러를 벌어 들이는 일은 기술 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김종필 안기부장을 시켜 방안을 마련켜했다.
그래서 기능올림픽이 유럽에 있는 것을 알고 안기부장 김종필이 직접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선수단장이 되어 선수들을 육성했다. 당시 부산기공 출신들이 많았고 여러 노력 끝에 드디어 종합 우승을 했다. 새벽 2시쯤 이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매우 기쁘하며 맨발로 선수들 마중을 간다고 청와대 밖으로 뛰어 나갔다는 설도 있다.
요즘은 왜 이런 대통령이 없는 거야!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부산기공은 일본, 대만 등에서 시찰 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난 서울대학도 다녔지만 부산기공 시찰자가 더 많다. 첫 자격시험에서 선반자격증을 땄다. 어느 날 호동이와 함께 장난치며 설계과 앞을 지나다가 우리와 달리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학생들을 봤다.
한참 넋을 놓고 창문 넘어를 보고 있었다. “얘들은 우리와 달라. 그만 가자” 설계과 학생들은 입학할 때 가장 똑똑한 애들만 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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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때 60점 정도 받고 900등 꼴지로 들어 갔다면 얘들은 거의 90점 이상을 받던 친구들이다.
요즘과 달리 당시 그 정도 점수면 대부분 서울대 들어갈 정도다. 우리 동기나 바로 밑의 후배들도 전국에서 카이스트를 가장 많이 들어갔다는 방송도 들었다. 그래도 계속 버티고 서 있자 호동이는 나를 데리고 설계과 특활실로 데려갔다. 호동이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설계과 특활생 선후배를 다 알고 있다.
“야! 이쪽은 미술도장 정동배야! 설계를 배우겠다는데 좀 가르쳐 줘라” 이렇게 설계를 배웠고 자격증 원서를 접수하자 설계과 주임 선생님은 뺑뺑이가 설계과 합격률을 낮춘다며 즉시 철회하라고 했다. 그날 이후 시험 끝날 때까지 난 김수한 선생님을 피해 다녔다.
결국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이후 김수한 선생님은 뺑뺑이에 뺑끼가 설계과 학생 일부도 3년을 배워 못따는 설계자격증을 잠깐 배워서 땄다며 칭찬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은 설계과 동기 두 명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중 한 명은 좀 순하여 나를 차근차근 잘 가르쳐 주었다. 이런 스승에게 난 왠수를 확실히 갚았나??
반면 한 명은 말이 좀 없고 모든 것이 신중한 스타일이다. 기숙사에서 식사를 마치고 훈련장에 가려고 수영장을 지나고 있었다. 부산기공 수영장은 매우 크다. 아마도 아직 있으면 여전히 우리나라 학교 수영장 중에서는 제일 클 것이다. 깊은 곳의 깊이는 대략 3m 정도된다.
나와 호동이, 순한 설계 특활생과 수영장 제일 깊은 곳 근처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신중한 친구가 언덕 위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뛰어오더니 순한 친구를 물에 밀어 버렸다. 이 친구는 순한맛인 만큼 수영을 못했다. “나 수영 못해! 살려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호동이도 수영을 못한다고 했다. 신중한 친구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급히 물에 뛰어 들었다. 그곳은 깊이가 상당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물에 뛰어 들드니 먼저 빠진 친구 보다 더 난리다. 나중에 들었는데 물에 뛰어들자마자 다리에 쥐가나서 움직이질 못했단다.
난 즉시 물로 뛰어 들었고 순간 물에 빠진 사람은 물귀신처럼 잡으면 절대로 놓치 않는다는 말이 생각 났다. 한 명은 이미 물 위로 올라 왔다 갔다 하더니 물 밑으로 가라 앉았다. 쥐가 난 친구는 아직 물 위에서 허우적 거렸다. 우선 물 밑으로 내려 갔다. 그때는 물 밑이 10m가 넘는 것 처럼 느껴 졌다. 한참을 내려가도 바닥에 닿질 않았다.
겨우 도착하자 그는 매우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가끔 영화를 보면, 어떻게 연출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눈을 보게 된다. 일상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눈빛이다. 난 물 속에서 눈을 떠지 못하는데 그날은 눈을 반쩍 떴다. 그리고 손짓 발짓으로 나를 잡지 말라고 했다.
그는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하는 자신을 보라는 눈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눈을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뒤로 돌아 등을 있는 힘껏 밀었으나 잘 밀리지 않았다. 다시 옷을 잡고 끌며 위쪽으로 힘끗 밀어 올리자 몸이 조금 떠 올랐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밀어 올려 밖으로 갔다. 마침 몸이 일부 물 밖으로 나오자 호동이가 끌어 올렸다.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물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런데 나도 힘이 다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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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 친구도 물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난 수영장 둑을 잡고 숨을 몰아 쉰 다음 다시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런데 이 신중이는 다리에 쥐가 나서 그렇지 수영을 어느 정도 하여 끌어 올리는데 나름 협조적이다. 이 친구는 아까 순한 친구처럼 간절한 눈빛 보다 스스로 살려는 의지가 강했다. 웃깃을 잡고 끌어 주자 좀 쉽게 밖으로 나왔다. 물 밖에 둘 다 누웠는데 물을 엄청 많이 토했다.
그 짧은 시간에 뭔 물을 그렇게 많이 마셨나 싶다. 이는 호동이가 한 말이다. 나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해 호동이가 이들을 도와 주었고 무사히 두 생명을 구했다. 이후에 창원에서 우연히 이들 중 한 명을 만났는데 생명의 은인으로 잊지 않고 있다며 고마워 했다. 이 친구는 살도 좀 붙은 것이 애가 더 잘 생겨졌더라.
이런 사람도 있다. 난 그의 진심을 담은 고마운 마음을 받았다. 부산지방기능대회가 시작됐다. 지금부터는 약간 전문적이니 다음에도 필요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해야겠다. 이는 디테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아무리 서울법대 수석을 해도 이런 디테일을 모르면 세상을 대충 보게 된다.
지방기능대회가 시작되자 부산 사는 재근이, 그리고 호동이, 국이 보다 나를 응원 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과 선생님들도 있었지만 컴퓨터 선생님, 역학 선생님 등 다른과 선생님들도 “정동배 파이팅!”을 외쳐 주셨다. 하지만 심사는 순이 선생님이 했다.
이도 아직 아무에게 말하지 못하고 응어리진 일인데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다. 난 순이 선생님을 좋아한다. 하지만 지방대회에서 순이 선생님은 나를 버렸다. 대회 끝나고 몇 년이 지나도 이런 세상을 몰랐기에 당시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울기만 했다. 되돌아 보면 참으로 많이도 울었다.
모르니까 슬펐다. 원래 무식하면 슬프고 화나고 두렵기도 한다. 지금 난 전현직 대통령이나 여야랑 싸우지만 두렵지도 화나지도 슬프지도 않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디테일을 해결 할 길이 없다. 미술도장, 지금은 내가 장실미술로 개명 했다. 이 직종 지방대회는 대략 7-8개 정도의 항목을 나누어 평가한 후 합산한다.
우리는 매일 업무일지를 작성하고 평가 후 각 항목별 평가 점수를 비교한다. 자그마치 2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 누가 어떤 항목에 어떤 점수를 받는지 대충안다. 호동이는 참으로 똑똑한 놈이다. 이 친구는 이미 부정이 뭔지 세상을 통찰했다. 대회 전에 나를 불러 우리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훈련했기에 호동이 말을 믿지 않았다. 미술도장은 주관적 평가가 80%이고 나머지 하나가 확대라는 객관적 평가다. 따라서 대부분 이 확대에서 결정 된다. 난 그동안 훈련에서 항상 확대가 20점 만점에 14점 이상이 나왔다. 반면 재근이는 확대가 5점을 넘지 못했다.
이는 얼핏 보면 재근이 작품이 좋아 보일 수도 있다. 난 치수를 정확히 지키며 작품을 한다면 재근이는 대충 그린다. 따라서 어떤 때는 빵점도 수두룩하다. 이는 사법과 매우 유사하다. 대한민국 판검사들이 이를 얼마나 이해 할지 모르겠으나 사법과 비교하면 재근이는 법무사 정도고 난 대법관 수준이다.
예술고 학생들은 우리와 실력 차이가 너무나 다들 포기 했고 다른 선수들도 모두 자포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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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 학교 학생들 끼리의 경쟁이니 순이 선생님께서 알아서 하게 하고 심사위원들이 모두 가버렸다. 재근이와 국이의 담임이 순이 선생님이다. 또한 재근이는 가끔 아버지가 선물(뻥티기) 공세도 했다.
반면 나와 호동이는 다른과 학생이고 부모는 학교 근처를 와본적도 없다. 물론 이는 호동이 주장이다. 세상은 아주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많은 사건 사고도 그렇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이런 것을 모른다. 순이 선생님은 주관적 평가를 하나하나 정확히 했다. 평소와 비슷한 점수로 내가 1등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확대는 그동안 내가 100이면 100을 다 이겼으니 금메달이 확실하다. 나의 작품을 먼저 평가 했다. 역시 평소와 비슷한 점수를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다. 제근이는 평소 5점 미만이었는데 18점 정도를 받았다. 합산을 하자 내가 은메달이 됐다.
이 확대라는 것은 각 점들을 랜덤하게 몇 개를 측정하는데 모든 경우의 수는 수백 어떤 경우는 수천이 된다. 그러니 미리 측정 지점을 알지 않는 이상 5점 미만인 선수가 18점 정도 나올 수는 없다. 아마도 소송으로 가면 100이면 100 모두 지겠지만 나 같은 전문가를 재심에 두면 100이면 100 모두 부정이라 판단한다.
