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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진성(多大鎭城) 순절 선열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

다대첨사

윤흥신공의 사적은 오랫동안 묻혀져 전공이 천양(闡揚)되지 못하고 있다가 임진왜란 후 170여년이 지난 1761년(영조37년) 경상감사 조엄과 동래부사 강필리 등에 의하여 발현되고 1772년 2월에 충렬사에 합향되었다.


공(公)은 을사사화(1545년)때 화를 당한 찬성 윤임(尹任)의 아들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적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부산시 사하)를 함락하고 다대진성을 포위하매 첫날은 힘써 싸워 이를 물리쳤다. 그 부하가 말하기를 「내일은 왜적이 크게 쳐들어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우니 우선 나가 피하는 것이 좋겠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어찌 차마 떠날 수 있겠는가」하면서 그 이튿날 적이 크게 이르니 서제(庶弟) 흥제(興悌)와 같이 종일토록 적을 쏘아 죽이다가 성이 함락되어 순절하였다. 동생 흥제는 그가 다대진에 부임할 적에 따라 왔는데 적이 공에게 다가와서 칼을 마구 휘두르니 흥제는 공을 안고 순절하였는데 후에도 끝내 팔을 풀지 않으므로 두 분을 합장하였다 한다.


  • 증직 : 윤흥신 윤흥제 - 병조참판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정 운 장군은 녹도만호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적을 방위할 능력을 잃고 전라도 수군에 군사원조를 요청하였다. 이때 공은 경상도 원군을 주장하고 관할고수론(管轄固守論)을 성토하였다. 이에 이충무공은 공을 선봉장으로 하여 부산포로 나아갈 때 몰운대 아래서 적선을 만났다. 때마침 해가 저물고 일기가 고르지 못하여 아군은 일단 군을 돌이키려 하였으나 장군은 진격을 주장하고 몰운대의 ‘운(雲)’과 자기이름의 ‘운(運)’이 같으니 「나는 이곳에서 죽을 자리를 택한다」하고 분전하다 장렬히 전몰하였으니 공(公)이 공(功)을 세우고 자신을 죽인 대략(大略)이다.


  • 증직 : 병조판서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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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업데이트
201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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