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시민게시판

시민게시판

보안과 관련되어, 홈페이지에 접속하신 후 화면 이동 없이 30분이 경과되면 자동으로 로그아웃되오니 작업시간에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게시판 글쓰기를 하실 때, 세션 종료로 작성하신 글이 모두 삭제될 수 있으니 반드시 다른 곳에서 먼저 글을 작성하신 후 복사하여 붙여넣기 해서 글쓰기를 완료하시기 바랍니다.

  • 이 게시판은 자유롭게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며, 자율과 책임이 공존하는 사이버 문화 정착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통합민원신청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 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상업성 광고, 저속한 표현, 특정인에 대한 비방,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 반복적 게시물, 개인정보 등은 관리자에 의해 통보   유출은 법적 문제로 확대될 수 있으며, 불법 유해 정보를 게시하거나 배포하면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벌칙(징역 또는 벌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얼삔의 총성

내용
글쓴이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 * * * * * * * * * * * * * * * * * * * * * *

제안서 :
한국전통식품 및 전통양념 제조와 유통에 따른 정부 규제에 관한 고찰과 그 발전방향 - 부산광역시를 중심으로 ( 1999. 10. 20, 김대중 대통령 / 안상영 부산광역시장 / 윤석천 금정구청장 )

제안자 :
부산광역시 금정구청 기획 감사실 (실장 : 임병철 )
지방행정 주사 (6급), 안정은 (安貞垠)

* * * * * * * * * * * * * * * * * * * * * * * * *

제 목 : 하얼빈역의 총성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들은 것은
1909년 10월 중순이었다.
이토는 한국과 만주 몽골 지배를 놓고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할 예정이었다.
안중근은 의병부대장 최재형의 집에 머물며 거사 준비에 들어갔다.
최재형의 딸 최올가 페트로브나는 당시를 이렇게 전한다.

“ 언젠가 민족 혁명가들 중 한명이 우리집에서 지냈다. 그를 안 인사(안중근)라고 불렀다. 그는 벽에 3명의 모습을 그려 놓고 저격 연습을 했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현 러시아)에서 의병 전우 우덕순을
만나 “ 이토를 처단하자 ” 고 제안하자 우덕순은 그 자리에서 동의했다.
1909년 10. 21일 열차편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이들은
22일 밤 하얼빈(현 중국)에 도착, 국민회 지부장 김성백의 집에 묵었다.
10. 23일 조도선을 합류시킨 안중근은 이발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이어 대동공보 주필 이강(李剛)에게 거사계획을 알리는 편지를 쓰고
즉석에서 장부가(丈夫歌)를 지었다.

‘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 때가 영웅을 짓고 영웅이 때를 만든다 / 천하를 굽어 봄에 어느 날에 대업을 마칠거나 / 동풍은 점점 차가워지나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

1909년 10. 24일 아침,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은 남행열차를 타고
지야이지스고(중국명 : 蔡家溝)역까지 갔다. 현장답사를 통해 이토의 동선을 확인한 안중근은 두사람을 그곳에 남겨두고 25일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열차가 먼저 도착하는 지야이지스고역에서 기회를 엿보다가 실패하면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거사한다는 2단계 작전이였다.
1909년 10. 2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예상대로 새벽 5시경 지야이지스고역에 정차했다. 수상한 한인들의 움직임을 눈치챈 러시아 헌병들이 우덕순 등이 묵고 있는 구내매점을 봉쇄해 1차 거사는 실패했다. 안중근은 아침 7시경 추위로 얼어붙은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하얼빈역에는 러시아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폈으나 검문은 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대합실 찻집에서 작전을 구상했다. 9시경 열차가 도착했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 자그마한 노인이 열차를 내려와 의장대를 사열하자 러시아 병사들이 발을 구르며 경례를 붙였다. 하얼빈 거주 일본인들이 일장기를 흔들며 “ 반자이(만세)”를 연호 했다.
‘ 저 놈이 이토다 ’ 안중근은 주머니 속의 권총을 움켜쥐고 도열한 러시아 병사들 뒤쪽에서 이토를 향해 걸어갔다. 두사람 거리는 불과 10여 보(步), 안중근은 권총을 뽑아 이토의 오른쪽 가슴을 겨냥해 세발을 쏘았다. 두 개의 총알은 가슴에 세 번째 총알은 복부에 박혔다. 이토의 허리가 꺽어지며 무너졌다. 이토가 쓰러지는 것을 확인한 안중근은 권총을 던지며 외쳤다.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코레아 우라 ! (한국 만세) ”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15분만에 절명했다.