이 정도 설명하면 후배(서울법대)들이 알아 들으려나? 지금쯤 이면 다들 부장판사, 부장검사 등 적어도 50% 이상은 나와 같은 건물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선배로서 말하는데 ‘기존에 그래 왔다고 마지막 점수가 잘못됐다는 혐의 없음’으로 함부로 처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호근이 그랬다. 이럴 거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냐?
너희들이 수능 공부해서 잘 알겠지만 평소 7-80점 맞던 친구가 수능 날 400점 만점 맞았다면 그게 가능하냐? 왜 너만 바라보냐고 판검사라는 작자들이…, 특히, 98학번 법대생들! 논술 시험칠 때 법대 입구에서 너희들 쳐다 보고 있던 키 작고 안경 낀 동글동글이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 법대 교수 아니고 바로 나다.
얼굴에 무슨 분장을 하고 오는지 모두 귀신처럼 허연 얼굴에 혼이 빠진 사람들처럼 들어오던데, 그럼 기억 못하겠구나? 암튼 같은 건물에서 4년을 지냈으니 선배로 생각해라. 억척같이 고생해서 공부 한 것은 뭘 좀 잘 하려고 한 것 아니냐? 대충 살려고 그 고생 했어? 솔직히 다들 잘 생기고 키도 커더라. 그러니 우리 좀 잘 하자!
자그마치 20년이다. 솔직히 대한민국 부장판사, 부장검사 대부분이 같은 건물에서 공부한 후배들인데 선배가 이렇게 개고생 해서야 되겠어? 사법은 국회의원, 장관들 잡아 넣는 것이지 좀도독 잡으러 다니는 곳이 아니다. 계속 피라미만 잡겠다면 우리 절교하든지 아니면 같이 별 따러 가즈아! 우선 나경원이부터 따 먹자.
유사한 경우는 평가를 다시 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지 운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난 나이 60이 다 되어 다시 기능올림픽에 출전해도 금메달 딸 자신이 있다. 체육올림픽이나 국가가 하는 심사나 대부분의 평가는 재심으로 확정되야 한다.
이의 신청하면 1차는 재평가, 2차 재심은 수능, 대회, 경기를 다시 하면 된다. 그래서 잘못이 드러난 자는 국가 프로젝트 참여를 막고 피해자에게는 보상을 해 주는 것이 상식이다. 이제와서 내가 너희들에게 호소도 못하지만 나존 억울하다. 그러니 자신이 없으면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전문가의 말을 들어라.
허기야 그 전문가라는 끼새들이 더 판개이기는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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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나 같은 전문가면 되는데…, 허참! 물론 물증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상식이 있다. 국이는 항상 뭔가 미안해 했고 재근이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추론컨데 이들은 분명 그 전날 문제를 받아 확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만약 재판을 한다면 ‘그동안 그렇게 점수가 나왔다고 대회 당일 반드시 유사한 점수가 나오라는 법은 없다’며 기각 할 것이다. 이런 판결이 세상을 병들게 한다. 하지만 난 이후도 5년을 더 훈련하여 부정을 인지 했고 이는 판검사는 몰라도 프로 선수들은 다 안다. 좋은 나무는 가지치기를 통해 성장한다.
나라도 가지치기를 잘 해야 국력이 생긴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서울법대 출신 지금 여러분의 선배들이 이를 묵인하여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다. 누가 뭐래도 검사는 증거를 찾아 기소 하는 사람들이고 증거없음은 스스로 직무유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검사는 증거 찾는 것 외는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이 나라 경찰이나 검찰의 증거없음을 처벌하는 규정이나 사례가 없다. 아마도 오히려 진급의 구실로 작동하고 있을 걸! 지금 이들은 이것이 자랑스러운 것 같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도 상식인데…, 확대 5점이 19점으로 나올 확률은 0이다. 치수를 정확히 맞추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초보가 필드에서 홀인원을 연속으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대 19점은 프로도 어렵다. 너무도 억울한데 왜 억울하고 눈물이 났는지 그때는 몰랐다. 이후도 유사한 일로 난 참 많이 울었다. 노무현의 눈물은 연출인지 몰라도 난 진심이다. 물론 노무현은 공익을 위한 눈물이고 난 사익을 위한 눈물이다.
그 가치는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난 진짜 진심이었다. 눈물이 따듯한 것이 아니라 그냥 막 뜨거웠다. 물론 국가를 위해 그렇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난 깜이 아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국이의 태도에서 유추 했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다음의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내가 전국대회 등 문제 출제를 했다. 그러면 항상 순이 선생님의 연락이 왔다. 물론 선배나 다른 사람들의 전화도 받는다. “동배야! 나 지금 예술고 교장으로 있다. 우리 학교에서 미술도장을 한다. 네가 이번 전국대회 문제 출제했지”, “예”,
“지금 좀 만나자. 나 서울에 와 있다” 난 순이 선생님을 정말 좋아 하지만 마음이 약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분명한 것은 내가 이런 나를 잘 알기에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대회 문제 출제를 하는 바람에 그 이후 아직까지 순이 선생님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건강하게 살아 계셨으면 한다. 내가 정말 좋아 했던 선생님이니까. 인천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출전했다. 당시는 금성, 삼성, 현대, 대우, 대한항공 등이 몰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회가 매우 치열했다. 결과는 삼성이 금, 금성이 은, 현대가 동 바로 다음 내가 4등을 했다.
그래서 초기에는 삼성에서 월급이 들어 왔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받지는 못했다. 순이 선생님은 나를 금성으로 보냈고 재근이와 국이를 삼성으로 보냈다. 그렇게 금성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대회가 끝나고 후배들과 식당으로 가니 대략 열 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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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앞으로 가시죠?”, “그냥 줄서라. 사람들이 많을 때는 기다리는 시간을 아끼려고 줄을 안 섰지만 지금은 몇 명 되지도 않으니 서로 불편 할 필요 없다.”,
“다른 형님들은 한 두 명만 있어도 앞으로 갑니다.”, “야! 우리가 무슨 벼슬했냐? 또 밥 먹고 오늘 급하게 훈련 할 것도 아니잖아?” 이런 대화를 나누며 줄을 서 있는 사이 이제 4-5명 정도 남았다. 그때 2학년 학생 간부들이 오더니 줄도 안 서고 앞으로 가서 배식을 받았다. 곧 총학생회장에 오를 친구들이다.
후배들이 “아니 저끼새들이! 우리 형님이 이렇게 줄을 서서 기다리데 감히 우리 앞으로 가” 하며 난리다. 배식 후 식사를 하는데 후배들 성화에 알아서 하라고 했더니 한 명이 간부들에게 갔다. 학생 간부들은 키가 커고 잘 생긴 반면 우리는 특활생이면서 나나 후배들 모두 짧은 동글동글이다. 우리 동글동글이들 잘 지내나?
하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간부 위다. “형님! 식사 후 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당시까지 난 별 생각 없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간부 몇 명이 수영장 옆에 서 있었다. 동글동글 몇 명이 걸어가니 간부들 입장에서는 만만한 것들로 보는 것 같다. “야! 이 끼새들아! 우리 형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너희들이 감히 우리 앞에서 배식을 해?” 하며 위협을 하자 한 명이 도망을 가버렸다. 뭐 정확히는 더러워서 피한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른 간부를 불러 “야! 너희 학생 간부들 전부 설계실 옥상으로 집합 시켜!” 하고 훈련실로 갔다. 후배들이 성화다. 돌이켜 보면, 내가 배식에서 줄을 선 것이 오히려 후배들을 더 업 시킨 것이다. 누구는 반 죽여놔야 한다거나 오히려 자기들이 난리다.
좀 기다리자 옥상으로 우루루 몰려 오는 것이 간부들이다. 간부들을 한 줄로 쭉 세우니 대략 이십여 명은 되는 것 같다. 키가 큰 간부들을 일렬로 세우니 뒤가 보이질 않았다. 후배 한 명이 가더니 일장 연설을 했다. 감히 우리 동배형이 줄을 서 있는데 간부 따위가 선배 앞을 갔다며 화를 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전부 업드려!” 그렇게 줄 빠따를 쳤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맞는 일이라 그런 정도는 별 것 아닌데 간부들은 이것이 매우 두려웠던 것 같다. 순간 저쪽 어둑어둑한 곳의 간부 한 명이 벌떡 일어 나더니 도망을 가버렸다. 후배가 몽둥이를 들고 “야” 소리치자 다른 간부들도 모두 도망을 갔다.
나나 후배들은 그렇게 맞아도 도망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차라리 특활생이나 간부를 포기하지 도망을 가는 것은 진짜 비급한 태도다. 그래서 기숙사 사감실로 갔다. 호익장 사감 선생님께 같은 항의를 하기 위해서다. 이는 후배들 성화라기 보다 내가 용납이 안 됐다. 차라리 배식 끼어 들기는 용서가 되도 간부가 도망가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감실로 갔더니 선생님이 보이지 않자 후배들을 시켜 간부들을 기숙사 옥상으로 집합시키라 지시하고 기숙사 옥상에서 기다렸다. 3학년 총학생회장과 간부들 수십 명이 몰려 왔다. 그래서 내가 ‘도대체 2학년 간부 교육을 어떻게 시키기에 이 모양이냐’며 따졌더니 확인 후 조치 하겠단다. 얼마 후 2학년 간부들이 전부 옥상으로 뛰어 올라 왔다.
