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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부산 기획연재

부자동네라서 ‘부민동’? 천만에!

부민포에서 온 이름이 정답… 일본의 지명 왜곡 바로 잡아야
이야기 한마당 - 일본인에 의한 부산사 왜곡

내용

부산 지역사에 대한 곡필(曲筆)이 지나치다. 그 곡필은 일본의 전설적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記)가 우리의 가야나라를 일본이 다스렸다고 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내세웠는데 허황하기 짝이 없다. 부민동, 아미동, 다대포 등의 지명 유래가 이를 증명한다.

일본 강점기에 일본 사람 도꼬오 겐겨오(都甲玄卿)가 부산 역사를 일본말로 쓴 부산부사원고(釜山府史原稿)가 있다. 부산부사원고는 원고지에 씌어진 것이 광복 후 공개되고 1989년에는 일본어 그대로 프린트를 등사한 6권의 책으로 나와 세간에 퍼지게 되었다.

원고를 쓴 도꼬오는 당시 부산부 촉탁 같은 직책으로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부산사를 그 나름대로 살핀 것 같다.

내용면으로 볼 때 부산에 둔 왜관 내부의 상황, 개항기의 실태, 일본 거류민의 동향 등 우리가 접근할 수 없었던 영역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오늘날의 부산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일본인이 기록한 '부산부사원고'

그 반면 이 지역 지역사에 대해서는 곡필(曲筆)이 지나치다. 그 곡필은 일본의 전설적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記)가 우리의 가야나라를 일본이 다스렸다고 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내세웠는데 허황하기 짝이 없다. 그 곡필 가운데 지명 관계만 줄여 말한다.

먼저 부산부사원고가 남구의 감만동을 말한 그 얘기부터 하자. 부산부사원고는 감만동의 감만포를 加麻浦(가마포)라 했다. 그것은 일본의 옛 노래책인 만요오수(萬葉集)에 나오는 가마우라(加麻浦)가 이 감만포일 것이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가마다(迦摩多)는 가마포에 있었던 군관의 벼슬 이름일 것이라 했다.

이 '가마우라'와 '가마다'의 '가마'는 일본말 가마(두꺼비)에서 왔지만 그 '가마'는 밥을 짓는 솥을 일본말로 '가마'라 해서 가마 부(釜)의 부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임나일본부가 있을 때 이곳은 일본땅이 되어 일본말로 지명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러했던 加麻浦(가마포)가 조선시대 군사진영이 이곳에 들자 이길 '감(戡)', 오랑캐 '만(蠻)'의 감만포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이 같은 곡필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금도 감만포의 유래를 加麻浦(가마포)에서 왔다는 우리 기록을 간혹 본다. 한심한 일이다.

감만포는 처음부터 오랑캐에 이긴다는 우리의 주체성에서 온 지명이다. 그리고 조선조 초 동래현 부산포에 경상좌도수군첨절제사영을 두었다. 그 위치를 부산부사원고는 지금의 감만포를 부산포로 보아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든지 감만동에 두었다고 했다. 이로 인해 사가(史家)들이 혼동을 빚고 있다.

왜곡된 부산의 지명들

다음은 서구의 부민동 이야기를 하자. 부민동은 부민포에서 온 이름이다. 부민포는 보수천이 내려 바다에 닿는 바닷가로 그 때는 지금의 충무동과 남포동보다 훨씬 위쪽의 토성동까지 오른 자리에 있었던 포구였다. 그 포구를 부민포라 했기 때문에 그 서쪽지역을 부민동이라 한 것이다.

그 때의 부민동은 지금의 부민동 이남 전역을 말했다. 그 이후 부민동 남쪽으로 가호수가 불어나서 남부민동 토성동 충무동 아미동 초장동 들로 분동이 되면서 제각각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부민동의 동명 유래를 말할 때 천석지기 부자가 살아서 부민동이라 했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나온다. 그 말의 출처 또한 '부산부사원고'다.