구 태 훈 (성균관대 교수, 일본사 )

-- 2009. 10. 22(목), 조선일보, “ 제국의 황혼 ‘ 100년 전 우리는 ’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이듬해인 1910년 2. 14일 : 안중근 사형선고
* 1910년 3. 26일 : 안중근, 교수형으로 순국

* 이후 10년 후인 1919년. 1.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죽음,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졌고 이는 곧 3. 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는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였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제 목 : 중국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중국 하얼빈驛(역)에
2014년 1월 19일, 안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들어섰다.
중국 하얼빈시와 하얼빈시 철도국은 이 공사를 그동안 비밀에 붙여진채 진행이 되었으며 이날 기념관의 개관식에는 헤이룽장성 부성장을 비롯한 중국측 인사들만 참석했다.
규모는 231㎡ (70평)으로 하얼빈역 귀빈실 내에 위치해 있으며 건물 내부에 안의사의 의거 현장을 조망할 수 잇도록 조성되었다.
그동안 간단한 표식만 있던 안의사의 저격 현장에 ‘ 안의사 이등박문 격살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 라는 설명 문구를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다.
기념관의 글은 한. 중 양국어로 전시되었으며 기념관에 걸린 벽시계는
안의사의 의거 시각인 오전 9시 30분에 고정되어 있다.

-- 조선일보, 2014. 1. 20일(월), 안용현, 김진명 기자 --
-- 국제신문, 2014. 1. 20일(월), 정유선 가자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

글쓴이 : 안정은 (제안자)

제 목 : 안중근의 맏딸, 안현생과 그녀의 남편 황일청
제 목 : 광복군


- 안중근의 외손녀, 황은주님 -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부에서 태어났다. 본은 순흥안씨.
안중근 의사(처 : 김아려)의 유일한 생존 외손녀인 황은주님 (87세),
이화여대 기악과를 전공하고 미국에 있는 자식들과 떨어져 한국에 살고 있다.

안중근(처 : 김아려) 의 아버지는 안태훈씨,
안태훈씨는 부친 안인수씨의 삼남으로 부친이 공부를 시켜 안태훈씨를
진사에 합격을 시켰다.
안태훈씨의 처는 조마리아, 즉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다.
안중근은 안태훈씨의 장남으로 종교는 캐톨릭 신자이다.
.............................................................
안중근 아래 안정근, 안공근의 동생이 있었다. 두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은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다.
김구의 장남인 김인과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의 딸 안미생이 결혼하면서 두 집안은 더 돈독해 졌다.
..............................................................

안중근은 2남 1녀를 두었으나 큰 아들(안분도)은 6세때 의문사했다.
들째 아들 안준생이 친일파로 불리우는 안준생씨. 안중근이 죽인 이등박문의 아들에게 ‘ 망부를 대신해 속죄한다 ’ 고 사과를 하여 안준생씨는 평생 ‘ 변절자’ 의 시비에 말렸다.
안중근의 맏딸이 황은주님의 어머니, 안현생씨다.
* 안현생씨는 아버지 안중근의 하얼삔 의거로 서울 명동 수녀원에서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가족과 합류를 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과 만나 결혼을 한다.

황일청은 안중근의 유일한 사위이며 황은주님의 아버지다.
안중근 의사의 유일한 생존의 외손녀(황은주님)가 ‘ 연금을 받지 않느냐 ’에서 아버지(황일청씨)에 대한 연금을 신청했더니 ‘독립운동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 며 기각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
* 안현생씨 ...........대구 효성여대 (현 카톨릭대)에서 불문학 교수로 지내다가 57세 고혈압으로 사망
임시정부에서 있던 이범석 장군 (초대 국무총리)이 황일청씨의 친구였다. 이범석 장군은 황일청씨가 죽은 소식을 듣고 부인을 보내어 위로했다.

.................................................

황은주님의 아버지인 황일청씨는 비명에 갔다.
해방 후(1945년 12월 3일) 광복군의 총에 맞아 죽었는데 범인은 중국 공안(=한국의 경찰과 같음)에 잡히면서 드러났다.
황일청씨는 신흥무관 학교(당시 이시영이 설립한 독립군 양성기관)를 나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군무부 참사를 지냈다. 상해(상하이)의 임시정부가 - 상해(=상하이) 홍구공원(=홍커우 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본인에 폭탄투척)로 - 항주(= 항저우)로 옮기고 다시 중경(충칭)으로 옮겼다. 그러나 황일청씨 가족은 그곳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상해는 일본이 점령하고) 황일청씨는 일제에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이 되어 5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런데 일제는 일본의 담당자를 중국 장쑤성 쉬저우 (강소성, 여주)에서의 거류민 단장으로 발령을 내자 황일청씨를 ‘ 조선인 교민회장’ 으로 데려갔다. 따라서 황은주님 가족도 쉬저우(서주)로 옮겨 갔다. 이들 가족은 1945년 8월 해방을 이곳에서 맞았다.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벗어난 조선 학병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귀국선을 기다리는 6개월 동안 황일청은 집 아래층에 교민 자녀를 위한 ‘ 서주 한국 중학교’를 열었으며 조선 학병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한편 해방된 한국으로의 귀국선(귀국하는 배)을 서주 (쉬저우)에서 타기 위해 중경(충칭)에서 상해로 내려오던 40여명의 광복군이 이 도시로 와서 광복군과 조선학병이 이곳 서주(쉬저우)에서 만났다. 광복군은 자기 말을 따르라며 점령군처럼 행세를 하면서 황일청씨와 학병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았다.
1945년 12월 3일 밤 10시 쯤, 황일청이 있는 방에서 ‘꽝’ 하는 굉음이 울렸다. 황일청의 머리에다 쏜 것이다. 황은주님이 17세였다.
.....................................................................