총학생회장이 사실 관계를 확인 하고는 그날 3학년 간부들에게 2학년 간부들이 엄청 맞았다. 사실 엄청이라 해봐야 우리는 일상이다. 그날 이후 내가 지나가는 길에 총학생회 간부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 백사장에서 해운대고와 패싸움이 벌어졌고 이후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특활생들이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 병원에 입원시켰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26/240

이 일로 특활생 3학년이 2학년들을 전부 도서관 지하실로 불러 줄 빠따를 쳤다. 몇 대를 맞았는지 기억이 없다. 아침부터 선배들이 돌아가며 한마디씩 하고는 계속 때렸고 거의 점심 때가 다 됐다. 그렇게 마무리하고 나오는데 실과주임 선생님이 오토바이 뒤에 야구 방망이를 몇 개 싣고 오더니 운동장으로 집합시켰다.
그 곳에서 또 줄 빠따를 고맞 오후 내내 운동장을 돌리고 해산 시켰다. 미술도장실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순이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 사실 난 해운대 백사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총학생회장이 왜 입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그렇게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맞았다.
이런 일상을 보내는 사람에게 2학년 간부 학생들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중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운대고와 맞짱을 뜨기로 하고 백사장 양쪽에 수백 명이 모이자 부산기공 총학생 간부들이 제일 먼저 도망을 가서 나머지 학생들이 해운대고 학생들에게 엄청 맞았단다. 패싸움이 아니라 모였다가 도망가며 일방적으로 맞았다.
그래서 특활생 몇 명이 화가나서 총학생회장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소문이다. 부산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부산기공은 공고지만 해운대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충 공부 못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 해운대고 정도로 봤다. 학교 외형만 봐도 해운대고는 부산기공의 수 많은 건물 중 작은 창고 정도에 불과하다.
아마도 그날 사건 이후 해운대고가 부산기공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으로 특이하게 연결된다. 뒤에 언젠가 뉴스를 보니 해운대고생이 수능 만점인가 받아 전국 1등으로 서울법대에 들어간 것을 봤다. 내가 서울에서 내려 갈 때만 해도 부산기공 출신 국회의원이 3명이나 됐다. 이제는 해운대고 출신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는 상황이 그랬다는 것이지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갑작스런 폭력에 노출 됐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정도? 지금 나처럼…, 재미 있지? 난 신체적, 정신적, 물질적, 법적 많은 폭력에 노출 됐고 그래서 자각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장담컨대 아직 살아 남지 못 했을 것이다. 이는 목숨의 문제다.
누구는 사람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데 온실 안의 화초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 분풀이식 폭력은 안 되겠지만 정당한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 해야 한다. 세상의 폭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 확실한데 여기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들은 조선의 노비처럼 앞으로도 대대손손 손해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믿거나 말거나는 자유지만…, 그러니까 폭력이 완전히 사라진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뭐든 많이 가진 자다(주로 권력). 이해를 못하나? 요즘 권력은 가시적이지 않다. 그러니 지뿔도 없으면서 체벌금지니 이런 말에 동요되지 말라는 소리다. 돌이켜 보면, 간부라는 것은 그 책임이기 때문에 그냥 모양만 갖추려면 간부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조직의 모든 것을 알아야 간부라 할 수 있다. 작금의 나라꼴과 비슷하다. 기어올라 거들먹거리는 것만 할 줄 알지 책임지는 놈이 없다. 언젠가 남미에서 경찰과 기념 촬영을 했다. 후진국으로 총질도 자주 일어나는 나라였지만 경찰이 국민을 대하는 것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경찰 복장도 초록색으로 요즘 우리 정부의 초록 옷과 비슷하다. 그래서 지사 직원에게 ‘경찰옷이 꼭 작업복 같다’고 했더니 그래야 사람들이 폭력이나 위험에 노출 됐을 때 즉각 대응 할 수 있단다. 첨부에 초록 경찰 사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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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의 경찰복은 그 옷에 흙이나 피를 묻힐 수 있겠는가? 급하게 도움이 필요하면 경찰은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옷에 피가 튈까봐 피한다.
나도 언젠가 선생 한 명을 두들겨 팼는데 그 놈 얼굴에 피가 튀니까 내 와이셔츠에 묻을까봐 더 못 때리겠더라. 연구실에 있는데 친구가 ‘이게 뭐야’ 해서 보니 살짝 묻기도 했더라. 반면 그 나라 경찰은 즉시 위급 상황에 대응 할 수 있는 복장이다. 우리도 실용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의전용 경찰이 필요할 뿐이지 전부 의전용으로 대기하면 안 된다.
언젠가 방송에서 범죄자를 보고 도망가는 경찰을 봤다. 어쩌면 옷이 구겨져 상사에게 혼날까봐 도망 갔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날 국민 한 명이 죽었다. 깨끗하게 칼주름 잡은 옷을 입고 어떻게 위급한 상황에 대처 할 수 있겠는가? ‘경찰이 그렇다면 맞다.’는 등 거들먹거리기만 한다. 벌씨놈! 난 내인생 20년을 말하는데…,
부산기공 미술도장부에 처음 들어 가서는 정말이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석고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이 금이야 옥이야 했던 석고상이 지천에 깔려 있다. 붓 등 엄청난 도구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부산기공은 각 전공에 국비 지원이 있는데 그 금액의 절반을 기능훈련 즉, 특활생들이 썼다.
거기서 일부 떼어 전공 없이 운영되는 것이 미술도장부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활 속의 특활이다. 모든 종목은 대략 5-60여 명의 선수가 훈련했는데 그 훈련생 중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국가대표가 됐다. 선수생활을 하지 않고 현대에서 훈련하여 국가대표가된 손관철 선수와 둘이 국제대회에 나갔다.
3학년 선배는 효성 다니던 경남에 재진이형, 경기일보 기자로 있는 경기도 선우형, 한세대 교수로 있는 충청도 현선이형, 서울에 한 명 더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들은 나에게 참으로 높은 선배들이다. 2학년에는 제주도 수철이형, 전라도 승렬이형, 경상도 근수형, 서울에 한 명 더 있었다. 이렇게 선배들은 전국에서 왔다.
우리 동기는 처음 신입 모집에 대략 40여명 이상이 지원했는데 이들은 4명으로 줄어들 때까지 매일 40대의 빠따를 맞았다. 주말 포함하여 매일 40대를 1년 정도 맞았다. 승렬이 형은 때릴 때 있는 힘을 다주어 때렸고, 수철이형은 아주 살살 때렸다. 그래서 승렬이 형은 모두 똑 같이 때렸는데 왜 너희들은 나만 때렸다고 하냐 했지만 맞는 사람은 안다.
숫자도 중요하지만 강도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수철이형은 ‘나는 살살 때렸다’ 했다. 어느 날 선배 중에 누군가 우리를 집합시키더니 호동이를 나오라고 했다. “호동이! 옷 벗어!” 난 무슨 말인지 몰랐다. 와! 호동이 이 친구는 참으로 대단하다. 평소에 보면 애가 동글동글 했다.
그것은 옷을 엄청 많이 껴입고 있었서다. 윗 옷도 마찬가지다. 난 그냥 한 벌만 입고 있었는데 호동이는 바지를 대충 열 벌은 더 입고 있었다. 재근이와 국이도 두세 벌은 입고 있었다고 들었다. 나만 한 벌로 매를 맞았으니 얼마나 아팠겠는가? 난 국가대표하면서도 얇은 훈련복 딱 한 벌만 입고 맞았다.
국가대표도 매주 평가하여 점수가 내려가면 1점에 한 대씩 맞는다. 물론 뭘 잘못해도 맞는다. 난 선수 생활 7년동안 밧다 맞은 수가 밥 먹은 것 보다 더 많다. 그래서 이렇게 독해졌다. 어이! 최병렬이 나경원이 등 알겠냐? 지가 서울법대 할아버지를 나와도 나 같은 놈을 건드리면 안되지!
지금 대한민국은 여당, 야당, 정동배당이 있다. 의석 수가 만능은 아니니 까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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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자인 것을 잘 알면서 윤석열 대통령께 한시적 러브콜을 했고 응답을 받았다. 우리 동기 네명 중 두 명은 반에서 1, 2번으로 키가 커고 담임이 순이 선생님이다.
반면 호동이와 난 각 반 뒤에서 1번이고 전공이 다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호동이가 베프다. 호동이가 얼마나 똑똑한 놈인지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하고 싶다. 아마도 이 말로 호동이가 잡혀 갈까 봐 걱정이 되겠으나 너는 국립고 학생이었고 대한민국은 공소시효가 있으니 염려마라. 너 사립고 학생이었으면 공소시효 상관 없이 잡혀간다.
식사 끝나고 매점을 지나면 규모가 적지 않는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울타리가 있는데 이곳에서 호동이가 다리를 흔들흔들하고 있었다. “호동아! 뭐하냐?”, “조용히 해라” 그래서 지켜보고 있었더니 얼마 후 다리를 뒤로 힘차게 당기니까 큰 비단잉어가 뭍으로 튀어 올라 왔다. 순간 옷으로 휙 감싸더니 잡아 훈련장에서 삶아 먹었다.
난 배가 고파도 붉은 색 잉어를 잡아 먹는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는데 이 친구는 너무도 당연하다. 한 번은 훈련을 한참 하고 있는데 꿩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혀 떨어졌다. 후배들이 들고와 “동배형 꿩이 방금 떨어졌는데, 삶을까요?”, “아니다. 우리가 잡은 것도 아니고 지도 얼마나 억울하겠냐? 그러니 산에 묻어줘라”
후배들은 그냥 삶아 먹자며 내 눈치를 보다가 산에 묻었다. 한참이 지나 어둑어둑해지자 호동이가 들어 왔다. 후배들이 “호동이형! 오전에 꿩이 유리창을 받고 죽었어요” 하며 달려들어 일렀다. “어디 있어?”, “동배형이 묻어 주라고 해서 저기에” 하며 산속을 가르키자 호동이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냐며 즉시 산에서 꿩을 파내어 삶아 먹었다.
