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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동기(童妓)의 초야권(初夜權)

동래온천과 기생문화④

내용

지난 호에서는 동래기생이 본격적인 상업화에 들어선 내력과, 기생의 인기도에 따라 그들의 수입도 천차만별이었음을 밝혔다.

재색과 기예를 겸비한 기생은 자연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고 찾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수입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명창(名唱) 명무(名舞)에 미모까지 갖춘 일급 기생들은 며칠 전부터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아무나 자리에 앉힐 수가 없었다.

요정을 출입할 정도면 대개 재산이 넉넉한 지주나 상인들 혹은 그 자제들이거나 고급 관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온천장의 이름난 요정을 자주 드나드는 얼굴들도 대개 정해져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이름난 기생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일도 더러 있었다.

양반들의 화류 풍류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기생을 며칠이고 함께 데리고 지내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개는 돈 많은 상인들이거나 지주의 자제들로 주색을 즐겨 탐닉하는 바람둥이들이었다. 100시간이고 200시간이고 미리 화대를 쥐어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기생을 다른 손님들이 불러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연 인기가 높은 기생을 두고 그를 탐하는 손님들 사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다. 서로 자기가 독차지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화대도 규정 요금보다 두 배 세 배 이상 웃돈을 붙여서 치렀다. 암암리에 경쟁상대와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갔기 때문이었다.
 

한편 권번에서는 이런 경쟁을 은근히 유도하기도 했다. 권번에서는 매월 온천장의 각 요정으로 기생의 명부를 보냈다. 이때 월별 수입액이 많은 기생의 순서대로 명부를 정리 작성했다. 수입액이 많은 기생이 곧 인기 기생임을 알 수 있었다. 기생들을 개별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손님들로서는 대개 그 순위표를 보고 상위에 오른 기생들을 부르려 하였다.

기생 성적표 같은 명부는 기생들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뜨거운 경쟁의식을 부채질했다. 재색과 예기가 비슷한 기생들은 월별 명부의 순위에 따라 자신의 인기가 결정되었으므로, 서로가 서열에 뒤지지 않고자 예기의 수련에 열정을 쏟는 등 자신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자 노력했다. 명부의 순위 고시제도(告示制度)는 기생들이 뚜렷한 직업정신을 갖추게 하는 좋은 자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권번 소속 기생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누구나 매일 정한 시간에 권번으로 출근하여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정해진 시간만큼 교육을 받아야 했다. 오늘은 판소리 한마당 내일은 단가(短歌) 모레는 가야금병창 또 다른 날은 승무(僧舞)… 하는 식이었다. 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거나 성적이 지나치게 좋지 않으면 손님방에 내보내지 않았다. 관기제도의 폐지 이후에는 천자문만 습득하면 서예나 시가는 가르치지 않았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만큼 풍류의 관습이 단순한 쾌락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물론 동기(童妓)들의 교육은 따로 시켰다. 동기들은 대개 열 서너 살 때부터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악생(樂生 : 기생수업을 지도하는 선생, 악사)들로부터 손님을 모시는 기본 예절에서부터 시작해 천자문 등의 기초적인 글도 깨우치게 되었다. 그리고 노래와 춤을 익히고 가야금 거문고 등의 음률도 배우며, 간혹 서화와 시가도 배웠다.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제대로 익히지 못하거나 실수가 있으면 그때마다 악생들이나 행수기생(行首妓生 : 우두머리기생)들로부터 회초리로 종아리를 사정없이 맞아야 했다. 때론 끼니를 씨杵하는 등의 가혹한 체벌을 받아야 했다.

빠르면 1∼2년 늦게는 2∼3년 엄격하고 혹독한 수련과 훈련과정을 거쳐 나이가 열 예닐곱 살에 이르면 비로소 동기의 딱지를 떼고 한 사람의 온전한 기생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머리를 땋아 내린 동기인 채로 주연(酒宴)에 나아가 소리나 음률을 타기도 하지만, 머리를 얹고 성인의식(成人儀式)을 치러야 본격적인 기생으로 대접을 받았다.

동기의 성인의식을 보통 ‘머리 얹는다’라고 한다. 그러한 풍습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동기의 기생수업 정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고 나이가 차면, 행수기생이나 기생어미(주로 나이 많은 퇴기들로 기생을 키워온 사람)가 특정인을 골라 동기와 첫 밤을 지낼 수 있는 초야권(初夜權)을 주었다. 초야를 치른 동기는 비로소 땋아 내린 머리를 올리고 한 사람의 온전한 기생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는 기생은 원칙적으로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머리를 얹음’을 결혼식으로 대신하도록 한 것이었다.

동기에게 머리를 얹어준 첫 사내는 그 동기가 앞으로 어엿한 기생 노릇을 할 수 있도록 패물과 비단 옷가지들은 물론 장롱이며 세간 등 한 살림 두둑하게 차려주어야 했다. 동기는 머리를 올림으로써 성인의식을 치른 것을 세상에 알렸다. 누구든지 마음에 들면 가깝게 접촉할 수 있다는 공개적인 신호였다. 이러한 통과의례는 아마도 사대부로 하여금 처녀를 범한다는 유교 윤리적 죄의식을 모면하게 하고, 기생은 모두의 공유물이라는 표적으로 삼기 위해 만든 한 방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러므로 동기의 초야권을 가졌다 해서, 자기의 소실로 들여놓지 못하는 이상 누구도 기생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기생 자신도 초야권을 준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히 어떤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일부종사(一夫從死)의 미덕이 최고로 찬양되었던 그 시대에 아무리 비천한 신분의 기생일망정, 자신의 처녀를 바친 남자에 대한 각별한 마음이 전혀 없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초야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머리를 얹었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처녀를 바친 기생도 있었다. 미리 신분이 비슷한 사람들 가운데서 후일을 의지할만한 사내를 이른바 기둥서방으로 삼고 초야를 바친 기생도 없지 않았다. 기생의 전성기래야 기껏 4~5년에 불과해 노후를 대비해 미리 남편을 정해 놓고 비공개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도 했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1년 3·4월호
작성일자
2013-11-12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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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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