참고 문헌
1. 안중근 평전, 김삼웅 저, 시대의창, 2009년 1쪽 ∼79쪽
2. 안중근 불멸의 기억, 이수광 저, 추수밭, 2009년, 314쪽, 안중근 연보
3. 조선일보, 2015. 11. 23일(월), A31면, 최보식이 만난 사람
.
.
등록 : 2015. 11. 23일(월)
부산시청 (시장 : 서병수) - 시민참여 - 시민 게시판 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옮긴이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안보란
제 목 : 광복군의 실체


안보는 안전보장이다. 군인은 국가(=나라)를 타국으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있다. 차량의 안전운행은 운전자의 (쌍방) 안전을 위해서 나라에 교통경찰이 있다.
식품안전을 위해서도 나라에서 식품의 안전을 인증하는 자(식품 전문가)가 있어야 마땅하다.
.................................................................

보훈처, 故 박정희 대통령 36주기 추모식 개최

故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3년간 재직 후,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인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박 전 대통령은 정부수립 이후 국군장교로 복무, 1961년 육군소장으로 5·16 군사정변을 주도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됐다.
이후 1963년 대장으로 예편해 민주공화당 총재로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나라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했고,
1964년에는 베트남 파병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새마을운동을 전개해 ´하면 된다´ 는 국민적 자신감을 고취시켜며 대한민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15. 10. 26일. NewDaily( 뉴데일리), 오현지 기자 : 인터넷 기사 --
__________________________
* 교사 ............... 초등학교 교사

*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년 뒤인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


- 노무현 정부, 과거사 진상 조사위원회 밝힘 -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 행적 ................

민족문제 연구소(소장 : 임헌영)에서 당시 신문을 공개했다.
“ 제목 : 血書, 軍官 志願 ” 이 그것이며 1939년 3. 31일 민주 신문(만주국에서 일본이 발행한 신문)에 났다.
“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 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 등본, 이력서, 교련 검증 합격증명서와 함께 ‘ 한 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한자와 일본어 병기) ’ 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 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 (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 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박정희 대통령의 혈서 지원이 객관적인 방증으로 확인된 것으로 처음이다.

조세열 민족 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 친일 인명 사전 발간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 게제.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 을 내는 등 정치 쟁점화 하고 있다 ” 며 “ 불필요한 논란이 정리되길 바란다 ” 고 말했다.

-- 2009. 11. 6(금), 한겨레, 홍석재 기자 --
___________________________
* 軍官 ........... 현재 한국의 사정으로 해석해 보면 군의 업무를 보는 일종의 공무원이다. 예로써 중대규모의 병원에서 의사 외 병원에서 병원의 사무를 보는 것이 원무과 직원이듯이 군인들에 대한 사무를 보는 사람이 군관이다.
.
.
~~~~~~
~~~~~~
등록 : 2015. 11. 2일(월)
제안청 부산시청 (시장 : 서병수) - 시민참여 - 시민 게시판 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작성자 : 안정은 (제안자)

주 제 : 식품 안전

제 목 : 문, 독립유공자 3대까지 합당한 예우


문 대통령은 8.15 광복절을 맞아 독립 유공자들(240여명)을 초청해 오찬을 가지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독립 유공자의 자녀. 손자녀 보상금을 선순위자 1인에게만 지급하는 현 규정에서 약 500억원을 더 투입해 생활이 어려운 자손들에도 모두 지원해
“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 는 말이 사라지게 하겠다 ” 며 “ 독립 유공자는 3대까지 예우하겠다 ” 고 지원 확대를 약속했다.

-- 동아일보 5면, 2017. 8. 15(화), 유근형 기자 --
-- 부산일보 4면, 2017. 8. 15(화), 전창훈 기자 --

-- 2017. 8. 15(화)--

등록 : 2017. 8. 15(화)
부산시청 (시장 : 서병수) - 부산민원 120 - 시민 참여 (시민 게시판)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