또, 한 번은 호동이가 옷인지 포대인지 뭘 나한테 주더니 따라 오라고 했다. “어디 가냐?” 물었더니 “너 몸보신 안 한지 오래됐지 내가 오늘 몸보신 시켜줄께” 하며 그냥 따라오라고 했다. 도서관 근처에 적지 않는 규모로 울타리도 꽤 높은 선생님이 키우는 토끼장이 있다.
갑자기 그 울타리를 뛰어 넘어 가더니 “뭐 하냐? 선생님 오겠다. 그 쪽 동굴에서 이 쪽으로 토끼를 몰아야 내가 잡지” 하며 울타리를 넘어와 토끼굴을 쑤셔라고 성화다. 난 선생님 토끼를 잡을 용기도 없지만 울타리를 넘을 용기도 없다. 애초에 이런 일인 줄 알았으면 따라 오지도 않았다. 또 울타리는 내 키보다 높다.
망설이고 있는데 “잡았다” 하더니 토끼를 잡아 넘어 왔다. “동배야! 수고했다” 하더니 토끼를 잡아 훈련실에서 후배들과 삶아 먹었다. 나보고 ‘수고 했다’ 하고는 주지도 않았다. 언젠가 선생님이 잡아 먹는 것을 봤는데 우리는 왜 안되냐며 당당히 잘 먹더라. 넌 천재다. 이런 천재는 잘 사나 모르겠다.
이 친구는 이런 일이 일상이다. 여차하면 “동배야! 따라와” 하면 그날은 사고치는 날이다. 난 절친을 거부 할 수가 없어 항상 따라 다녔다. 한 번은 빈 교실로 데려갔다. 선배들이 졸업하여 교실이 비었는데 먼저 가저 가는 사람이 임자라며 삼각자를 챙겼다. “넌 뭐하냐 빨리 챙겨” 그래서 나도 삼각자를 엄청 많이 챙겼다.
가져 와서는 뭘해야 할지 몰라 처치 곤란이었다. 국립고등학교라 그런지 교련 선생님과 기숙사 사감 선생님은 군복을 입고 허리에 권총도 차고 다녔다. 516 기념탑 뒤에 육사 출신 교련 선생님이 살았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학교에 오면 항상 찾아가 만나길 청했으나 문을 걸고 나오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70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기공을 1년에 두 번씩 방문하기도 했다. 내가 다닐 때는 전두환 대통령도 우리 학교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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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함께 초기에 설립 했을 때는 선생님들도 대부분 서울대, 부산대 등 대학 교수들로 구성됐다. 그래서 부산기공 출신은 스스로를 고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서울대 다음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방대나 전문대와는 비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런가 우리는 공고생이고 고졸일 뿐인데…, 초기 한독기술교육원일 때는 전국 중학교에서 최고의 두뇌들을 데려다가 국내 최고의 시설에서 대학과정을 가르쳤는데 그만 고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로는 대학원이라 해도 될 정도였다.
정확히는 대학원도 이 보다 더 좋은 시설이 없었다. 사실 나도 G전자에서 대학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냥 고졸로 살면서 세상에도 없는 긍지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G전자에 고맙게 생각한다. 내 이전의 선배들은 사실상 지금의 서울과고생 보다 공부를 잘한 학생들이다.
내가 서울대학원 다닐 때, 서울공대에 부산기공 동문회도 있었다. 이들이 대부분 그때의 선배들이다. 우리는 일년 365일 훈련만 한 것이 아니다. 여름이면 가끔 학교에서 수영복 입고 해운대 백사장까지 뛰어가 해수욕도 하고 동백섬을 돌기도 했다. 당시 백사장까지는 대부분 수박밭 등 농지였다.
1학년 때는 담력 훈련 한다고 백사장에서 까데기도 시켰다. 해운대에서는 깡패들도 만나고 호동이는 무슨 백곰파인가 소속이란다. 짭새들 피해 도망도 다니고 전국대회 끝나고는 처음으로 여자 친구도 사귀었다. 내가 G전자에 들어간 후 호동이는 바로 앞 그러니까 남대문 옆의 큰 술집에 취직했다.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친구 때문에 칵테일을 참 많이 마셨다. 새로운 칵테일 기술을 배우면 나를 불러 맛을 보게 했다. 난 그런 맛을 느낄 만큼 미각이 뛰어나지 못해 무조건 맛있다고 했다. 그러면 이런 내 말이 무슨 전문가의 평이라도 되는 것처럼 상품으로 올리니 마니 칭찬 일색이다. 호동이 때문에 그 술집에서 잠도 잤다.
영업이 끝나면 작은 창고의 술을 전부 밖으로 빼고 그곳에서 여러 명이 함께 웅크리고 잤다. 호동이 꿈은 오로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기능올림픽을 하면서 나하고 호동이는 빽이 없어 안된다며 스스로 기능올림픽을 포기하고 돈 버는 현장에 뛰어 들었다.
당시는 남대문 옆 상당한 크기의 술집이라 들어갈 때면 느낌이 이상했지만 이 친구는 돈이면 뭐든지 한다. 돈이란 많이 쌓아 놓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계속 벌어 가며 사는 사람도 있다. 난 기능장려법 공청회에 여러 번 참석했고 여기서 전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이 길로 쉽게 들어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를 관리 할 흥미도 없고 계속 일하며 사는 재미 또한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계속 능력을 높이려 했는데 그만 그 실력을 너무 많이 쌓아 버렸다. 난 스펙 보다는 능력 주의다. 스펙과 능력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주변의 많은 태클들이 나를 쉽게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 스펙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지만 난 능력이 휠씬 뛰어나다.
이런 나를 가장 잘 알아 준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 같다. 이런 내 삶에 제도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제도라는 것이 치고 들어오자 그만 당황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이일 후 제도니 법이니 규범이니 많이 생각해 봤지만 그 연관성은 이렇다고 말하기 참으로 어렵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G전자 서울 본사로 왔다.
이도 엄밀히 보면 취업이 아니라 기능선수로 서울시 소속이면서 G전자 소속이다. 1984년 9월, 19살의 난 비록 미약했으나 첫 사회생활은 그렇게 비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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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 구자경 회장의 주차장에서 충분한 벌이(대졸 2명 이상 월급, 상금, 식대, 당시 돈으로 1년 훈련비 1억 정도)로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일종의 대통령차라는 리무진이 쫙 깔려 있다. 식대는 G전자 앞의 부산불고기 집에서 고졸 한 명 월급 정도의 불고기를 먹를 수 있었다.
당시 서울에 작은 아파트가 900만원 정도 했으니 이 것이 얼마나 큰 돈인지 상상이 되나? 1년 교육비만 놓고 보면, 구자경 회장에게는 구본무 회장보다 내가 더 아들 쪽에 가깝다. ‘아빠! 저 끼새들 혼 좀 내줘! 하하!’ 구자경 회장은 그 리무진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돈을 벌었지만 난 친구나 선배들에게 같은 리무진으로 생색만 냈다.
“선배님! 차 기스나니까 가까이 가지 마셔요. 돈을 내든지” 뭐 이런 식이다. 아직 경기일보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술도장 선수 출신인 선배가 자주 놀러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안기부 앞쪽으로 조깅을 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동배야! 너 아침에 여기서 조깅한다며?
큰 샷시문 있는 쪽으로 가니?”, “한 번은 도서관 쪽으로, 한 번은 그쪽으로 가는데요.”, “야 임마! 거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 줄 알아! 그쪽으로는 가지마!” 그 샷시문이 안기부인 것은 한참 뒤에 알았다. 그 바로 위에 최상구 선배가 있었는데 이 선배는 엄청난 군대를 갔다 온 것처럼 입만 열면 군대 이야기를 하는 방위병 출신이다.
뭐 방위병 중에서도 힘든 곳이 있다고는 들었다. 아버지는 전쟁 5년을 복무하고도 평생 군대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동배야! 너 종번 나왔냐?”, “예, 여기 있습니다.”, “너 종번이 무슨 뜻인 줄 아니?” 그러면서 유창한 언변으로 종번을 설명해 주었는데 우리가 구씨 집안의 종이란다.
“옛날의 종 알지! 우리를 그 종 1번, 2번 이렇게 부르는 거야.” 선배 말을 듣고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난 국가대표가 되려고 왔는데 날 보고 종이란다. 최상구 선배는 중학교 때 전국 석차 100등 안에 든 수재 중 수재다. 기술을 배우지 않았으면 서울법대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갈 사람이다. 암튼 학교 성적과 스마트는 완전 별개다.
이런 사람이 날 보고 종이란다. 고졸 출신이 G전자 본사로 올라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제일 먼저 올라오신 분은 구성회 선배인데 국제대회 끝나고 바로 서울미대에 합격하여 그만 두었고 다음이 최상구 선배다. 국제대회 출신은 다음이 지금 한세대 김현선 교수가 있고, 다음으로 내가 막내다.
이렇게 선배들도 모두 훌륭하지만 부산기공은 캠퍼스도 참 좋다. 난 서울대, 하버드, MIT, 플로리다 주립대, 연대, 고대, 카이스트, 이대, 동국대 등 여러 대학과 수십 혹은 수백의 중고등학교를 직접 가서 보고, 발표하고, 배우고, 가르치고, 경기하고, 심사하는 등 체험했다. 아마도 우리나라 교육부 장관들 보다 내가 각 학교는 더 많이 다녀 봤을 것이다.