그 원고에 의하면 부민동 지역을 藤九郞谷(등구랑곡)이라 하여 옛날 천석지기 부자가 살았다는 말이 초량화집(草梁話集)에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초량화집은 1825년 일본인 오다이 꾸고로(小田幾五郞)라는 대마도의 조선어 통역이 일본말로 쓴 책이다. 그것을 도꼬오가 부산부사원고를 쓰면서 한술 더 뜨서 조선 노인의 말에 의하면 등구랑곡은 고려시대 일본사람이 살았다고 하더란 것이다. 도꼬오는 초량화집과 조선 노인에 말의 책임을 돌리고 있지만 논밭을 일굴 자리가 없는 그 부민동 산비탈에 무슨 천석지기 부자가 살았겠는가?

'부민동'과 천석지기는 별개

옛날에는 왜구의 침노가 심해 사람이 살지 못한 새띠벌의 그 곳에 고려시대, 그것도 일본인이 살아서 1천석지기 부자가 어찌 될 수 있었겠는가? 도꼬오가 일본사람이라 한 것은 이곳 사람이 덩굴진 골짜기라 하여 덩구렁골짜기라 한 것을 藤九郞谷(등구랑곡)이란 한자로 쓰다보니 용케 일본사람 이름 '후지 구로오'가 되어 그러한 곡필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곡필은 이곳에 옛부터 일본사람이 살았다는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을 부식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천석지기 부자가 지금까지 부민동의 동명 유래에 등장하는 것은 문제성이 있다.

다음은 서구 아미동 이야기로 돌아가자. 아미동에는 아미골이란 이름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 아미골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곳에 움집이 있어 그 움집을 옛말로 '애막'이라 한 그 애막이 아미로 변한 것이란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누에나방의 눈썹처럼 아름다운 미인의 눈썹을 아미라 해서 미인을 비유하여 '초생달 같은 아미'라 한다. 그러한 초승달이 아미산 뒷산에 걸린 모습에서 아미동 뒷산을 아미산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아미골이라 했다고 한다.

아미동과 다대포도 지명 왜곡

그런데 부산부사원고는 이 곳을 신주를 모시는 당집이 있어 당리(堂里)라 한다면서 중국의 역사서 위지(魏志)의 삼한전(三韓傳)에 나오는 변한의 難彌離須凍(야미리야골)이 이 아미골이란 것이다. 야미리야는 일본어 미야(宮)로서 '신궁(神宮)'을 뜻하고 골은 '고을(郡)'을 뜻해서 '신궁이 있는 고을'이란 것이다. 그런 이름으로 보아 일본에 속한 한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부족국가 정도의 작은 나라라 해도 지금의 아미동의 그 좁은 곳에 한 집단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 또한 도꼬오의 손끝에서 놀아난 역사의 왜곡이다.

그리고 지금의 서구 암남동(岩南洞)의 암을 暗(암)으로 보아 그 暗(암)이 일본말로 야미로도 발음하니 삼한전에 나오는 야미리의 남쪽이라 하여 암남이 되었다고 했다. 아미동과 암남동의 거리는 30리나 된다. 견강부회도 도를 넘겼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이 암남동의 유래를 아미동의 아미골에서 왔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우리 역사 스스로 바로 잡아야

다대포(多大浦)도 그렇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多多羅(다다라)나 多多良(다다라)을 우리의 다대포로 말한 것이라 했다. 그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가 삼한시대 이 지역에 있었을 때 이 다대포는 일본과의 왕래를 위해 임나일본부의 관아(관청)에 버금가는 치소(治所)도 있었을 것이라 했다. 이 또한 곡필의 한계를 넘어 해괴하다.

그런데 이즈음에도 다대포에 관한 지명 이야기가 나올 때면 일본서기의 내용을 부산부사원고가 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많다.

이 이야기의 첫머리에서 부산부사원고는 일본인이 그들 자료로서 쓴 관계로 그들이 이곳에서 작용한 왜관이나 일본거류지의 내용은 믿을 만해도 우리 역사에 관해서는 식민지사관 부식을 위한 곡필이 많다는 것을 거듭 말해 둔다.

작성자
부산이야기 2006년 9·10월호
작성일자
2013-08-26
자료출처
다이내믹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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