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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본격적 상업화의 길 들어선 동래 권번

동래온천과 기생문화 ③

내용

관기제도(官妓制度)가 철폐되고 자유의 몸이 되었던 동래의 기생들이 생존을 위해 1910년 ‘동래기생조합’을 창설하였다. 1912년에 ‘동래기예조합’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20년 다시 ‘동래권번(券番)’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시 전국 곳곳에 설립되어 있던 기생이나 창기조합의 명칭을 모두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권번’이란 교방(敎坊:기생양성소)의 일본식 발음이다.

동래권번이 있는 명륜동에서 온천장까지의 거리는 2km에 가까웠다. 화려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기생들이 온천장의 요정까지 걸어서 가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그 무렵 대중교통 수단의 하나로 등장한 인력거(人力車)를 이용하여 온천장까지 드나들었다.

온천장에서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인력거였다. 인력거의 사용이 늘어나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경영하는 인력거도 등장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력거 조합을 결성하고 동래권번 건물 바로 이웃에서 영업을 했다. 인력거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고객이 바로 기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력거와 택시가 기생들의 이동 수단

기생 전용 인력거는 별도로 대기시키고 있었다.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출입하는 요정까지 기생을 실어다 주었다. 기생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요정 앞에 인력거를 대기시켜 두었다가 시간이 끝나면 권번이나 자기 집까지 타고 오기도 하였다. 인력거 삯은 30전. 쌀 한 가마 값이 12원이었던 그때로서는 비싼 비용이었다.

인력거를 모는 차부(車夫)들과 기생들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매일같이 기생들을 날라다 주는 사이 그녀들의 애환을 가장 속속들이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차부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러는 그들의 관계가 따뜻한 정감을 나누는 사랑으로 발전하여 결혼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초저녁부터 다음날 신새벽이 되도록 기생들을 태운 인력거가 거리를 누비고 달리는 풍경은 일대에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울긋불긋한 삼회장 치마저고리에 화사한 화장을 하고, 잘 빗어 넘긴 쪽진 머리에 빨간 댕기를 매단 채 인력거를 타고 거리를 달려가는 기생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충분히 아름답고 호사스러운 광경이었다.

택시기사와 기생의 로맨스

1922년에는 일본인 회사인 만주철도주식회사(滿洲鐵道株式會社)에서 온천사업 일체를 인수하였다. 공중목욕탕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철도여관과 요양소를 세워 동래온천장을 전국적인 관관휴양지로 다듬었다. 이어 만철주식회사는 이듬해에 대형버스를 전차와 함께 부산에서 동래까지 운행하게 하였다. 온천장은 휴양지로서 더욱 번창일로를 치닫게 되었다. 1926년에 온천교가 가설되고 온천장까지 전차가 연장 개통되면서 온천장은 절정기를 맞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고급 교통수단으로 택시도 등장했다. 동래에도 중앙택시회사, 동래택시회사 등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택시회사가 생겨나 여섯 대의 택시가 운행했다.

자연 택시도 인력거와 함께 동래권번의 기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교통수단이 되었다. 동래에서 온천장까지 택시 대절비는 80전이었다. 웬만한 서민들의 입장으로선 아예 타볼 엄두를 낼 수 없는 비싼 요금이었다. 동래 온천에서 부산까지의 택시 대절비는 3원. 부산역에서 온천장까지 왕복 전차요금은 25전, 왕복 버스요금은 1원이었다.

그 무렵 택시기사는 대단한 대우를 받고 인기를 누리는 직업이었다. 자동차가 지금의 비행기만큼이나 귀할 때였으므로 그것은 모는 운전기사도 지금의 비행사만큼이나 사회적 예우와 대접을 받았다. 게다가 택시를 이용하는 고객이 모두 지역의 토호와 거부들이 아니면 고급 관리들이었다. ‘정승의 말꾼이 정승 노릇 한다’는 속담처럼 그들도 따라 위세를 누리기도 했다.

택시기사 역시 기생들과 접촉할 기회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그녀들과 깊은 관계를 맺거나 결혼까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맺어진 부부들 가운데는 지금의 동래구청 인근에서 요식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지역주민의 복지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분들도 있다.

인기 따라 수입 천차만별

기생의 화대(花代 : ‘해웃값’이라기도 하고 상격(賞格) 또는 행하(行下)라 하기도 한다)는 시간당으로 계산해 받았다. 처음 한시간은 1원50전. 그 다음에는 매시간 1원씩으로 계산해 올려 받았다. 기본요금에 시간요금을 더하는 매우 합리적인 방식이었다. 화대는 연회나 주석에서 손님의 요청에 따라 노래하고 춤을 추며 흥을 돋우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출연료였다. 지금의 매춘의 대가로 받는 돈과는 전혀 성격이 틀렸다. 그리고 기생들은 절대로 화대를 직접 받지 않았다.

화대는 요리점 주인이 손님들로부터 연회비와 함께 청구해 받았다. 그날그날 기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지도 않았다. 확인 전표만 떼어주고 매월 15일과 월말에 일괄 계산해 전표와 함께 권번으로 보냈다. 물론 요리점에서는 화대중의 일정액을 소개 수수료로 공제했다. 권번에서는 요리점의 전표와 화대를 기생들에게 받아둔 전표와 대조 계산해 지급했다. 여기서도 일정액을 조합비로 공제했다. 조합비는 조합사무실 운영비를 비롯해 조합장과 악사와 호장(戶長 : 사무책임자)의 월급 등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기생의 인기도에 따라 수입은 천차만별이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1·2월호
작성일자
2013-11-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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