캠퍼스만 놓고 보면 그 중에서도 부산기공이 최고다. 선배들 중에 일부 불만인 분들을 좀 만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엄청난 것을 배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졸업했는데 그만 공고 졸업생이 되어 여기에 대한 불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배님들 맞죠? 기숙사도 부산기공만한 곳이 없다.
난 호주 시드니여자대학교 기숙사에서 보름 이상 묵었지만 부산기공 기숙사가 더 좋다. 물론 건축물은 시드니여대 기숙사가 더 좋다. 그런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건축물이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31/240

아마도 시드니대학 기숙사는 앞으로 100년, 200년 어쩜 1,000년 후에도 그대로 있겠지만 부산기공 기숙사는 곧 재건축해야 한다. 시드니여대는 당시에 이미 100년을 휠씬 넘긴 건축물이다.
우리나라 건축물과는 서로 비교대상이 아니지만 부산기공은 주변 환경이나 위치, 구조 등이 참말로 시원하게 자리를 잘 잡았다. 그러니까 전망까지 포함하면 세계에서 부산기공과 비길 학교는 거의 없다. 다만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외부에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학교 중에서는 육사보다 더 출입이 제한될 것이다.
난 이화여대도 몇 번 갔었다. 한 번은 수지가 자기 모교 구경시켜 준다면 데려갔다. 캠프스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이화여대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유럽풍이다. 그래서 신촌에 있다가 들어가면 갑자기 유럽에 와 있는 느낌이다. 여기서 일반인은 모르는 이대생만의 긍지가 자라는 것 같다. 배우 김혜수처럼…,
대부분의 건축물은 아기자기하면서 자연과 매우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쩌면 가을에 단풍과 어우러져 경치가 더욱 좋을 것이다. 고려대학은 건축물이 웅장하면서 유럽의 거리 보다는 작은 성에 가깝다. 반면 연대는 유럽의 큰 건축물 같으면서도 현대식이 많이 가미된 건축과 어우러져 넓은 캠프스 이미지가 강하다.
반면 서울대학은 대부분 현대식 건물이 엄청 많다. 매우 넓은 캠프스지만 넓은 느낌이 별로 안 들고 그렇다고 유럽 풍도 아니면서 약간은 하버드나 MIT의 주변 비슷한 느낌이다. 대부분 김수근 건축가의 작품으로 미국 동부쪽에 이런 건축물이 많다. 물론 하버드나 MIT는 평지지만 서울대는 산 속에 있다. 바로 이런 서울대학의 축소판이 부산기공이다.
건물 하나하나의 규모는 부산기공이 서울대학보다 클 수도 있다. 서울대학은 공대처럼 높은 건물도 있고 덩치가 큰 것도 있다면 부산기공은 잔잔하면서도 넓은 면적의 건물들이다. 또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원 시원하게 떨어져 있다. 중간 중간에 수영장이나 연못, 테니스장, 운동장, 정원 등이 자리를 잘 잡고 있다.
그러니까 이대의 아기자기한 면과 서울대학의 현대식 건축물의 조합이라 보면 되겠지만 무엇보다 학교에서 해운대가 훤히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일본 대마도도 보인다. 오륙도와 동백섬을 매일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이런 학교의 선배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조선, 방산업, 자동차, 전자 등의 산업 발전에 매우 지대한 공을 세운 분들이다.
그 중에서 난 채선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구씨 집안의 종이라는 소리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현선이형! 우리가 구씨 집안의 종입니까?”,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훈련 준비나 해” 난 그날 선배와 싸우고 회사를 관두겠다며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에서 순이 선생님께 전화를 했다. “선생님! 상구 선배가 나보고 구씨 집안의 종이랍니다”, “그래 동배가 많이 힘든 모양이구나. 그럼 내려와라. 너 실력이면 부산에서도 갈 곳이 많다” 그렇게 선생님께 보고하고 내려 가려는데 기차편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역 지하도에서 하룻밤 자고 내려 가려고 구석진 곳을 찾았다.
“동배야!” 서울역 지하도가 시끄러울 정도로 현선이 형이 나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꽁꽁 숨지는 못했는지 선배가 금방 나를 찾았다. ‘지금 김본부장이 훈련실에 있는데 찾고 있으니 인사라도 하고 가라’며 부탁 했다. 할 수 없기도 했지만 지하도에서 자는 것보다 주차장 침대에서 자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훈련실에 갔더니 김본부장이 밀대 자루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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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내려 가면서 빠따 고맞 가겠구나!’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담담했다. 그런데 김본부장은 신의 한 수를 두었다. 내가 아니라 현선이 형을 엎드리라더니 빠따를 쳤다. 후배를 간수하지 못한 것은 선배의 책임이란다.
다음은 내 차례겠구나 했지만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갑자기 선배에게 미안했다. 이건 뭐지? 그날 침대에서 자고 그 다음 날도 구자경 회장의 주차장에서 침대 생활을 계속했다. 뒤에도 계속 나오지만 김본부장은 이처럼 결정타를 잘 날리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몰라도 난 이 분의 이런 능력을 잘 안다. 이는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난 기능올림픽 끝나고 대학 마칠 때까지 회사에서 책임져 주기로 G전자 연수부와 약속했다. 그래서 그 약속의 일환으로 대학을 거침 없이 다녔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그런 내막을 모르니 자기들이 배려하여 내가 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 수도 있다. 이 글을 통해 그렇지 않음을 확실히 한다.
난 국가대표였고 군 복무 마치고 그 약속대로 대학을 다녔고 파견 되어 G전자에 소속된 것 뿐이다. 현선이 형과 한판 승부를 치르고 나자 회사에서 휴가를 주었다. 난 갈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부산기공 미술도장실로 갔다. 아침에 일찍 도착하자 모두들 나를 보며 놀라는 눈치다. 나의 입장에서는 반가울 뿐인데 이들은 나를 적으로 봤나?
급하게 순이 선생님이 오더니 나보고 실과 주임 선생님을 만나라는 등 여기저기로 데리고 다녔다. 어! 이 사람들이 나한테 왜 이렇게 잘 하지? 난 비주류였는데…, 갑자기 조연에서 주연이 된 것 같다. 휴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 왔다. “근수는 훈련 잘 하고 있어?”, 현선이 형이 물었다.
“예, 그런데 참 재미난 과제로 연습을 하던데요. 우리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 확대 아닙니까? 그런데 근수형 훈련하는 도면이 확대 연습에 많은 도움이 되겠던데요.”, “어떤 건데?”, “우리는 항상 주제가 하나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근수형은 이 도면 두 개를 합친 것 같은 도면으로 연습을 하던데요“ 현선이 형이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난 그때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 바로 이 사건이 우리나라 기능올림픽의 판도를 바꿔버렸다. 여전히 무식한 난 세상의 정치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작은 정치들이 있다는 것은 지금의 사건이 터지고 돌아 보면서 알게 됐다. 난 이런 세상이 정말 싫다. 평가전이 시작되자 우리는 용산구 한남동의 정수직업훈련원으로갔다.
정수에 들어서자 순이 선생님도 올라와 있었는데 뭔가 표정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안녕하셔요 선생님?”, “그래 동배구나” 그렇게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대회장으로 갔더니 내가 부산에서 본 것을 그려 보라고 했다. 대충 그리자 도면 봉투를 열더니 내가 본 것이 맞냐고 물었다.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뭐 사실 똑 같았지만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 똑 같을 수야 있겠는가? 갑자기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나를 작은 회의실로 데려 가더니 양 옆으로 빙둘러 앉았다. 혹자는 전기나 물고문 등을 할 수도 있단다. 창문을 닫고 불이 없는 컴컴한 곳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왜 부산을 갔고 뭘 봤고 등이다. 그러니까 문제가 유출된 것이다.
그렇게 심문을 마치고 나왔더니 족히 수십 명이 넘는 모회사의 별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모회사에 비상이 걸려 임원 전부가 올라 왔다는 말도 있다. 추론 하자면, 똥 뭍은 개 겨 뭍은 개 같다. 사실 또 다른 면에서 장식미술은 도면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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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난리다. 어쩌면 아주 디테일에서는 진짜 중요할 수도 있다. 이 사건으로 대기업이 손을 떼면서 기능올림픽이 내리막 길을 걸었다. 도대체 내가 뭘 했고 뭘 잘못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방대회에서 1, 2, 3등 안에 든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 전국대회를 하는데 난 부산에서 2등을 하여 지방대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서울지방대회에 다시 출전시켜 압도적 1등을 했지만 메달은 없다. 가을에는 전주에서 전국대회가 열렸다. 난 앞 뒤도 돌아 지보 않고 오로지 내 것만 보고 최선을 다 했다.
3일간 대회가 끝나고 모든 선수들의 작품을 둘러 보았다. “아! 해 냈구나” 스스로 봐도 제일 잘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돌이켜 보면, G전자 소속이 아니었으면 1등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서울시 소속에 G전자 소속이다. 그래도 결과 발표까지는 걱정이 되어 경기장 근처서 맴돌고 있었는데, 내가 금메달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저녘 전주 덕진 호수에 갔는데 구름 다리가 꼭 꿈 속 같더라! 전주시 카퍼레이드도 하는 등 당시까지는 내 삶에서 그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전국대회 금메달리스트는 부모를 모시고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다. 팀을 나누어 청와대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 주었다. 우리는 대통령이 거주하는 당시 오리지널 청와대 안으로 들어 갔다.
대통령 가족이 식사하는 부엌 겸 거실이었는데 요즘으로 치면 일반 가정집 부엌 정도의 크기다. 초기 청와대 건물은 생각 보다 아주 작다. 이후 영빈관으로 이동하여 공식 형사를 마치고 대통령이 나가다 다시 돌아 왔다. 비서실장에게 뭐라 하더니 잠시 후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그냥 보내기 섭섭하여 하사금을 주라고 했다며 20만원을 봉투에 넣어 주었다.
전두환 대통령 파이팅! 난 독제, 민주주의 이런 것은 관심 없고 그냥 내 이익이 있을 때만 좋아 한다. 상대가 누구든 돈을 주면 파이팅! 안주면 개끼새! 비슷하다. 독제는 놀고 먹는 사람이 한 사람이지만 민주주의는 놀고 먹는 사람이 여럿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청렴해야 한다. 지금처럼 자기들 봉급만 올리면 안 된다.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부자가 되면 국민의 삶은 몇 배 더 궁핍 해진다. 여러 명이 놀고 먹으니 이는 진리 비슷하다. 회사로 돌아 가자 김본부장이, “어이! 정동배 청와대 갔다 왔어?”, “예, 다녀왔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도 했어?”, “예”, “대통령과 악수했으니 당분간 손도 안 씻겠네” 이런 비슷한 농담을 주고 받았다.
“그래 수고했어 이제 국가대표 준비를 해야지! 가봐” 그렇게 훈련실로 돌아 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석준이 코치가 따라 들어 왔다. 들어 오면서 윗옷을 벗더니 “야이, 끼새야! 너, 이리와 봐! 이 끼새가…,” 그러면서 돌려차기를 했다. 순간 ‘이게 뭐지?’ 했지만 계속 주먹질, 돌려차기, 귀싸데기 등 끝도 없이 때렸다.
대략 2시간 정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 헉헉거리며 옷을 입고 나갔다. 한 5분이나 됐을까 다시 들어왔다. “정동배! 너, 왜 맞았는지 알아?”, “아뇨” 여기까지 읽고 내가 왜 맞았는지 아는 사람 손? 나도 마찮가지다. 난 정말 왜 맞았는지 몰랐다. “이 끼새가 왜 맞았는지도 몰라” 하면서 또 때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디서 엄청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에게 앙가품을 하는 것 같다. 또 한 두 시간 정도 맞았다. 그리고 나가면서 “본부장님께 말투가 그게 뭐야?” 했지만 그래도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잠시 후 상구형이 마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들어 오더니 왜 그러냐고 했지만 돌이켜 보면, 상구형 작품 같기도 하는 등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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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본부장이 몇 개 질문을 했고 난 답을 한 것이 전부다. 내가 뭘 요구한 것도 없고 반말을 하거나 그렇게 무례한 것도 없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사람이 지금 서운대 교수다. 아마도 부산기공 출신들 보다 별 나을 것도 없는 제자들을 대학생이라고 데리고 있으면서 그 앞에서는 멀쩡한 척하고 있을 것이다. 암튼 대학이면 개끼새도 좋아하는 더러운 세상! 발씨! 박정희 대통령은 왜 중화학 공업 육성으로 나라를 잘 살게 하여 국민들을 배부르게 한거야?
나존 거지같이 살아야 정신 차리나? 하루에 밀가루죽 한 그릇이면 될 들놈을 삼끼시새 쌀밥 먹이니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조선의 어리석은 백성인데 몇 놈이 개고생해서 나라만 선진국이 됐다. 부산기공에서 그렇게 많이 맞아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직까지 부산기공에서의 체벌을 원망하거나 싫다고 한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 것은 분명 폭력이고 무식한 정신병자의 돌발행동이다. 몇 시간을 맞았는데 모두 기분이 최악이었다. 난 부산기공에서 선배나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항상 더 잘 해야지를 생각했다면 이번에는 아주 기분이 더러웠다. 정말이지 코치만 아니었으면 반 죽여 놨을 것이다. 발씨놈이 내가 저 집 개야!! 뒤에 만났는데 사과 한마디가 없다.
고등학교 선후배 중에서도 학교에서의 체벌로 기분 나빴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지보 못했다. 매에도 정식이 있다. 머리 나쁜 끼새는 지가 뭘 잘 못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상구형 작품이 아니라면 바로 다음의 일 때문이라는 추론도 해 본다. 이는 좀 있다 설명하고 바로 이어 가겠다. 그래서 난 상구형에게 “저 친미 놈 하고는 더 이상 같이 못 있겠으니 형이 사직서 처리 좀 해주셔요” 하고 G전자를 떠났다. 그 길로 수원으로 갔다.
당시 고등학교 동기 중, 서울 G전자는 나 혼지자만 수원 삼성은 친구들이 많았다. 친구들 숙소로 갔더니 미술도장 말고 다른 전공 친구들도 많았다. 이들과 몇 일 지내며 수원역 부근의 극장도 가는 등 잘 놀았다. 아! 극장은 영화보러 간 것이 아니다. 암튼 인간들이란…,
극장에서 간판 그림 그리는 화백을 만나러 갔다. 혹시 그곳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나 해서…, 이 때 내가 만난 화백은 보통 수준의 화가가 아니었다. 당시 내가 본 것이 있어 이 글을 남긴다. 주말에 고등학교 동기들이 놀러 나갈 줄 알았는데 대회에서 떨이진 친구들이 뭔가 열심히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술도장이 아니라 다른 전공 동기들이다.
“야 너희들 주말인데 뭐 하냐?”, 삼성은 각자가 맡은 생산라인 자동화 아이디어를 내어 채택되면 그 사람이 팀장을 맡아 필요한 인재가 석사, 박사라도 이들에게 붙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때문에 그 아이디를 연구 중이라 했다. 솔직히 G전자에서는 주말에 회사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을 못 봤다. 천재든 보바든 작품은 이래야 탄생한다.
나도 주말에 회사를 많이 나갔지만 대부분 내 공부를 위해서다. 봐라 결국 서울대학원에 갔잖냐.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G전자가 더 좋은 것인가? 아무튼 고졸들이 삼성을 위해 노는 날도 이렇게 연구하는 것을 보고 결국은 삼성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뭐랄까 오너들은 잘 모르겠지만 직원들은 왠지 항상 삼성을 이겨야 된다는 바탕이 있다.
내가 처음 들어간 직후는 G전자와 삼성이 비슷했다. 한 번은 삼성을 이긴 적이 있어 그해는 별도의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직원들의 열의가 완전히 달랐다. 이는 삼성이 시험으로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켜봐서 사람을 가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G전자가 나를 선택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이다. 하하!
그냥 대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열심히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것도 주말에 고졸이 삼성의 발전을 위해…, 몇일 후 G전자에서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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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G전자는 연구원 여러 명을 풀어 나를 찾아 다녔단다. 시골에서 형님도 올라 오고 장난이 아니다.
삼성 친구들도 돌아가라고 성화여서 할 수 없이 G전자로 다시 들어 갔다. 김 본부장이 엄청 혼낼 줄 알았는데 “열심히 해서 국가대표가 되자” 만 했다. 이 분은 진짜 프로다. 모르긴 해도 그 일로 석준이 교수는 나를 다시 봤을 것이다. 말이 코치지 그냥 가만히 있는게 돕는 것이다. 대학에서도 학생들 가르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밥만 축냈으면 한다.
평가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 몇일 휴가를 다녀 오라 했다. 이 일을 좀 전의 그 일과 연결하면 약간 이해가 될 법도 하다. 지난 번 부산기공을 갔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이제는 그곳에 갈 수가 없다. 친구들 말로는 정문과 후문에 내 사진을 붙여 놓고 학교 출입을 금지 시켰다.
그래서 시골로 가려 했는데 어떻게 만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하나 고등학교 동기 중 입시반이었던 준기를 만났다. 요즘처럼 휴대폰도 없던 시대에 그렇게 만난 것도 아이러니다. 기능훈련 하면서 특활생들끼리 가끔 해운대 백사장을 산책하곤 했다. 돌아올 때는 뒷문 앞의 분식집에 들렀는데 그 가계 사장은 나를 ‘미래의 대통령’이라 불렀다.
그래서 그곳을 가면 사람들은 항상 ‘미래의 대통령님 오신다’고 했다. 어쩜 찰라의 대통령을 한 번 해 본 것도 같다. 가계 딸이 근수형 하고 결혼 할 정도니 얼마나 자주 갔는지 알 수 있다. 처음으로 기능장려금(?) 이름이 같나? 암튼 기능 선수가 되면 학교에서 월 만원 정도의 장려금이 나왔다. 딱 한 번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졸업 할 때 준다.
난 이 돈으로 라면땅이라는 것을 사서 지나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준기에게 주곤했다. 라면땅은 100원이나 하려나 하는 아주 싼 과자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를 받고 눈물을 글썽였다. 태어나 남에게 이유 없이 받은 첫 선물 같은 거라나! 처음 생긴 내 돈으로 분식집에서 라면 같은 것을 사먹을 여유는 없었지만 싸구려 과자를 사서 그 친구에게 줬다.
장려금은 만원 정도였지만 나에게는 아주 큰 돈이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라면땅을 선물했다. 서로 시작은 다르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라고…, 준기는 대학 준비를 했지만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큰아버지 밑에서 컸는데 어렵게 공부해서 경상대 경영학과에 들어 갔다.
경상대 경영학과 과대표를 맡았는데 이도 참 아이러니다. 성격이 워낙 조용하여 어울리지 않았다. 난 기능올림픽으로 단련 됐지만 이 친구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그냥 돌아 갔나? 나를 경상대학으로 데려 갔는데 그곳에서 법학과 총학생회장을 만났다. 이 둘은 경남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권이다.
“동배야 저것 좀 봐라”, “난 뭘 말하는지 모른다. 다만 글씨가 저게 뭐냐 비뚤 삐뚤…,”, 못 읽을 정도로 현수막들이 엉망이다. ‘독제 타도! 전두환 개끼새!’ 보다 휠씬 심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너를 이리 데려왔다”, “동배씨! 저런 글 잘 쓴다면서요. 그래서 부탁 좀 하려고 하는데요”, “아! 난 잠깐 휴가 나온거라 곧 돌아가야 합니다.
저런 글을 쓰려면 계속 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난 대학생도 아니고…,”, “나라가 이 모양인데 국가대표가 되면 뭐합니까?”, “난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릅니다. 저런 글을 쓰더라도 뭘 알고 쓰야지? 난 기능올림픽 밖에 모릅니다.”, “민주주의가 없는데 어떻게 기능올림픽이 있습니까?”,
“그 민주주의라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 온 겁니까? 우리나라 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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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굴러 먹다 온 뼈다귀인지도 모르는 민주주의 때문에 국가대표를 포기하란 말입니까? 그리고 내가 국가대표를 포기 한다고 칩시다. 준기하고 두 분은 민주화 되면 대졸로 살 것이고 난 고졸로 살 것인데 내가 여기서 저런 글을 쓰면 내 미래는 누가 책임집니까?”
“동배야 아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정도전이 민본주의라 하여 제상 중심의 나라를 위해 노력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꼭 서양식이라 볼 수는 없다. 물론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주의라 할 수는 없지만..,”, “야! 옛날 이야기는 하지도 마라 정도전인지, 정몽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잘난 조상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못산다더라”
그들은 내가 G전자 관두고 경남대에서 민주화 운동하는 글을 쓰 줄 것을 요구 했으나 난 국가대표를 포기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대화로 무슨 돌섬 등 돌아다니며 함께 놀았다. 돌이켜 보면, 석준이 교수가 그곳으로 나를 보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 석준이가 대학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암튼 민주화 운동 한 놈이나 독제 한 놈이나 고졸을 개똥으로 취급하는 것은 똑 같다. 난 대학원 다니면서 학교 축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대충 다들 알겠지만 서울대 축제라는 것이 그냥 둘러 보는 것이지 무슨 행사가 따로 있는 것도 없다. 난 대학교 다닐 때까지 학교 공부는 못했지만 축제 등 학교 분위기는 서울대학이 딱 내 스타일이다.
다른 학교 축제도 여러 곳을 가봤다. 솔직히 학생들 축제가 무슨 장터마당 같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그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서울대학은 나한테 딱 맞다. 개인적으로 서울대 축제의 전통이 지켜졌으면 한다. 괜히 쓸데 없는 것까지 남 따라 가지 마라. 서울대 축제장은 떡복기 파는 소상공인 두 팀이 전부다.
그 중 한 팀이 박종철 부모님이다. “진짜 박종철 부모님이십니까?”, “예”, “아니 민주주의 운동에 가장 앞장선 학생이고 목숨을 잃었는데 지금 민주화 된지가 언젠데 아직도 부모님을 이렇게 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학생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도 말조심 해! 그래도 여기서 떡복기 장사를 하게 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암튼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학생이 고맙네”, “아니 그래도 이것은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했던 기억이 난다. 나 또한 경상대서 저런 글을 쓰고 있었으면 지금도 고졸로 살 것이고 저들은 나를 챙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데모하는데 끌고만 다닐 것이라 확신 한다.
박종철 부모님도 안 챙겨 주는데 나를 알기나 할까? 준기가 뭔 힘이 있다고.., 이런 일은 신경쓰지 말고 이제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면 된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다음 해 금메달인 현대 선수와 붙었다. 전국대회에서 1차, 별도로 3차를 거쳐 총 4차의 평가전으로 선발된다. 이 부분 또한 아주 치밀한 많고 작은 정치가 있다.
아직 한 번도 말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한 번 서술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전국대회는 평가전에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 때 처음으로 전국대회가 1차 평가전이 됐다. 전국대회는 높이 2m40cm, 폭 2m40cm에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고 평가전은 높이 2m40cm, 폭 6m에 작품을 완성해야 하니 모든 도구가 달랐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까라면 까는 식이다.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 전국대회가 어디서 열렸는지 기억도 없다. 난 메달과 상관 없이 평가전에 참석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다. 다들 만족할 만큼 금메달 딴 현대 소속 선수 보다 내가 월등하게 잘 했다. 역시 평가 선수와 전국대회 출전 선수하고는 급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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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지켜 보는 상태로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또 작은 정치가 시작된다.
물론 이도 돌이켜 보고 알게된 것이지 당시는 상상도 못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잘 세기고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 잘 반영하여 돌아 보기 바란다.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한 디테일을 생각하고 누군가 어디서 어떻게 치고 들어 올지를 생각해 봐라. 작은 정치는 몇 년이 지나야 조금씩 이해가 되니 지나고 나면 돌이키기 어렵다.
사실 이는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법은 작은 노력도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현대 만이 나의 적이 아니다. 내가 월등히 뛰어나면 G전자에서도 나를 통제하기 어렵고 또한 내가 건방질 수도 있다. 사실 1차에서 큰 점수 차이로 이길 것을 기대했으나 비슷했다.
내가 이겼지만 점수 차이가 많이 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현대도 G전자도 아니다. 소속 선수가 되면 팀으로 싸우는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전국대회에서 한 번 이기기도 쉽지 않지만 난 지금 출전해도 1등 할 만큼 실력으로는 자신이 있다. 2차는 다음 해 금메달 딴 선수와 둘이 겨루었다.
이번에도 내가 압도적으로 이겼다. 주관적 평가는 물론이고 객관적 평가까지 모두 완벽한 승리였다. 역시 점수 차가 없을 뿐이지 순수한 실력만 놓고 보면 내가 월등히 잘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작은 정치는 더욱 치열해졌다. 1차, 2차 모두 큰 실력 차이를 보였으나 점수 차는 아주 조금 밖에 나지 않았다.
상구형은 G전자 대변인 비슷했다. 박대감이 울산 현대에 지도를 갔을 때 정주영 회장이 본인 차를 공항까지 보내 훈련장까지 모셔 갔다거나 선수 지도가 끝나고는 왕회장이 직접 선물을 주었다고 박대감이 자랑했다. 상구형이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나도 이를 직접 들었다.
현대는 아직 기능올림픽을 포기 하지 않아 정주영 회장이 직접 챙기는 반면 G전자는 내가 마지막 선수다. 내 이후는 후배가 없기 때문에 뒤를 봐주는 사람도 없다. 혼자서 준비하고 훈련하고 치우고 다 했다. 국제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후배가 뒤에서 도와야 할 일이 많다.
그런데 G전자는 그나마 나를 소속으로 뛰게 해 주었다.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을 전부 투자 했다. 그래봐야 몇 푼 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현대와는 게임 자체가 되지 않았다. 실력으로는 1, 2차에서 엄청난 점수차가 나서 거의 확정되야 하지만 펙트는 그 차가 매우 미미했다. 다른 직종은 이미 1, 2차에서 확정된 곳도 있다.
비슷해도 3-4점의 차이가 나니 대충 20점 이상 점수가 벌어질 정도의 작품을 했지만 1점 정도 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그 정도 실력 차이로 두 번을 이겨 겨우 1점 차이 밖에 나지 않았으니 앞으로 두 번을 더해서 이기는 것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 물론 누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두의 이해 관계가 그쪽으로 몰고 갔다.
G전자는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 계속 분발 하라고 그랬을 수도 있고, 현대는 역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그럴 수도 있고, 박대감 이나 지해선 교수는 끝까지 끌고 가서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지교수의 몸값 늘리기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으나 그래도 훈련에 매진 할 수 밖에 없다. 주로 상구형이 실질적인 코치로 중개인 역할을 했다. 실력만 놓고 보면 충분히 잘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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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형은 매우 조심스럽게 정주영 회장과 지금의 상황 등을 적날하게 설명했지만 아마도 경험에서 오는 염려였을 것이다. 두 번을 잘 하고도 점수차가 나지 않으니 나 역시 조급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나는 정주영 회장을 잘 몰랐기 때문에 현대가 그렇게 두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대표 선수가 되고 나서 현대 소속 동기들이 정주영 회장을 마치 신격화 하여 조금씩 알아 갔을 뿐이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G전자가 더 큰 회사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상구형에게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상구형은 평가전에서 잘 하고도 현대에 졌다.
희망으로 비슷한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잘 할 수 있는데도 무슨 계란으로 바위치기 비슷한 상황이다. 진실로 힘든 날들이지만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한다. 뭐 좋게 보면 나를 단련시키기 위해 그럴 수도 있다. 난 상황파악을 전혀 못했지만 국제대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메달을 따는 것이 우선이다.
어쩌면 이런 작은 정치로 내가 단련되어 지금 처럼 역대 대통령들의 싸움에 끼여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힘들게 3차 평가전을 치렀다. 현대 정주영 회장도 공포의 대상이지만 마지막 선수로 뛰는 것 또한 같은 두려움이다. 주변의 조력자 모두들 마지막 선수이니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모양이다. 정신이 반은 나갔다.
또한 현대의 코치는 국가대표가 되기 전에 평가전을 상구형과 치렀던 분이다. 그러니 상대에 대해서는 상구형이 가장 잘 안다. 아마도 상구형 역시 평가전 끝나고 적어도 10년 이상 같은 꿈을 꾸며 말못하는 어려운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방송으로 정주영 회장을 보면 두려움도 느꼈을 것이다. 상구형은 잘 했지만 국가대표를 내어 주고 말았다.
아마도 현대가 두려웠던 것은 나보다 상구형이 더 심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3차 역시 내가 잘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한데 점수마저 힘들게 했다. 모두 합쳐 점수 차가 2점도 체 나지 않았다. 30점 어쩌면 50점 차이로 벌어질 일이 계속 어렵게 풀렸고 이제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이다.
만약 내가 현대 소속이었으면 7-80점 차이로 이기고 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로비를 위한 예산 등이 하나도 없어 매우 힘들어 했다. 관계자 등의 사비를 내니 어쩌니 하는 등 국가대표로 가는 길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난 지방대회 2회, 전국대회 3회, 평가전 3회 국제대회 1회 출전했다. 모두 9번 출전하여 1등을 6번이나 했지만 금메달은 하나 밖에 따지 못했다. 실력만 놓고 보면 8번 1등 했다. 그런 시대라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분야나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의 사건도 마찬가지다.
여당과 야당은 내가 어느 한 쪽에 줄을 서길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확신하는 김대중, 노무현의 뜻은 그렇지가 않다. 일국의 총리 관인이 위조 됐는데 여야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막장이 아닌가? 지금하는 말은 더 믿지 못할 것이다.
4차 평가전이 시작됐다. 날씨는 추웠으나 실내는 사람들도 여럿 지키고 있고 바람도 없어 춥다고 느낄 여유가 없다. 모든 작품을 잘 마무리하여 거의 끝났다. 더 할 것이 없을 정도로 작품을 마무리 지었다. 이쯤되면 작은 점수 차이겠으나 국가대표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 뒤에서 석준이 코치가 화를 냈다. 작품을 보면 화낼 일도 아닌데 난리다. 그는 코치로서의 역할이 있을 것이고 난 선수로서 장단을 맞춰 줘야 했다.
국가가 싼 똥은 국가가 치운다 039/240
선수로 뛰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휠씬 복잡하다.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나 상황이 동시에 돌아 가면서 서로 뭐라 말도 못하거나 안 하며 매우 어렵게 흘러간다.
그냥 작품에만 몰두 한다면 편하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쉽지가 않다. 특히 나 같이 머리가 나쁜 선수는 그냥 앞만 보고 가기 때문에 세상의 작은 정치 같은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아마도 호동이였으면 나보다 훨씬 능숙하게 대처 했을 것이다. 내가 머리가 나쁘다면 꼭 남들을 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난 머리가 좋은거야 나쁜거야? 암튼 “정동배! 뭐해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 끝까지 최선을 다 해야지” 난 더 할 것이 없다. 하지만 코치의 지시를 무시 할 수도 없어 물감을 들고 계속 하는 척 했다. “문 뒤쪽 벽도 잘 살피란 말이야”, 아마 코치도 자신이 있었는지 큰소리를 친다.
돌이켜 보면, 석준이 코치는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냥 한 번 뻥뻥 질러 보는 스타일인지, 아니면 시늉을 잘 내는 사람인지, 척하는 타입인지 그 속을 모르겠다. 뒤에서 소리지러는 것을 보면 나를 위하는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항상 사고를 친다. 이런 사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나 역시 그냥 가만이 있어 주면 고마운데 또 한편으로는 저렇게 쓸데없는 소리라도 질러 주는 것이 왠지 고맙기도 하다. 이도 참 아이러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겠지만 정부에서는 공정성의 문제라며 주의를 주었다. 난 이런 코치를 위해 물감을 들고 사다리에 올랐다. 아무리 둘러봐도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앗! 그런데 사다리를 밟는 순간 미끄러져 버렸다. 파란색 물감이 문쪽으로 튀겼다. 내가 믿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아마 상대쪽 선수도 이 부분까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난 똑 같은 일을 국제대회에서도 겪었지만 그때 까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일을 당하고서야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누가 범인 인지는 여전히 모르나 누군가 사다리 첫칸에 드라이아이스를 뿌려 놓았다. 여기에 맞추어 석준이 교수는 코치라는 명분으로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고 난 딱 그 시간 그 장소를 밟고 미끄러진 것이다. 아마 코치 역시 당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모를 것이라 추론된다.
이는 아주 디테일한 일로 당사자가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한다. 누가 왜 그런 일을 했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이 드라이아이스를 뿌린 것이 확실하다. 뒤에 누군가 지나가며 드라이아이스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때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다. 지금의 이 사건에서 유사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니 그때의 느낌이 드라이아이스라는 확신이 있다. 드라이아이스는 밟는 순간 매우 미끄럽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 흔적이 없어 여기가 미끄러웠다면 나만 신병이다. 대회는 항상 실내에서 한다. 따라서 마무리 작업에서 미끄러질 이유가 전혀 없다.
미끄러진 후 정신을 차리고 그곳을 밟으면 스스로도 왜 미끄러졌는지 모르지만 순간만은 매우 미끄럽다. 결과적으로 난 파란색 물감을 튀겼고 그 자리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닦으면 더 얼룩 질 것이 분명했다. 그 때 박대감이 들어 왔다. 심사는 지해선 교수가 했지만 박교수님은 대감이다. 왠지는 나도 모른다. 왜 대감님입니까?
평가전은 대회가 아니고 누가 국가대표로 적합한지를 뽑는 것이니 파란 물감 튀긴 부분을 제외하고 펑가하라는 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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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이 묻은 부분은 기본 점수만 받고 나머지 부분으로 평가하면 된다. 그래서 4차전까지 모든 점수를 합산하라고 했다. 나름 일리가 있는 논리라 현대에서도 한참 논의를 하더니 그렇게 하자고 했다. 3차전까지 점수 차이가 별로 없고 오른쪽 문짝 쪽이 기본 점수만 받으면 현대가 이길 것이라 확신하여 동의 한 것 같다. 나 역시 그렇게 예상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 하나 점수를 메기고 지난 3차전까지 더하여 모든 계산은 제3자가 하는 식으로 서로 합의하고 서명을 먼저했다. 내가 0.0몇점 차이로 이겼다. 가장 근소한 차이로 국가대표가 됐다. 또 한 번 ‘턱걸이’를 했다. 이후 대표가 되고 나서는 변국장이 나를 보고 ‘턱걸이’라 불렀다. 현대 선수에게는 정말 미안했다. 이도 운인지 전략인지 모르겠다.
모든 평가전을 종합하면 내가 대표선수가 되는 것이 당연하나 마지막 실수는 모든 것을 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줄곧 현대 선수 자체를 그렇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4차까지 평가하면서 그 선수와의 싸움이라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뒤에 있는 정주영 회장이고, G전자가 더 이상 기능올림픽을 하지 않는 것이다.
뒤에 현대 선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마 대표선수 생활 할 때 쯤인 것 같다. 내가 실수 한 것은 있지만 대표선수를 하기에는 더 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니 꼭 금메달을 따란다. 이 친구의 주문은 나중에 나의 은메달을 더욱 힘들게 하는 요인 하나를 추가 했다. 이 친구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고 착한 것을 보면 아직 가난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어렵게 국가대표가 됐고 정수직업훈련원 국가대표 훈련장에서 훈련이 시작됐다. 아침에 일어나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돌거나 가끔은 애국가도 불렀다.
니들이 언제 나한테 믿음 줬다고 헛소리냐? 아무도 나 믿지 마라. 나도 아무도 안 믿는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과 같은 법을 지나 왔고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법에 서 있을 뿐이다. 한 번만 더 믿음이 어쩌구하면 개박살을 내겠다. 난 내 이익이 내 믿음이다. 20년째 법대로 하라는데 여전히 랄지이다. 내가 강제집행하라고 한 지가 자그마치 20년이다. 호로끼새! 됐냐?
제9차 헌법개정(현행 헌법) 투표 때는 훈련에 방해 된다며 국가대표는 투표에 참석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이후 대표 선수 생활 중에 대선이 있었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막상막하로 겨루었다. 정부 관계자가 와서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면 하사금 등 선수들 지원을 더 잘해 줄 것’ 이라고 했다. 선수들 끼리도 누구를 찍었냐는 말들이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묻기에 노태우를 찍었다고 했다. 왜 찍었냐고 묻길래 ‘기능올림픽 선수들한테 연금도 올려주는 등 더 잘해준다고 하지 않느냐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누가 더 잘해 준다고 한적이 있어? 난 정치는 모르겠고 내 이익이 있으면 그 곳으로 간다’고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나? 얼마 후 개표가 시작되자 노태우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다.
김영삼, 김대중 표가 분산 되면서 노태우가 유력하게 됐다. 그러자 대표선수가 아닌 직훈 훈련생 중에 누군가 칼을 들고 단상에 서더니 “누가 우리 김대중 선생님을 김대중이라 했냐?”며 죽여버리겠다고 설쳤다. 몇 명이 들어와 이 사람을 저지하며 어떻게 대표 선수들 숙소로 들어 왔는지 모르겠다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 때만 해도 대선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생각했다. 당시는 국제대회서 금메달 따는 것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아는 것도 없다.
나이가 60이 다 되고 보니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알 것도 같다. 1987년 12월경 국가대표 훈련장에 전두환 대통령이 오신다고 했다. 경호실에서 훈련장 주변을 점검하고 임시 대통령 의자를 내 훈련장 바로 옆에 준비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